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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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신종교
인물
일제강점기 금산사에 미륵불교를 설립한 종교창시자.
이칭
태운장(泰雲長)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62년(철종 13)
사망 연도
1932년
출생지
전라북도 김제
정의
일제강점기 금산사에 미륵불교를 설립한 종교창시자.
개설

호는 태운장(泰雲長). 전라북도 김제 출신.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고 일찍이 동학에 가담하여, 동학혁명 때에는 직접 출전하기도 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94년(고종 31) 10월 동학군이 서울을 향해 진군할 때 청주병영 근처에서 강증산을 처음으로 만났다. 1901년 강증산이 천지공사(天地公事)를 시작할 때부터 8년 동안 시중들었으며 딸을 강증산에게 수부(首婦)로 내어주는 등 수제자 구실을 다하였다.

그러나 강증산이 죽은 뒤에 약장 등의 유물과 강증산의 사명이 고부인에게 내려지자, 강증산의 본부인인 정부인(鄭夫人)을 데려다 신력을 얻게 하여 고부인과 대항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15년 모악산 금강대에서 백일기도 후 신안이 열려 영서(靈書)를 받았다고 하면서 교파를 형성하였다. 그는 강증산이 가르친 태을주(太乙呪)를 쓰지 않고, 동학에서처럼 시천주(侍天呪)로써 수련하면서, 신자의 생년(生年)에 의한 물형부(物形符:玄武經에 있는 符를 十二地支에 붙여 동물의 모양을 그림)를 그려 불사름으로써 병을 치료하고 재앙을 면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1916년 괴질이 발생하여 전세계 인류를 전멸시킬 것이므로 이를 구제한다면서 삼백육십주 공사(三百六十州公事:전국 360군에 符를 땅에 묻는 일)를 행하였고, 또한 강증산의 영체가 머물러 있는 금산사 미륵불에 의미를 부여하여 당시 금산사 주지인 곽법경(郭法境)에게 권유, 1918년 금산사 안에 미륵불교라는 교파를 세웠다. 이 때 신도가 수천에 달했으나 일제에 의하여 해산되었다.

1921년 서울에서 불교진흥회를 조직하고 다음해에 미륵불교라고 고친 다음 본부를 금산사로 옮겼다. 1923년 일본 정부의 고급관리와 조선총독부 관리, 그리고 각 도 · 부 · 군의 관리들의 이름을 적어 전국 360군에 묻었으며, 가을에 일본에 큰 재앙이 있으리라고 예언하였는데, 그 해 일본에 큰 지진이 일어나자 신도들이 크게 불어났다.

그는 가끔 기도 끝에 강증산에게서 영서를 받아 그것으로써 신도들을 지도하였다고 한다. 1931년 『중화집(中和集)』을 저술하였으나 간행하지 못한 채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대순전경(大巡典經)』
「한국신흥종교자료편 1-증산계총론-」(이강오, 『전북대학교논문집』 7, 1966)
『증산교사』(이정립, 증산교본부, 1977)
집필자
김홍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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