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악산하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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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악산 하신흥종교촌
모악산 하신흥종교촌
신종교
개념
전북특별자치도 모악산 주변에 산재한 증산계 종파를 비롯하여 단군계 · 동학계의 종파를 총칭하는 종교용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모악산하종교는 전북특별자치도 모악산 주변에 산재한 증산계, 단군계, 동학계 등의 종파를 총칭하는 용어이다. 모악산하의 종교는 미륵신앙과 강증산의 후천개벽 사상이 결합된 것으로 보인다. 강증산은 죽기 직전에도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와서 미륵불을 보라.”고 할 정도였다. 증산이 1909년 세상을 떠나자 제자들은 모악산 주변에서 각 종파로 분립하였다. 주요 종파로는 선도교, 태을교, 보천교, 미륵불교, 증산대도회, 제화교, 무극대도교, 선불교, 용화교, 동도교증산교회 등이 있다. 분파들은 후천선경 도래의 관건인 병겁을 해결하기 위한 의통권능을 중요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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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전북특별자치도 모악산 주변에 산재한 증산계 종파를 비롯하여 단군계 · 동학계의 종파를 총칭하는 종교용어.
내용

거의 대부분의 종파들이 증산사상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모악산노령산맥의 서남단에 위치한 해발 794m의 주봉으로서 전북특별자치도의 완주 · 김제 · 정읍의 세 군과 인접해 있으며,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미륵불상이 있는 금산사(金山寺)가 위치해 있는 곳이다.

이 절은 766년(혜공왕 2)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중창할 때부터 미륵신앙의 근거지로 널리 알려져 왔으며, 당래불(當來佛)인 미륵불은 민중들의 구세주로서 광범위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모악산하의 독특한 종교적 분위기는 10여 세기 동안 내려온 미륵신앙과 강증산(姜甑山)의 후천개벽사상이 결합되어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증산은 모악산의 용화동(龍華洞)을 가리켜 “이 곳은 나의 기지라. 장차 꽃밭이 될 것이요, 인성(人城)에 싸이리라.”라고 하였다.

또한 용화동 옆의 계룡봉(溪龍峯)에 대해서는 “신도안의 계룡산은 수탉이요, 모악산의 계룡봉은 암탉이라. 이 암탉이 진계(眞鷄)니라.” 하여 미래선경(未來仙境)의 성지로서 이 곳을 신앙하였다.

또한 “세계의 젖줄은 남조선이며 세계의 명당자리는 금산사, 문명개화의 국가가 삼천나라나 되고 도술문명이 세계를 뒤덮는다[萬國活計南朝鮮 淸風明月金山寺 文明開化三千國 道術運通九萬里].”라 하여 이곳이 세계문명의 중심지가 될 것을 암시하였다. 특히 금산사는 증산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내가 서천서역대법국 천계탑(天階塔)에 내려와서 삼계를 둘러보고 천하를 대순(大巡)하다가 이 동토에 그쳐 모악산 금산사 미륵금상에 임(臨)하여 30년을 지내면서 최수운(崔水雲)에게 천명과 신교를 내려 대도를 세우게 하였더니 수운이 …… 대도의 참빛을 열지 못하므로 갑자년에 천명과 신교를 거두고 신미년에 세상에 내려왔노라.”라고 한 『대순전경(大巡典經)』의 구절은 금산사 미륵불이 후천선경 건설의 주재자인 증산의 강림처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증산이 죽기 직전에도 “나는 금산사로 들어가서 불양답(佛糧畓)이나 차지하리라.” 또는 “내가 금산사로 들어가리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와서 미륵불을 보라.”고 할 정도였다.

증산이 1909년 6월 24일 3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제자들은 단일교단을 형성하지 못하고 주변 지역에서 각 종파로 분립하게 되었다.

최초로 교단을 세운 이는 차경석(車京石)이다. 증산의 제2부인인 고씨(高氏)가 증산의 3년상을 치르고 난 1911년 9월 19일 금산사 미륵전에서 증산탄신기념치성을 드리다가 증산의 영이 자기에게 내려왔다고 신어를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이에 흩어졌던 교인들은 증산이 성령으로 재림한 것이라고 하면서 다시 모여들게 되자 차경석은 고씨를 모시고 선도교(仙道敎) 또는 태을교(太乙敎)라는 교명으로 포교를 시작하였다.

교세가 번창하자 차경석은 고씨 부인을 제쳐놓고 스스로 교주가 되어 보천교(普天敎)를 세웠다. 그는 신천지 개벽의 운로(運路)가 자기에게 있다고 자부하고 이른바 신세계조화정부(新世界造化政府)의 건설을 시도하여 스스로 천자(天子)임을 칭하였다.

그러자 차경석의 부당함을 비판하면서 신도들이 흩어지기 시작하여 이후로 증산계의 수많은 종파가 생겨나게 되었다. 김형렬(金亨烈)은 증산이 재림할 때 금산사 미륵불에 내려올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미륵불교를 세웠다.

안내성(安乃成)은 금산면 청도리 백운동에서 증산대도회(甑山大道會)를 일으켰으며, 증산 재세시 만국대장에 임명되었던 박공우(朴公又)는 의통(醫統) 전수를 자부하며 태을교를 세웠다.

차경석과 함께 보천교를 만드는 데 노력한 이치복(李致輻)은 주문(呪文) 도통으로 천 · 지 · 인 삼덕이 통천하(統天下)함을 내세우며 제화교(濟化敎)를 만들었다.

증산의 무남독녀였던 강순임(姜舜任)은 조철제(趙哲濟)무극대도교가 증산과 관련을 맺기 위해 자신을 유인, 이용하였다는 것을 깨닫고 24세 때 탈출한 뒤 33세 때 자살을 기도했으나 그때 증산의 말씀을 듣고 선불교를 세웠다.

차경석이 후비로 삼으려 하였으나 거절한 여처자(余處子)는 보천교에서 이탈한 교인들을 모아 금산리 용화동에 선도교(仙道敎)를 세웠다.

그녀는 예언과 안수를 잘해 제자들은 증산이 말한 의통의 신력(神力)이 그녀에게 내렸다고 믿었다. 후천개벽시 병겁(病劫)으로 인한 환란을 극복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증산은 해결의 묘방을 의통이라 했기 때문에 제자들의 의통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던 것이다.

또한 증산의 가르침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미륵선경의 사상이었기 때문에 이 요소도 여러 종파에 흔히 나타나고 있는데, 특히 서백일(徐白一)용화교(龍華敎)에서 현저하게 드러난다.

서백일은 병겁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용화동 30리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주장하고 용화선경은 여기서부터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그 밖에 증산의 수제자 중 하나로서 증산의 재림을 믿으며 주문을 읽고 도통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포교에 힘쓰지 않고 수십 명의 교인으로만 일파를 이루고 지낸 문공신(文公信)의 종파가 있다.

또한 『도리원서문』을 천독(千讀)하게 되면 도통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 김광찬(金光贊)의 도리원파(桃李園派), 이상호(李相昊) · 이정립(李正立) 형제의 교리체계화 사업이 두드러지는 동도교증산교회(東道敎甑山敎會)가 있다.

그리고 현재 모악산하에서는 제일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동도교보화교회 등 많은 종파들이 존재하고 있다. 모악산하종교의 변천양식은 네 단계로 규정지을 수 있다.

첫째 단계는 증산의 접령(接靈) 또는 치병, 예언적 문답에 초점을 둔 종교들이다. 둘째 단계는 증산을 천사(天師)로 호칭하여 옥황상제 · 구천상제로 받듦으로써 절대적인 능력을 지닌 신격화 움직임을 보이는 종교들이다. 셋째 단계는 미륵사상에 초점을 두고 금산사에서부터 미륵선경이 열릴 것이라고 주장하는 종교들이다.

넷째 단계는 증산이 예시한 후천선경이 열리게 될 때 그 예시와 공사(公事)가 이미 단군 · 수운 · 증산에 의하여 행해졌다고 보고 삼단계 신앙체계를 주장하는 종교들이다. 이와 같이, 변천의 흐름을 잡아볼 수 있으나 그 주요 맥락은 후천선경 도래의 관건인 병겁해결을 위한 의통권능에 있다고 여겨진다.

참고문헌

『한국신흥종교』(류병덕,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1977)
『증산교개설』(홍범초, 창문각, 1982)
『한국민중종교사상론』(류병덕, 시인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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