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유의 자는 도광(道光)이며 하남(河南) 출신이다. 아버지는 김용(金容)이고, 어머니는 이씨이다.
찬유는 13세 때 출가하여 상주 삼랑사(三朗寺)의 융제(融諦)를 찾아갔으나 그의 재능을 알아본 융제가 그를 혜목산(慧目山) 고달사(高達寺)의 심희(審希) 선사에게 보냈다. 890년(진성여왕 4) 22세가 되던 해에 찬유는 삼각산 장의사(莊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고, 이후 광주 송계선원(松溪禪院)에 머물렀다. 892년 찬유는 심희의 허락을 받고 당으로 유학을 떠났다. 당에서 그는 서주(舒州)의 투자 대동(投子大同) 문하에서 수행하며 그의 법맥을 이었다. 이후 천태산을 비롯하여 각지를 떠돌며 선 지식을 찾아다녔다.
921년(경명왕 5)에 귀국한 찬유는 심희를 찾아가 삼랑사(三郞寺)에 머물렀다. 3년 후인 924년 고려 태조가 있던 혜목산으로 자리를 옮겼다. 후백제의 침공, 심희의 입적 등으로 인해 봉림산문은 쇠락하였다. 당시 찬유는 정치적이고 사상적인 입장으로 인해 고려 태조의 후원을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찬유는 혜종, 정종, 광종 대까지 고려 왕실의 귀의를 받았다. 광종은 그를 왕사(王師)로 책봉하고 증진대사(證眞大師)라는 호를 내렸다. 또한 그를 개경 사나원(舍那院)에 머물게 하고 국사(國師)로 삼았다. 찬유는 958년(광종 9)에 입적하였다.
그가 오랫동안 머물렀던 [고달사]는 971년(광종 22)에 부동사원으로 지정될 만큼 선종의 대표적인 사원으로 자리잡았다. 그의 제자로는 흔홍(昕弘), 동광(同光), 행근(幸近), 전인(傳印) 등이 있다. 시호는 원종대사(元宗大師), 탑호(塔號)는 혜진(慧眞)이다. 찬유는 석두 희천(石頭希遷)-단하 천연(丹霞天然)-취미 무학(翠微無學)-투자대동(投子大同)으로 이어지는 석두계의 법맥을 계승하였다. 그는 신라 하대의 선승들 대부분이 계승하였던 마조계의 법맥이 아닌 석두계의 선 사상을 따랐다.
당의 선종계에서 마조선이 표방한 이념이 절대화되거나 교조화(敎條化)되면서 수행을 경시하거나 부정하는 폐단이 늘어났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마조(馬祖) 자신이 경계하였고, 그의 문하에서는 마음[心]의 실체화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비판은 주로 청원 계통의 석두 희천(石頭希遷)이 마조계와 다른 선 사상을 표방하면서 이루어졌다. 석두 계통의 선사들은 법성(法性), 불성(佛性) 등의 본래성과 모든 일상의 행위인 현실태(現實態)의 작용을 마음[心]의 아래에 무매개적으로 등치한 마조선을 비판하였다. 석두계는 현실태와는 다른 차원의 본래성을 새롭게 지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