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는 고, 집, 멸, 도의 네 가지 진리를 의미한다. 성인들이 체험적으로 이해한 네 가지 진리라는 의미에서 사성제(四聖諦)라고도 한다. 사제는 붓다가 깨달은 후 다섯 비구에게 설법한 최초의 법문인 『초전법륜경』에서 처음 보인다. 고제와 집제는 유전(流轉)하는 인과 세계이다. 멸제는 깨달을 목표 곧 이상을 말하며, 도제는 열반에 이르는 방법 곧 실천의 수단이라 한다. 연기의 입장에서 보면, 원인과 조건에 해당하는 집(集)에 의한 결과로서 괴로움〔苦〕이 생겨난다. 그리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道〕을 조건으로 하여 괴로움이 소멸된다.
붓다가 깨달은 후 다섯 비구에게 설법한 최초의 법문인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 Dhammacakkappavattana sutta)』에서 사성제가 처음 보이는데, 각각 세 가지 관점에서 설명된다. 괴로움이 있다, 괴로움은 완전히 알아야 한다, 괴로움을 완전히 알았다, 괴로움의 발생이 있다, 괴로움의 발생의 진리는 완전히 끊어야 한다, 괴로움의 발생을 완전히 끊었다, 괴로움의 소멸이 있다, 괴로움의 소멸은 실현해야 한다, 괴로움의 소멸을 실현했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 있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완전히 실천해야 한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완전히 실천했다. 이를 ‘네 가지 진리를 세 번 전개시키는 열두 가지 양상〔三轉十二行相, tri-parivarta-dvādaśākāra, tiparivaṭṭa dvādasākāra〕’이라고 한다. 붓다는 네 가지 진리를 각각 세 가지 양상으로 완전하게 했기 때문에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분명히 밝힐 수 있었다.
사제는 부파불교에서도 가장 중시한 교설이다. 설일체유부의 대표적인 논서인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의 조직은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에 따라 철저하게 4성제를 기초로 한 것이다. 제1 계품(界品)과 제2 근품(根品)에서 온갖 존재(諸法)의 본질과 작용을 밝힌 다음, 제3 세간품(世間品)과 제4 업품(業品) · 제5 수면품(隨眠品)에서 고(苦)의 실상과 그 원인과 조건이 되는 업과 번뇌를 밝히고, 다시 제6 현성품(賢聖品)과 제7 지품(智品) · 제8 정품(定品)에서 고멸(苦滅)의 열반과, 그 원인과 조건이 되는 지혜와 선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4성제에 대한 직접적인 관찰〔四諦現觀〕에는 『초전법륜경』의 삼전십이행상(三轉十二行相)설과 설일체유부 아비달마의 사제16행상(四諦十六行相)설이 있다. 삼전십이행상은 사제설 각각을 보여줌〔示轉〕, 권함〔勸轉〕, 얻음〔證轉〕으로 분류하여 열두 양상으로 설명한 것이다. 사제십육행상(四諦十六行相)이란 사제설의 고 · 집 · 멸 · 도에 각각 네 가지 양상(四行相)을 말한다.
16행상이란 고제(苦諦)에서 모든 법에 대해서 변하고〔無常〕, 괴로우며〔苦〕, 비어있으며〔空〕, 고정된 실체가 없다〔無我〕는 이치를 관찰하고, 집제(集諦)에서 번뇌에 대해 원인〔因〕, 발생〔集〕, 생겨남〔生〕, 조건〔緣〕을 관찰하고, 멸제(滅諦)인 열반에 대하여 소멸〔滅〕, 고요함〔靜〕, 뛰어남〔妙〕, 벗어남〔離〕을 관찰한다. 도제(道諦)인 번뇌 없는 성자의 길〔無漏聖道〕에 대해서 길〔道〕, 진리에 부합함〔如〕, 열반에 이르는 첩경〔行〕, 윤회를 벗어나는 방법〔出〕의 네 가지를 관찰한다.
네 가지 진리의 직접적인 관찰〔사제현관〕에 의한 여덟 가지 이해와 여덟 가지 지혜〔八忍八智〕의 열여섯 가지 마음〔十六心〕에 의해서 번뇌를 끊는다. 15심까지는 직접 체험하는 길〔見道〕이며, 마지막 16심이 닦는 길〔修道〕이다. 네 가지 진리의 직접적인 관찰〔사제현관〕설에는 한꺼번에 직접 관찰하는 법〔頓現觀〕과 점차적으로 직접 관찰하는 법〔漸現觀〕의 두 가지가 있는데, 설일체유부에서는 점차적으로 직접 관찰하는 법〔漸現觀〕을 주장한다. 한편 테라와다는 고집멸도 사제를 한꺼번에 직접 관찰하는 법을 주장한다(『청정도론』 3권).
대승불교의 『마하반야바라밀경』에서는 사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수보리가 붓다에게 말한다. “세존이시여!, 괴로움의 고귀한 진리〔苦聖蹄〕로서 깨닫습니까? 괴로움에 대한 지혜(苦智)로써 깨닫습니까? 원인의 고귀한 진리〔集聖諦〕로써 깨닫습니까? 원인에 대한 지혜로써 깨닫습니까? 소멸의 고귀한 진리〔滅聖諦〕로써 깨닫습니까? 소멸에 대한 지혜로써 깨닫습니까? 고귀한 길의 진리〔道聖諦〕로써 깨닫습니까? 길의 지혜로써 깨닫습니까?”
붓다가 수보리에게 말했다. “고성제로써 깨닫는 것도 아니고, 괴로움에 대한 지혜로써 깨닫는 것도 아니다. 나아가 도성제로써 깨닫는 것까지도 아니고, 길에 대한 지혜로써 깨닫는 것도 아니다. 수보리야, 이 네 가지 고귀한 진리는 평등하기 때문에 나는 이것이 바로 열반이라고 한다. 고성제로도 아니고 집성제 또는 멸성제 또는 도성제로도 아니다. 또한 괴로움에 대한 지혜로도 아니고 원인, 소멸, 길에 대한 지혜로도 아니다.” 반야경은 고집멸도 사제나 사제에 대한 지혜를 통해 깨닫는 것이 아니라 사제를 평등하게 보는 것이 바로 열반이라고 한다. 이러한 반야경의 사제에 대한 이해는 초기불교와 부파불교와는 그 의미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대지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이 괴로움 등의 네 가지 법은 모두가 조건으로부터 생겨, 헛되고 진실하지 않으며, 고유한 성품이 없기 때문에 진실하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니,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소멸시킬 수 있는가?” 사성제 전체를 조건에 의해 생겨났다고 해석하고 있는 대지도론의 입장은 초기불교와 부파불교에서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이 조건에 의해 생겨나지 않은 무위법(無爲法)이라는 점과 다른 입장이다.
천태 지의(天台智顗: 538~597)는 네 가지 사제를 제시하며 대승불교의 사제를 정리하고 있다. 네 가지 사제란 생멸(生滅) · 무생(無生) · 무량(無量) · 무작(無作)사제를 말한다. 네 가지 사제에 대해서는 고려 체관의 『천태사교의』에서 설명하고 있다. 신라 원효는 『법화종요』에서 사제는 성문승을 위한 아함경의 교리라고 한다. “오직 성문승을 지향하는 이를 위하여 사제(四諦)의 모습에 의하여 법륜을 굴리기 때문이니, 『아함경』 등과 같다.”
사성제의 가르침은 기본적으로 ‘조건에 의한 발생’을 의미하는 연기(緣起)에 근거하고 있다. 조건에 의한 발생의 법칙을 말하는 연기의 입장에서 보면, 원인과 조건에 해당하는 집(集)에 의존하여 결과로서 괴로움〔苦〕이 생겨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道〕을 조건으로 하여 괴로움의 소멸〔滅〕의 관계를 알 수 있다.
붓다가 네 가지 고귀한 진리를 설하는 방법은 의사가 환자를 대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의사로써 붓다는 먼저 병을 진단하고, 그 병의 원인과 발생 과정을 찾아낸 다음, 병의 제거 방법을 검토하고 나서 병을 치유하는 방법〔처방〕을 내렸다. 괴로움〔苦, dukkha〕은 병이다. 갈애(渴愛, taṇhā)가 병의 발생 원인이다〔集〕. 갈애를 없앰으로써 병이 제거된다. 그것이 치유이다〔滅〕. 여덟 갈래 고귀한 길은 그 처방이다〔道〕.
괴로움의 진리는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生老病死〕의 네 가지 괴로움과, 사랑하는 대상과 헤어지는 괴로움〔愛別離苦〕, 싫어하는 대상과 만나는 괴로움〔怨憎會苦〕,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求不得苦〕, 요약하면 집착의 대상인 인간 존재〔五取蘊苦〕이다. 괴로움의 발생 원인은 세 가지 갈망이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망, 생존 또는 존재에 대한 갈망, 비존재 또는 죽음에 대한 갈망이다. 이 세 가지 갈망이 원인이 되어 괴로움이 생겨난다.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는 괴로움의 원인인 갈망의 소멸이며 열반이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진리는 여덟 가지의 바른 길인 팔정도이다. 바른 견해(正見, sammā-diṭṭhi), 바른 사유(正思, sammā-saṅkappa), 바른 언어(正語, sammā-vācā), 바른 행위(正業, sammā-kammanta), 바른 생계(正命, sammā-ājīva), 바른 노력(正精進, sammā-vāyāma), 바른 마음챙김(正念, sammā-sati), 바른 집중(正定, sammā-samādhi)이다.
사성제는 초기불교 이래 불교의 핵심적인 교리였다. 하지만 부파불교에서 정교한 이론으로 발전하였고, 대승불교의 경전에서는 다양한 해석이 시도되었고 천태지의에 의해 생멸(生滅)사제 · 무생(無生)사제 · 무량(無量)사제 · 무작(無作)사제의 네 가지 사제로 정리되었다. 이는 체관의 『천태사교의』에도 보인다. 원효는 『법화종요』에서 사제는 성문승을 위한 가르침이라고 정의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