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사상은 불교에서 연기설을 공의 입장에서 해명하여 지혜롭게 사는 법을 제시한 교리이다. 반야사상은 공의 사상을 철학적으로 확립시키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대승불교 초기에 일체개공설(一切皆空說)은 이미 성립되어 있었다. 공(空)이란 존재물 그 자체에 실체인 아(我)가 없음을 뜻한다. 대승불교가 흥기함에 따라 반야경 계통의 경전이 성립되면서 공의 사상은 더욱 강조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의 반야사상은 『반야심경』과 『금강경』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반야심경』은 사원 및 일반 신도의 법회 의식에서 항상 염송되고 있다.
반야사상은 공(空)의 사상을 철학적으로 확립시키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반야사상을 천명한 중관학파(中觀學派)가 성립되기 이전부터 일체개공설(一切皆空說)은 이미 대승불교 초기에 성립되어 있었다. 공이란 존재물 그 자체에 실체인 아(我)가 없음을 뜻한다. 이것은 이미 석가모니 당시의 원시불교에서, “모든 현상은 인(因)과 연(緣)이 가적(假的)으로 화합하여 생겨났기 때문에(因緣所生), 거기에는 아라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諸法無我).”고 주장한 불교의 근본 입장을 밝힌 것이다. 특히, 대승불교가 흥기(興起)함에 따라 『반야경(般若經)』 계통의 경전이 성립되면서 공 사상은 더욱 강조되었다.
원래 이것은 부파불교시대(部派佛敎時代)에 상좌부(上座部)계통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를 중심으로 주장된 법유(法有)의 입장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일체 존재를 상의상대(相依相待)라는 입장에서 파악하여 일체의 아집(我執)을 배격한 자유무애(自由無碍)의 세계를 전개하려고 한 것이다. 공을 이론적인 면에서 볼 때 인간 자신 속에는 실체로서의 자아가 없다고 보는 인공(人空)과,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하여 생기는 것이므로 실체로서 자아는 없다는 법공(法空)으로 나누어지며, 이를 합쳐서 인법이공(人法二空)이라는 초기 대승불교의 반야사상이 싹트게 되었다.
이 공의 사상은 용수(龍樹)와 제바(提婆), 라후라발타라(羅睺羅跋陀羅)에 의해서 확립되었다. 남인도의 브라만 출신인 용수는 처음 소승불교를 배웠으나, 뒤에 히말라야산으로 들어가서 노비구(老比丘)에게서 대승불교를 배웠다고 한다. 그 뒤 초기 대승불교의 여러 경전을 깊이 연구하고 많은 주석서를 저술하여 독자적인 사상을 세웠다. 그는 『반야경』의 가르침을 기본으로 하여 공의 교리를 철학적으로 규명하고, 대승불교 교리의 중요한 기초를 닦았다. 용수는 반야사상뿐만 아니라 모든 대승불교사상의 기초를 확립하였기 때문에, 그는 후세에 중국이나 우리 나라 등의 대승불교권에서 8종(宗)의 조사(祖師)로 존숭을 받았다.
용수의 저작은 한역(漢譯)으로 20부 150권, 티베트역으로 95부가 있다. 이 중 반야사상을 천명한 대표적인 저술로는 연기와 공 등의 불교 근본사상을 서술한 『중론송(中論頌)』과 『십이문론(十二門論)』이 있다. 그리고 『반야경』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부류에 속하는 『대품반야(大品般若)』를 초록하여 당시의 여러 사상이나 전설, 교단의 규정 등을 공의 입장에서 비판, 해설하고, 보살의 실천수행 방법인 육바라밀(六波羅蜜)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한 『대지도론(大智度論)』이 있다.
용수의 제자인 제바는 용수가 주창한 공의 이법(理法)을 체득하고 용수의 입장을 계승하면서도 이를 넘어서서 외교(外敎:다른 종교)를 격렬하게 논란하였다. 용수는 그의 저술에서 여러 가지 문제를 ‘관찰한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제바는 그의 저술 『백론(百論)』에서 여러 견해를 ‘파석(破析)한다’, ‘차견(遮遣)한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즉, 용수는 유무이견(有無二見)의 파석을 통해서 올바른 자세를 나타내려고 한 데 반하여, 제바는 이 입장을 계승하면서도 날카로운 논법으로 여러 학파의 이견을 논파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에게는 『백론』 외에도 『사백론(四百論)』 · 『백자론(百字論)』 등 모두가 백이라는 글자를 쓰고 있는데, 그것은 백의 원어인 사타(sata)가 깨뜨린다는 동사의 어간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그의 입장을 엿볼 수가 있다. 제바의 제자 라후라발타라는 『중론송』의 팔불(八不)을 주석하였다.
이상의 3인을 중심으로 한 계통을 중관파(中觀派)라고 하는데, 이 시대까지는 다른 학파와 대립하는 학파가 아니었다. 중관파라는 명칭은 용수의 『중론송』에서 ‘불생불멸 불상부단 불일불이 불거불래(不生不滅不常不斷不一不異不去不來)’의 팔불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상대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여러 개념의 어느 한편에도 집착하지 않는 입장을 취한다고 하여 중도(中道)라고 한 데서 유래된 것이다.
후일 중관파는 불호(佛護)의 계통을 이어받은 프라산기카파(Pra-sangika派, 必遇性空派)와, 이를 비판하는 청변(淸辨)의 계통인 스와탄트리카파(Sua-tantrika派, 自在論證派)의 두 파로 나누어졌다. 이것은 공의 입장을 파악하는 방법의 상위(相違)에서 나누어진 것으로, 불호는 공이란 입장이 없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다른 이론을 파석해야만 표출될 수 있다고 주장한 데 대하여, 청변은 공이란 적극적으로 스스로의 입장을 주장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불호의 계통에서는 그 뒤 월칭(月稱)과 적천(寂天) 등이 나오고, 청변의 계통에서는 관서(觀誓)가 나와 각기 용수의 『중론송』에 독자적인 주석을 가하였고, 이후의 대승불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중국의 반야사상은 삼론종(三論宗)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삼론종은 용수의 『중론』과 『십이문론』에 제바의 『백론』을 더한 삼론서를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하여 전개된 종파이다. 반야공(般若空)의 사상을 교리의 근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중관종(中觀宗) · 공종(空宗) · 무상종(無相宗) · 무득정관종(無得正觀宗)이라고도 불린다. 이 삼론은 도안(道安)의 권유로 쿠차국에서 초빙된 구마라습(鳩摩羅什)에 의하여 한역(漢譯)되었고, 그것이 제자들에 의하여 연구되어 삼론학파가 형성되었다.
이 삼론학파에 몸을 담아 삼론에 각기 주석을 붙이는 한편, 『삼론현의(三論玄義)』를 지어 삼론종을 대성시킨 이는 길장(吉藏)이다. 그는 12세에 흥황사(興皇寺)에서 법랑(法朗)의 강의를 듣고 이듬해에 출가하여 가상사(嘉祥寺)에서 삼론을 연구하였으므로 가상대사(嘉祥大師)라고도 불리었다. 뒤에 수양제(隋煬帝)의 칙명에 따라 양주(楊州)의 혜일사(慧日寺)에 들어갔다가 다시 장안의 일엄사(日嚴寺)로 옮겨 『법화경(法華經)』을 연구하였다. 그는 섭령상승(攝嶺相承)이라고 하는 삼론연구의 전통을 법랑에게서 이어받아 이른바 신삼론(新三論)의 교리를 집대성하였다. 그 자신은 새로운 종파를 창설하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며, 인도 중관불교(中觀佛敎)의 진의(眞義)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삼종론은 단순히 삼론사상을 종합 서술한 것이 아니라, 삼론을 바탕으로 하면서 ‘무득(無得)의 정관(正觀)’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불교통일론을 주장한 것을 특징으로 삼고 있다. 중국 삼론의 교의는 인도의 파사현정(破邪顯正)과 진속이제(眞俗二諦) · 팔부중도(八不中道)를 계승한 것으로서, 유(有)에도 치우치지 않고 공(空)에도 치우치지 않은 중도의 진리를 설하여 무소득공(無所得空)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파사란 모든 유소득(有所得)의 삿(邪)된 견해를 파함으로써 무소득공의 중도의 진리가 나타나게 됨을 내포하고 있다. 파사를 떠나서 따로 현정(顯正)이 없고, 파사하는 것이 그대로 현정이라고 주장한다. 또, 제법(諸法)의 인연에 의하여 유(有)로 됨을 속제(俗諦)라 하고, 일체가 필경공(畢竟空)이라는 것을 진제(眞諦)라 하는데, 이 이제를 통하여 수행자들을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세계로 인도한다. 즉, 유에 집착하는 자에게는 진제를 설하고, 공에 집착하는 자에게는 속제를 설하여 그들을 인도한다.
팔부중도란 인간의 미혹이 생 · 멸 · 단 · 상 · 일 · 이 · 거 · 래(生滅斷常一異去來)라는 여덟 가지의 유소득의 견해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불생 · 불멸 · 부단 · 불상 · 불일 · 불이 · 불거 · 불래의 팔불을 설하여 여덟 가지 미혹을 파함으로써 무소득중도(無所得中道)의 진리를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길장의 문하에서 혜원(慧遠) 등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지만 삼론종은 종파의 성격으로 크게 발전될 수 없었고, 오히려 중국 선종의 성립 발전에 큰 지주가 되었다.
고구려의 반야사상은 남북조시대에 중국에서 활약한 승랑(僧朗)의 공헌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요동 출신의 고구려 승려인 승랑은 장수왕 후기에 태어났다고 추정될 뿐, 그의 생몰연대나 출가 시기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일찍이 중국에 들어가 구마라습에게서 승조(僧肇)로 이어지는 삼론학을 배웠으나, 당시의 삼론학은 『성실론(成實論)』의 소승적 유사상(有思想)에 영향을 받고 있어 인도 삼론학의 진의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 승랑은 이와 같은 사상조류를 탈피하여 새로운 삼론을 설립하게 되었는데, 그의 출현에 따라 과거의 삼론학을 고삼론(古三論)이라 부르고, 그의 순수삼론학을 신삼론(新三論)이라 부르게 되어 삼론학의 분수령을 이루었다.
이러한 그의 학문적 역량은 중국 하서지방(河西地方)에 널리 알려져 하서대랑(河西大朗) · 독보하서(獨步河西)라는 칭호를 받기까지 하였다. 삼론의 오의(奧義)를 깊이 터득한 승랑은 중국 남방으로 떠나 회계산 강산사(岡山寺)에 머물렀고, 종산(鍾山) 초당사(草堂寺)에 와서는 그곳에 은퇴해 있던 주옹(周顒)에게 삼론학을 가르쳐 그로 하여금 『삼종론(三宗論)』이라는 책을 저술하게 하였다.
만년에 섭산(攝山) 서하사(棲霞寺)로 와서 그의 스승이며 주지였던 법도화상(法度和尙)의 지위를 계승하였다. 또한, 양무제(梁武帝)는 그의 학덕을 높이 평가하여 512년에 우수한 학승 10명을 선발하여 승랑의 문중에서 공부를 시켰는데, 그들 중 승전(勝詮)은 스승의 학문을 계승하여 섭산에 머물렀고, 승전을 계승한 법랑(法朗)은 흥황사(興皇寺)에 있었으므로 승랑의 삼론학 학통을 섭령흥황(攝嶺興皇)이라 부른다.
이렇게 계승된 그의 삼론학은 후일 법랑의 제자인 길장 때에 와서 독립된 새 종파인 삼론종(三論宗)으로 성립하게 되었다. 이를 삼론종에서 칠대상승(七代相承)이라 한다. 7사(師)의 맥은 구마라습→승조→법도→승랑→승전→법랑→길장으로 이어지며, 이 7인의 정통파 가운데 승랑이 중추적인 구실을 하였다. 길장은 그의 저술인 『대승현론(大乘玄論)』 · 『이제의(二諦義)』 등에서 승랑을 항시 인용하면서 섭령대사 · 섭산대사 · 대랑법사(大朗法師) · 낭대사(朗大師)라고 추앙하였다.
승랑은 우리나라 승려 중 중국에서 불교를 가르친 최초의 인물이었으며, 중국 불교계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반야사상은 이제합명중도설(二諦合明中道說)이다. 이제합명중도설은 승랑이 제창한 독특한 인식방법으로서, 불교의 궁극적인 진리인 중도를 밝히는 방법으로 이제(二諦)를 합명하는 방법을 쓴 것이다. 이제란 세제(世諦)와 진제(眞諦)의 둘을 의미한다. 모든 부처님은 항상 이제에 의하여 설법하였으므로 이제를 밝히면 모든 경을 해득하게 된다고 주장하고 이제를 3종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비이(非二) · 비불이(非不二)를 제일의제(第一義諦)로 하는 것이 이제합명중도의 요점이다. 그러나 승랑은 귀국한 흔적이 없고 중국에서만 활동하였기 때문에 고구려의 반야사상 연구에 얼마만큼 공헌을 하였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승랑 외에도 고구려에서 반야사상에 깊이 관심을 가졌던 승려는 혜관(慧灌) · 도등(道登) · 혜량(惠亮) · 의연(義淵) 등이 있다. 혜관은 625년(영류왕 8)에 일본에 건너가서 삼론을 널리 전하고 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되었으며, 도등은 628년 당나라에 가서 길장에게 삼론을 배운 뒤 일본으로 건너가 공종(空宗)을 세웠다. 또한, 551년(진흥왕 12)에 신라로 귀화한 혜량이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에 의한 백고좌강회(百高座講會)를 베풀었다고 한 것을 보아 혜량이 반야사상에 깊은 조예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의연도 576년(평원왕 18) 중국으로 가서 『지도론(智度論)』 ·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 등에 관하여 자세한 것을 배우고 귀국한 반야계의 학승이며, 이 밖에도 중국에서 활약한 고구려의 삼론학자에는 실법사(實法師) · 인법사(印法師) 등의 이름이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이 고구려의 승려들은 국내외에 걸쳐 삼론학을 중심으로 한 반야사상의 연구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반야계통은 고구려 불교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 사상을 파악할 만한 문헌들은 현재 전래되지 않고 있다.
한국인의 반야사상계통의 경전에 대한 찬술문헌은 현재 총 41종이 있다고 전해지지만, 그 중 34종이라는 대부분의 분량이 신라인이 찬술한 문헌들이다. 반야사상계통 신라인 찬술문헌 중 현존하는 것은 원측(圓測)의 『반야바라밀다심경찬』 · 『인왕반야경소』, 원효(元曉)의 『대혜도경종요』 등 3권뿐이다. 신라의 반야사상은 일단 이 3권을 통해서 고찰할 수밖에 없다.
원측은 원래 현장(玄奘)의 밑에서 수학한 중국승 규기(窺基)의 자은학파(慈恩學派)와 함께 필적을 이루는 서명학파(西明學派)의 개조로서, 유식학(唯識學)의 대종장으로 추앙받고 있는 고승이다. 그러나 원측은 포괄적인 입장에서 『반야경』의 뜻은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 가르친 뜻과 다름이 없다고 보고, 『반야바라밀다심경찬』뿐만 아니라 『인왕반야경소』까지 찬술하여 국가의 영원한 번영의 길을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로써 천명하였다. 이는 자은학파에서 『반야경』을 업신여기고 지나친 편파성을 보인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반야바라밀다심경찬』은 원측이 해박한 학식과 능통한 범어(梵語)로써 정확하게 논술하였기 때문에 그 뒤 『반야심경』 해석의 기본 자료가 되고 있다. 그는 『반야심경』을 ① 반야교(般若敎)가 일어나는 인연을 말하고, ② 경의 종체(宗體)를 논하였으며, ③ 경의 제목을 설명한 뒤, ④ 경의 문구를 해석하였다. 그는 반야사상의 본성이 절묘하여 무의 경지에 있는 것이지만, 물이 맑으면 달빛이 비치는 것과 같이, 사물에 응하고 기(機)에 따라서 얼마든지 반야의 진리에 접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해석을 보였다.
또한, 『인왕반야경소』에서는 이 경의 요지가 반야로써 국토를 수호하는 기본을 삼아야 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국가를 융성하게 하려면 반드시 반야불지(般若佛智)를 이해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함으로써 이상적인 국가의 건설을 위한 활국(活國)의 진리를 논술하였다.
원효의 『대혜도경종요』는 반야사상의 핵심을 요약한 것으로, 그 대의는 반야의 진공(眞空)을 아는 것이 묘유(妙有)의 일면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반야에 문자반야(文字般若) · 관조반야(觀照般若) · 실상반야(實相般若) 등 셋을 열거하면서도, 문자반야를 극복하여야 실상반야나 관조반야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어 두려움이 없는 자유의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특히 그가 실상반야를 여래장설(如來藏說)로 해석한 것은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 또한, 교판(敎判)에서는 경전사상(經典史上)에서 반야사상의 위치를 정하는데 오시교(五時敎) 중의 무상교(無相敎)라는 설과 삼시교(三時敎) 중의 공교(空敎)라는 설은 모두가 잘못된 것이라고 논파하고, 반야사상은 무쟁처(無諍處)에 해당하기 때문에 화엄(華嚴) 등의 사상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획기적인 해석을 내렸다. 그러나 원효는 반야사상만을 중요시하지 않았으므로 반야계통의 인물이라고 볼 수는 없다.
원측과 원효가 그러하듯이, 반야계의 저술을 남긴 신라승 경흥(憬興) · 의적(義寂) · 둔륜(遁倫) · 태현(太賢) 등이 모두 유식 등 불교의 여러 사상들을 함께 섭렵하고 있기 때문에, 신라에는 반야사상만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파나 종파가 성립되지 않았음이 틀림없다. 또한, 신라에 널리 유통되고 있었던 반야계 경전으로는 『반야심경』 · 『인왕반야경』 · 『백론』 · 『대반야경』 · 『금강경』 · 『중론』 · 『십이문론』 · 『반야이취분경』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야사상이 신라에 미친 중요한 영향 중의 하나는 인왕백고좌도량(仁王百高座道場)이다. 인왕도량이 처음으로 개설된 것은 613년(진평왕 35)으로 고구려승 혜량이 귀화한 직후이다. 이 백고좌법회는 구마라습이 번역한 『불설인왕반야바라밀경(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 2권을 소의경전으로 하여 이루어진다. 내란과 외침을 방어, 제거하고 국가를 안태하게 하기 위한 법회로서, 100개의 불상과 100개의 보살상, 100개의 사자좌(獅子座)를 마련하고 100명의 법사를 초청하여 『인왕반야경』을 강독하는 도량의식이다. 신라에서 개설된 인왕백고좌도량이 정기적으로 혹은 연차적으로 열렸는지 부정기적으로 열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도합 10회에 걸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 법회는 신라 민중과 내면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왕이나 귀족들을 위한 강설법회의 형식을 띤 것이었고, 국가안위를 위한 일종의 호국의식 행사였으며, 국왕이 반야의 지혜에 의하여 정치를 하게끔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신라의 인왕백고좌도량은 구마라습 번역의 『불설인왕반야바라밀경』에 근거를 두고 있었으므로, 고려 불교에서 성행하였던 밀교적 인왕도량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순수 반야사상에 입각한 호국의식이었다.
고려의 반야사상은 신라에 비하여 거의 명맥을 밝힐 수 없는 상태이며, 반야사상을 천명한 고승도 거의 보이지 않고 있다. 이는 고려의 불교교학이 화엄종과 법상종(法相宗), 천태사상(天台思想)을 중심으로 발전함에 따라 반야사상은 자연 도태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고려 중기 조계산 수선사(修禪社)의 개산조인 지눌(智訥)이 사람들에게 권하여 지송(持誦)하게 할 때에 반드시 『금강경』으로 입법(立法)하게 함으로써 『금강경』을 중심으로 한 반야사상이 다시 흥행되었다.
지눌의 뜻을 이은 혜심(慧諶)은 『금강경찬(金剛經贊)』 1권을 지었다. 그것은 낙산사(洛山寺)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조선선교사(朝鮮禪敎史)』에 일부가 게재되어 있다. 이 『금강경찬』에는 야보송[冶父頌]을 실었고, 그 찬문에 대하여 일일이 영험담을 실어 『금강경』의 신봉과 유통을 꾀하였다. 또한, 혜심은 그의 문집을 통해서도 금강경에 “일체의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위 없는 깨달음이 모두 이 경에서 나온다.”는 구절에 대하여 “그렇다면 이 경은 어디로부터 나온 것인가?” 하는 등의 의문을 제기해서 이 경을 선(禪)에 입각하여 의문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선문(禪門)에서 『금강경』을 중심으로 반야사상이 다소 관심의 대상이 되기는 하였으나 교종에서는 크게 연구되지 않았다. 다만, 고려 말 자은종(慈恩宗)의 고승 미수(彌授)가, 충선왕이 원나라 연도(燕都)에 있으면서 『대반야경』을 항상 염하다가 「신난해품 信難解品」에 대한 해석을 청함에 따라 저술하였다는 『대반야경난신해품기(大般若經難信解品記)』가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조선시대의 반야사상은 『금강경』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392년에서 1910년까지 간행 및 역간된 『금강경』 관계 문헌은 약 50여 종에 이른다. 그러나 조선시대 승려의 반야사상계 찬술문헌은 기화(己和)의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 혜정(慧定)의 『금강경소찬요조현록(金剛經疏纂要助顯錄)』 1권, 유일(有一)의 『금강경하목(金剛經蝦目)』 1권, 의첨(義沾)의 『금강경사기(金剛經私記)』 1권, 긍선(亘璇)의 『금강경팔해경(金剛經八解鏡)』 1권 등 5종이 있다.
이 중 『오가해설의』는 기화의 불교사상을 여러 가지로 반영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그의 현실적 반야관이다. 오가해는 『금강경』에 대한 종밀(宗密)의 찬요(纂要), 부대사(傅大士)의 찬(贊), 혜능의 구결(口訣), 야보[冶父]의 송(頌), 종경(宗鏡)의 제강(提綱)을 모아 한 책으로 만든 것인데, 기화가 설의(說誼)를 붙이고 있는 것은 『금강경』 본문과 야보의 송, 종경의 제강에 대해서뿐이다.
이는 기화가 야보나 종경의 선적(禪的)이고 시적(詩的)인 반야관에 깊은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며, 그의 반야관이 매우 현실적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한 면이기도 하다. 이 기화의 저술은 그 뒤 자주 간행되었는데 현재 알려진 것만도 10종이나 된다. 이 『오가해설의』는 우리 나라 사찰 강원(講院)에서 사교과(四敎科)의 교재로 편정(編定)되었는데,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중기의 설제(雪霽) 때에 이르러서 확정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또한, 18세기 후반의 주석서로는 유일의 것 등 2종이 있는데, 의첨은 동화사(桐華寺)와 용연사(龍淵寺) 등에서 강설하였으므로 영남지방의 강원에서는 대개 의첨의 『금강경사기』를 따랐고, 유일은 전라도지방에서 강석을 베풀었기 때문에 호남지방에서는 유일의 『금강경팔해경』에 준하여 『금강경』을 공부하였다. 고려의 지눌, 조선의 기화 이후 『금강경』은 우리 나라 반야사상의 중심이 되었고, 오늘날까지 『금강경』 중시의 풍조를 낳았다. 그리고 금자사경(金字寫經) · 석경(石經) 등으로 굳건한 신심을 드러내는 한편, 금강경변상(金剛經變相) 및 금강경탑(金剛經塔) 등을 만들어서 일반 서민신도의 포교나 사후의 천도 등에 사용되는 주경(呪經)의 구실도 하였다.
현재 우리 나라의 반야사상은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반야심경』은 사원 및 일반 신도의 법회의식에서 항상 염송되고 있으며, 『금강경』은 대한불교조계종의 소의경전일 뿐만 아니라 불교단체 126개소의 소의경전이 되고 있다. 또한 1945년에서 1974년까지 간행된 『금강경』만도 무려 42종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금강경』과 『반야심경』이 중심이 되고 있는 현재의 반야사상연구는 더 확대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즉, 신라시대와 같은 다양한 반야계 경전연구를 비롯, 불교의 여러 다른 사상과 교류를 꾀하면서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