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성영(成英), 전라남도 해남 출신.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고 목포 영흥소학교 · 중학교를 거쳐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지리역사학을 전공하였다.
1919년 형 상호(祥昊)가 있던 보천교(普天敎)에 들어가 잡지 『보광(普光)』의 주필 및 사장직을 맡았으며, 1924년 보천교에서 인수하려 했던 『시대일보(時代日報)』 주필을 지냈다.
그러나 차경석(車京石)과 뜻이 맞지 않아 그 자리를 사퇴하고 그 뒤 10여 년 동안 중국 등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사학 · 철학 · 증산사상 등을 연구하였다. 1942년 11월 임경호(林敬鎬) · 문정삼(文正三) 등과 일본의 패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상의하고, 수운 · 증산 양교의 각 교단을 연합하여 광복 후 신앙의 지도세력을 양성하기로 하였다.
1943년 동아흥산사(東亞興産社)를 설립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붙잡혀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광복 후 출옥하였다. 8·15광복이 되자 형 상호와 함께 서울에서 대법사(大法社)를 조직하여 증산교를 보급하였다.
1949년 주간 국민신보를 경영하였고, 1952년 전북 전시연합대학 강사를 지냈다. 1967년 형이 사망하자 증산교의 교주가 되어 종단을 이끌었다. 형 상호와 함께 수집, 편찬한 『대순전경(大巡典經)』은 증산교의 기본 경전이 되었으며, 그의 『대순철학』은 증산사상을 철학적 차원에서 해석한 최초의 책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 밖에도 『종교학신론』 · 『민족적 종교운동』 · 『금산다화(金山茶話)』 · 『고부인신정기(高夫人神政記)』 · 『증산교사』와 미출판 원고로 『대순전경해설』 · 『증산교교리학』 · 『연력학(鍊力學)』 등의 저술이 있다.
특히 증산사상을 깊이 연구하여 체계를 정립하였으며, 단군-수운-증산으로 이어지는 삼단 신앙체계(三段信仰體系)를 형성, 민족종교의 주체성 확립에 노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