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태운장(泰雲長).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김제 출신.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고 일찍이 동학에 가담하여, 동학혁명 때에는 직접 출전하기도 하였다.
1894년(고종 31) 10월 동학군이 서울을 향해 진군할 때 청주병영 근처에서 강증산을 처음으로 만났다. 1901년 강증산이 천지공사(天地公事)를 시작할 때부터 8년 동안 시중들었으며 딸을 강증산에게 수부(首婦)로 내어주는 등 수제자 구실을 다하였다.
그러나 강증산이 죽은 뒤에 약장 등의 유물과 강증산의 사명이 고부인에게 내려지자, 강증산의 본부인인 정부인(鄭夫人)을 데려다 신력을 얻게 하여 고부인과 대항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15년 모악산 금강대에서 백일기도 후 신안이 열려 영서(靈書)를 받았다고 하면서 교파를 형성하였다. 그는 강증산이 가르친 태을주(太乙呪)를 쓰지 않고, 동학에서처럼 시천주(侍天呪)로써 수련하면서, 신자의 생년(生年)에 의한 물형부(物形符:玄武經에 있는 符를 十二地支에 붙여 동물의 모양을 그림)를 그려 불사름으로써 병을 치료하고 재앙을 면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1916년 괴질이 발생하여 전세계 인류를 전멸시킬 것이므로 이를 구제한다면서 삼백육십주 공사(三百六十州公事:전국 360군에 符를 땅에 묻는 일)를 행하였고, 또한 강증산의 영체가 머물러 있는 금산사 미륵불에 의미를 부여하여 당시 금산사 주지인 곽법경(郭法境)에게 권유, 1918년 금산사 안에 미륵불교라는 교파를 세웠다. 이 때 신도가 수천에 달했으나 일제에 의하여 해산되었다.
1921년 서울에서 불교진흥회를 조직하고 다음해에 미륵불교라고 고친 다음 본부를 금산사로 옮겼다. 1923년 일본 정부의 고급관리와 조선총독부 관리, 그리고 각 도 · 부 · 군의 관리들의 이름을 적어 전국 360군에 묻었으며, 가을에 일본에 큰 재앙이 있으리라고 예언하였는데, 그 해 일본에 큰 지진이 일어나자 신도들이 크게 불어났다.
그는 가끔 기도 끝에 강증산에게서 영서를 받아 그것으로써 신도들을 지도하였다고 한다. 1931년 『중화집(中和集)』을 저술하였으나 간행하지 못한 채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