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은 번뇌가 소멸된 상태 또는 완성된 깨달음의 세계를 의미하는 불교 교리이다. 언어적으로는 안온함, 불이 꺼진 상태를 뚯하며 불교의 이상적 경지를 의미한다. 초기 경전에편서 붓다는 망집을 끊는 것으로 평안[=열반]이 생긴다고 하였는데, 대승불교에 들어와서는 열반의 종류가 늘어났다. 즉 부파불교에서 분류된 유여의열반과 무여의열반에 본래청정열반, 무주처열반이 추가된다. 한편 대승불교에서는 열반의 상태가 공인가 불공인가가 논쟁의 대상이 되었는데, 원효는 집착하지 않는다면 공으로도 불공으로도 이해되어 문제가 없다고 하였다.
열반[涅槃, 涅般]은 싼쓰크리트어로 nirvāṇa, 빨리어로 nibbāna의 음사어이다. 역어로는 적멸, 멸도, 택멸(擇滅) 등이 있다. 음사어 또한 니원(泥洹), 열반나(涅槃那) 등등 다수가 있다. 반열반(般涅槃)이라고도 한다. 이 경우 반(般)은 pari의 음사어로서 완전한을 뜻하고 이 경우 원적(圓寂)이라고 한역한다. 이것은 불교의 이상적인 경지이지만, 열반은 불교만의 용어는 아니고 주1, 주2 등 여러 종교 수행자들이 사용한 특수한 용어였다. 이 이상적인 경지는 ‘안온함’ ‘온화함’이며, 베다 주3가 목표로 삼았던 이상적인 경지이기도 하다. 어원적으로는 ‘동요를 가라앉히다’, ‘고요히 안정시키다’ 라는 뜻도 있지만, 흔히 ‘불을 불어서 끄는 것’ ‘불어서 꺼진 상태’를 의미하며, 열반에 들어가는 것은 물이 불을 끄는 것에 비유되었고, 붓다의 입멸을 의미했는데, 초기 불교에서는 불교 외에 열반에 이르는 길은 없다고 하였다.
초기 경전인 숫따니빠타[Suttanipata]에서 붓다는 망집을 끊는 것으로 평안[=열반]이 생긴다고 대답했다. 쌍윳따니까야에서도 세상에서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고 열반으로 들어간다고 되어 있다. 이 평안으로 가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쾌락을 탐내지 않는 것, 아름다운 모습에 애착을 일으키지 않는 것 등이다. 쌍윳따니까야에서는 “이 세상에서 보거나 듣거나 생각하거나 식별한 모든 좋은 것에 대한 욕망이나 탐욕을 제거하는 것이 불멸의 열반의 경지이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조심하여 현재에 완전히 번뇌를 제거한 사람들은 항상 편안에 들어간다. 세상의 집착을 초월한 것이다.”라고 하듯이 열반은 집착을 끊는 것으로써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초기 불교의 열반은 신비적인 경지가 아니라 생활의 진리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후 주4에서 열반은 유여의열반과 무여의열반으로 나뉜다. 전자는 생존 근원을 남기는 열반, 후자는 생존 근원을 남기지 않는 열반이다.
한편, 대승불교에서는 열반경의 분류가 다양화된다. 우선 주5이 저술하고 주6이 번역한 섭대승론석에서는 열반의 종류를 네 가지로 분류한다. 본래청정열반, 유여의열반, 무여의열반, 무주처열반으로 나눈다. 이 가운데 이승과 보살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 무주처열반이다. 즉 이승과 보살이 번뇌를 제거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이승이 번뇌를 제거하여 생사를 등지고 열반으로 나아가는 반면에, 보살은 생사도 등지지 않고 열반도 등지지 않는다. 이 가운데 본래청정열반은 성유식론에 본래자성청정열반으로 이름하며, 모든 존재 모습의 진여로서의 이치를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즉 존재 모습이 주7으로 오염되었다 해도 근본 성품이 청정하며 무량하고 미묘한 주8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그 태어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것이 허공과 같으면서 모든 유정들이 평등하게 공유하는 것이다. 다만 오직 진실한 성자들만이 스스로 내부적으로 증득한 세계인데 그 본성이 적멸하므로 열반이라고 한다고 설명된다.
원효는 열반종요에서 열반에 대한 두 가지 정의를 소개한다. 첫째는 무구진여를 열반의 체로 삼는다. 공덕을 일으키는 것은 열반이 아니며, 주체적으로 증득한 지혜가 주9이기때문에 그것이 열반의 체라는 주장이다. 둘째는 불과를 얻어 만덕이 갖추어진 것을 대열반의 체로 삼는다는 주장이다. 원효는 열반이 공인가 불공인가의 논의에서 열반을 공이라고 보는 설과 불공이라고 보는 두 설을 소개한다. 각각의 주장은 경전을 근거로 주장된다. 이 두 설에 대한 원효의 입장은 언어에 집착해서 경전을 이해하면 둘 다 과실이고, 집착하지 않는다면 무방하다는 입장이다. 즉 열반은 공으로도 불공으로도 이해되어 문제가 없다는 취지이다. 원효의 이와 같은 입장은 기신론의 열반 이해를 검토할 때 충분히 이해된다. 즉 기신론에서는 열반진여의 법이 끝내 공이며, 본래부터 공하여 일체의 모습을 떠나있다는 견해를 고쳐야 된다고 본다. 그래서 진여법신은 자체로 공하지 않으며, 무량한 본성의 공덕을 갖추고 있다고 설명한다. 열반을 취하여 집착할 경우에는 우리의 심신법은 본래 태어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그것을 일러 본래열반이라고 하여 집착을 고쳐준다. 이렇게 기신론에서 두 극단에 빠지는 것을 고치는 설명을 방법적으로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승불교의 많은 논서에서 생사와 열반은 다르지 않은 즉의 관계에 있다고 선언한다. 이러한 주장은 주10을 비롯한 반야계의 논서와 삼론계의 저술, 주11을 비롯한 유식계의 논서와, 천태계의 저술, 화엄계의 저술 등에서 폭넓게 주장하고 있다. 의상은 법계도에서 생사와 열반은 항상 함께 화합되어 있다[生死涅槃常共和]고 한다. 즉 열반을 생사와 달리 보지 않는 입장이지만, 직접적으로 ‘즉’이라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은 의상의 사유는 법계도의 주석서 모음집인 법계도기총수록에 계승된다. 법기에서는 발심하면 즉 부처의 과위를 가득 채우는데, 이러한 경지에 이르르면 열반에 머물 때 항상 생사에서 노닐며, 생사에서 노닐 때 항상 열반에 머문다고 설명한다. 의상이 법계도에서 말하는 열반과 생사가 화합된 견해는 일상의 경험은 아닌 것이다. 법기에서는 다른 곳에서 생사는 무성이지만 열반을 본성으로 하며, 열반은 무성이지만, 생사를 본성으로 한다고 하여 생사와 열반 두 경계는 무성을 원리로 삼고 있어 차별이 없음을 설명한다. 진기에서는 열반과 생사의 관계를 계위에 의한 설명과 일승에 의한 설명으로 나눈다. 즉 적멸한 열반의 체는 조건에 따라 생사가 되고, 생사를 성취했을 때 성정열반의 체와 다르지 않은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승에 의거하여 보면 생사와 열반은 본래부터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생사가 바로 너의 몸이고, 열반이 곧 너의 몸이라는 주장을 하는데, 그것은 생사를 필요로 하는 조건 속에 열반이 갖추어져 있고, 열반을 필요로 하는 조건 가운데 생사를 구비하고 있다는 언설에서 드러나듯이, 생사와 열반은 조건의 차이에 따라 파생된 명칭일 뿐 본래는 우리의 몸 자체로 보고 있다. 따라서 법기에서는 삼승에서 말하듯 반드시 생사를 버리고서 열반을 증득한다는 취지로는 영원한 멸도를 얻을 수 없으며, 일승에서는 깊은 해인 삼매에 들어 전전하는 곳이 없는 것을 영원한 멸도라고 한다고 설명한다. 고기에서 생사와 열반은 평등하므로 영원히 멸도한다고 설명하는 것도 생사와 열반의 관계를 항상 조화롭다고 보는 의상 및 의상 후예들의 생각과 일치한다. 다만, 생사와 열반의 관계를 아는 것은 법기가 말하듯 발심 후의 일이다. 명효 해인삼매론에서도 역시 이러한 생사와 열반의 관계는 보통 사람들이 알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정진해서 생사를 버리고서는 생사가 다름아닌 열반이라고 알 수도 없다고 한다. 또한 견등은 분별심으로서는 열반을 명칭해도 그 적멸한 경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