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雙磎寺)의 말사이다. 신라시대 의상(625~702)의 주1가 창건한 화엄십찰의 한 곳으로 전해 온다. 그런데 『삼국유사』 「의상전교(義相傳敎)」에 나오는 화엄십찰에는 ‘비슬산 옥천사’라고 되어 있고, 또 조선 전기까지 창녕에 비슬산 옥천사가 있었으므로, 화엄십찰의 옥천사는 창녕의 옥천사라는 주장도 있다.
1935년에 필사된 『옥천사사적기』에는 창건 이후 주2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898년(효공왕 2) 진경국사 심희(854~923), 964년(광종 15) 혼응화상, 1110년(예종 5) 혜은화상, 1239년(고종 26) 보융화상, 1371년(공민왕 20) 지운과 원오가 중창하였다고 하였지만, 역사적 근거는 찾아지지 않는다. 옥천사에 대한 신빙성 있는 기록은 조선 후기부터 확인된다.
임진왜란 이후 지속적으로 중건되었다. 1640년 동상실, 1642년 승당, 1646년 주3, 1654년 법당이 새로 조성되었다. 1664년 정문, 1670년 주4, 1689년 만월당(滿月堂), 1694년 관음전을 세웠다.
1694년 청련암을 창건하고, 1701년에는 백련암을 중창하였다. 또한 1719년 청계당 주5, 1722년 법당 번와, 1725년 관음전 개수, 1726년 승당 개수, 1730년 지장전 신축, 1737년 나한전 개수, 1740년 극락전 개수, 1743년 자금당 개수 및 후불삼단탱 조성 등의 불사를 하였다. 그 후 1862년 민란으로 전각들이 크게 피해를 입었으나, 1864년 법당을 새로 세웠으며, 1888년에 백련암과 청련암을 중건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승려들은 승역( 군역과 잡역)을 부담해야 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옥천사에 소장된 총 69건의 문서에서 잘 나타난다. 옥천사의 승려들은 진주 촉석산성의 의승역(義僧役)에 참여하고 종이를 제작하여 지방 관청에 납품하는 지역(紙役)을 비롯한 여러 잡역을 부담하고 있었다. 잡역의 고통 때문에 당시 옥천사에 거주하는 승려가 300여 명에서 138명으로 줄어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1784년부터는 내수사(內需司)에 소속되어 어람지(御覽紙, 임금을 위한 종이)를 생산하는 사찰이 되었음에도 다른 잡역을 면제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옥천사에서는 1744년(영조 20) 7건의 갑계(甲契)를 시작으로 1816년(순조 16)의 불유계(佛油契), 1820년(순조 20)의 지계(紙契), 1862년(철종 13)의 지장계(地藏契), 1867년(고종 4)의 인경계(印經契), 1894년(고종 31)의 칠성계(七星契), 1867년의 인경계, 1906년의 장등계(長燈契), 1919년의 만일염불계(萬日念佛契), 1955년의 왕생계(往生契), 1957년의 정토계(淨土契) 등 17개 이상의 다양한 사찰계가 확인된다. 이러한 사찰계를 통해 지속적으로 신앙활동과 불사를 하며 사찰을 경영해 왔다.
옥천사와 산내 암자에는 국가지정문화유산 보물 4점,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8점,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 7점이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옥천사 일원은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보물로는 1252년(고종 39)에 제작된 청동북, 1664년(현종 5)에 처음 건립된 자방루, 1808년(순조 8)에 제작된 영산회 괘불도 및 함, 1744년에 조성된 지장보살도 및 시왕도가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는 대웅전, 대웅전 석조삼존불좌상 및 목조대좌, 명부전 불상, 제석천도, 동종, 청동향로, 청련암 목조관음보살좌상, 연대암 지장시왕도가 있다.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로는 명부전, 아미타불회도, 자방루 청동북, 옥천사 소장 범종, 청련암 철제 솥, 청련암 아미타불회도, 연대암 아미타불회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