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일순은 대한제국기 때 증산 사상을 개시한 종교창시자이다. 자는 사옥, 호는 증산이다. 1871년(고종8)에 태어나 1909년(순종 2)에 사망했다. 동학농민운동 후의 사회적 참상을 보고 인간과 세상을 구원할 종교를 세울 결심을 하였다. 1901년 모악산 대원사에서 깨달음을 얻고, 정읍, 부안, 순창 등 전라북도 각 지역에서 포교하였다. 1907년 의병모의 혐의로 고부경무청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1909년 강일순이 죽은 뒤, 보천교를 비롯한 수십 개 교파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저서로 『현무경』이 있다.
증산교의 경전인 『대순전경(大巡典經)』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인 권씨의 태몽에 갑자기 하늘이 남북으로 갈라지며 큰 불덩어리가 내려와 몸을 덮고 하늘과 땅이 밝아짐을 보았으며 그로부터 잉태하게 되어 13개월 만에 그를 낳았다고 한다.
그리고 출산 때에는 그의 아버지가 두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산모를 간호하는 것을 비몽사몽간에 보았는데, 이상한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하고 밝은 기운이 집을 둘러 하늘로 뻗쳐올라 7일간 계속되었다고 한다.
가난한 농가의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그의 선조들이 이조 참의와 도승지 등의 벼슬을 지낸 것으로 보아 그는 몰락한 양반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학문적인 소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인 빈곤 때문에 일찍 학업을 중단하고 14, 15세 때에는 다른 지방으로 가서 남의집살이와 나무꾼 생활도 하였으며, 21세에 결혼한 후 처가에서 훈장생활도 하였다.
1894년에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사람들에게 “이 혁명은 실패할 것이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충고하였다고 한다.
동학농민운동 후에 나타난 사회적 혼란과 참상을 보고서 인간과 세상을 구원할 새로운 종교를 세울 결심을 하게 된 그는, 이러한 혼란에서 벗어나는 길은 기성종교나 인간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으며 오직 하늘과 땅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그는 유 · 불 · 선 등의 기성종교의 교리와 음양 · 풍수 · 복서 · 의술 등을 연구하는 한편, 신명(神明)을 부리는 도술과 과거 · 미래를 알 수 있는 공부를 하고 1897년부터 3년간 세상을 보다 널리 알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이 기간에 충청도 비인(庇仁) 사람인 김경흔(金京訢)으로부터 증산교의 중요한 주문이 된 태을주(太乙呪)를 얻었으며, 연산(連山)에서는 당시 『정역(正易)』을 저술한 김일부(金一夫)를 만나 정역에 관한 지식을 얻게 되었다.
1901년 모악산에 있는 대원사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하던 중, 그 해 7월 하늘과 땅의 원리를 깨닫게 되고 인간의 욕심과 음란 · 성냄 · 어리석음의 네 가지를 극복함으로써 성도(成道)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원사에서 성도한 그는 집으로 돌아와 그 해 겨울 증산교 교리의 핵심인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하였는데, 1902년부터 1909년까지 7년간 모악산 근방을 중심으로 하여 포교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 이외에도 전주 · 태인 · 정읍 · 고부 · 부안 · 순창 · 함열 등 전라북도 각 지역에서도 활동하였다.
그는 자신이 세운 종교를 “만고(萬古)에 없는 무극대도(無極大道)”라고만 하였을 뿐, 증산교라는 명칭은 훗날 그의 호를 따서 일컬어진 것이다.
1907년 추종자 20여 명과 함께 고부경무청에 의병모의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추종자들은 15일 만에, 강일순은 40여일 만에 석방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1909년 갑자기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고하여 사방에 흩어져 있던 추종자들을 모은 뒤 세상에 있는 모든 병을 대속하고 죽었다고 한다.
그가 죽자 추종자 몇 사람이 남아 장례식을 치렀는데 그 뒤 강일순의 교단은 다시 부흥하게 되어 일제강점기는 한때 6백 만 신도를 자랑하던 보천교 등으로 계승되었으며, 현재에도 수십 개의 교파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는 후천세계에 관해서 예언한 『현무경(玄武經)』을 남겼으며, 증산교에서는 교단의 창시자일 뿐만 아니라 신앙대상으로서의 의미도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