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신라 말에 형성된 선종(禪宗)의 한 산문(山門).
산문의 형성 배경
선종이 갖는 이러한 특성과 함께 9세기 중반 당의 회창(會昌) 폐불을 계기로 입당한 유학승들이 신라로 돌아오면서 특정한 개산 조사를 중심으로 그의 법통을 계승한 문도들이 특정한 사찰을 중심으로 한 산문을 지역에서 형성하였다. 선사들은 거주한 사원 단위로 각각 세력을 이루면서 서로 연결된 산문으로 성장하였다. 수백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제자들이 특정 사원을 중심으로 대집단을 이루었다. 나아가 산문은 왕실, 중앙 귀족, 지방 호족의 후원을 받아 본사를 중심으로 곳곳에 장사를 두면서 경제적 기반을 갖추었다.
변천 및 현황
홍척의 문하 제자로는 수철(秀澈, 815~893)이 대표적이다. 그는 중국 유학을 하지 않고 홍척의 법을 계승하였다. 수철은 신라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는데, 경문왕의 부름을 받아 왕경에 갔으며, 왕으로부터 교와 선의 차이에 대해 물음을 받았다. 또한 수철은 헌강왕과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진성여왕의 청에 따라 다시 왕경을 방문하였고, 단의장공주(端儀長公主)의 청에 따라 심원사(深源寺)에 머물렀다. 그는 당시 정치적 혼란에 따라 여러 곳의 사찰로 옮겨 다녔으며 말년에는 법운사(法雲寺)에 머물렀다. 홍척의 제자로는 수철 외에도 편운(片雲), 음광(飮光) 등이 있었다. 편운의 부도가 정개(正開) 10년에 건립되었는데, 정개는 후백제에서 사용된 연호이며, 정개 10년은 910년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견훤 정권이 대야성을 중심으로 신라와 군사적으로 대치하였으므로 편운 부도를 건립하면서 실상산파를 포섭하고자 한 의도가 작용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현재 약사전에 봉안된 철조여래좌상은 현존하는 철불 중 가장 시기가 이른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문성왕 대 왕실의 지원을 받은 것으로, 원래 철불이 봉안된 곳은 약사전이 아니라 현재의 보광전(普光殿)으로 보고 있다. 실상산문의 본산 사찰인 실상사는 고려시대에 보월(寶月)에 의해 다시 중창되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쇠락하기 시작하였다. 임진왜란 때 실상사가 파괴되었으나 1690년(숙종 16)에 침허(枕虛) 대사가 대적광전을 비롯한 36동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방화에 의해 소실되었으며, 이후 월송(月松) 대사가 재건하였다.
의의 및 평가
참고문헌
원전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 『조당집(祖堂集)』
-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단행본
- 추만호, 『나말여초 선종사상사 연구』(이론과 실천, 1992)
- 『실상사Ⅱ 발굴조사보고서』(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7)
논문
- 강건우, 「남원 실상사 철고여래좌상 재」 (『한국고대사탐구』 27,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7)
- 정동락, 「신라하대 선종사원가 철불」(『한국고대사탐구』 27,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7)
- 조범환, 「신라하대 홍척선사와 실상산문의 개창과 철불 조성」( 『신라사학보』 6, 신라사학회, 2006)
- 최병헌, 「신라하대 선종구산파의 성립」(『한국사연구』 7, 한국사연구회, 1972)
인터넷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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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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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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