일원상은 소태산의 대각으로 밝혀진 최고 종지를 의미하는 원불교 교리이다. 소태산은 20년 간의 구도 과정에서 도달한 대각의 심경을 언어나 문자로 표현하기 이전에 일원상(○)으로 상징하였다. 그는 일원(一圓)이 우주만유의 본원이고 제불제성(諸佛諸聖)의 심인(心印)이며 일체중생의 본성자리라고 보았다. 일원의 진리를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삼았기에 세계 모든 종교는 모두 일원의 진리에 포함된다고 하였다. 소태산은 일원상의 진리를 통해 인간의 주체성을 근본적으로 알게 되고 이것이 곧 우주적 진리를 파악하는 데 있어 중요한 방법이라고 하였다.
원불교의 신앙의 대상이며 수행의 표본이다. 소태산은 20년 간의 구도과정에서 도달한 대각의 심경을 언어나 문자로 표현하기 전에 일원상(○)으로 상징하였다.
그는 이 일원이 우주만유의 본원이고 제불제성(諸佛諸聖)의 심인(心印)이며 일체중생의 본성자리로서 생멸 없는 도와 인과응보의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기틀[相]을 지었다고 표현하였다.
평소에 온갖 방편으로 이 일원상의 진리를 대중들에게 설파하였다. 그러나 일원의 진경은 언어도단의 입정처(入定處)이기 때문에 아무리 현묘한 언설로 표현되었더라도 그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고 말하였다.
또한 소태산은 각종 각파로 분립한 세계 모든 종교의 근본되는 원리도 하나의 진리에 바탕하였고, 이름은 각각 다르나 어떠한 방면, 어떠한 길을 통한다 할지라도 최후의 경지에 들어가서는 모두 일원의 진리에 돌아가는 것이며, 이러한 진리에 근원을 세운 바가 없는 종교는 사도(邪道)라고 하였다.
이 일원상은 곧 사은(四恩)으로서 인간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으며, 절대유일하고 원만평등하며 순환불궁(循環不窮)한 속성을 지니고 그 자체의 진리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는 원불교의 최고종지로 제시한 일원상의 의미를 대중들에게 인식시키려고 다양한 표현을 쓰고 있다.
첫째, 변(變) · 불변(不變)이라는 표현이다. 일원의 진리는 변하는 자리에서 보면 계속 변하나 불변의 자리에서 보면 항존불변이라는 것이다.
「일원상서원문(一圓相誓願文)」에서는 이를 “능이성유상(能以成有常) 능이성무상(能以成無常)”이라고 하여 변하는 무상의 자리와 불변하는 유상의 자리가 서로 떠나지 않고 상즉(相卽)되어 있다고 하였다.
둘째, 공(空) · 원(圓) · 정(正)이다. 공이란 무념행(無念行)으로 되는 공이며, 원이란 무착행(無着行)으로 드러난 원이며, 정이란 중도행(中道行)으로서 실천하는 행위표준을 말한다.
셋째, 도(道)와 덕(德)이다. 도란 ‘떳떳이 행할 수 있는 길’이며, 덕은 도를 행하고 나서 나타나는 결과를 말한다.
넷째, 이(理)와 사(事)이다. 이는 천조의 대소유무(大小有無)를 이름이요, 사는 인간의 시비이해(是非利害)를 말한다. 이와 사라는 두 글자로 우주와 인간의 전체를 설명하고 있다.
다섯째, 동(動)과 정(靜)이다. 이는 진리의 근본모습이다. 움직이는 측면에서 보면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나 정의 측면에서 보면 여여자연(如如自然)하여 고정불변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일원상 진리의 모습을 통하여 소태산은 인간의 주체성을 근본적으로 알게 하고 이것이 곧 우주적 진리를 파악하는 데 있어 중요한 방법이라고 가르쳤다. 일원상의 진리를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할 때 대각의 체험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도달된 경지로 볼 때 종교인은 신앙을 통하여 수행의 길을 잡아야 하고, 수행을 통하여 신앙의 본질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대각의 경지는 자신의 힘만으로 달성되는 것도 아니며, 또한 타력의 힘만으로 달성될 수도 없다. 자력과 타력이 뭉쳐져서 함께 나아가고, 진리와 내가 둘이 아닌 경지에 도달할 때 가능한 것이다. 소태산은 이것을 ‘자신할만한 타력’으로 표현하였으며 일원상의 진리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이라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