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력은 자력과 대비해 붓다나 보살이 세운 원력(願力)을 가리킨다. 불보살의 구제의 원력에 의지하여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수행을 타력문(他力門)이라고 한다. 불교에서 타력 사상은 초기 불교에서 좋은 벗이나 스승을 의미하는 선지식을 말하였다. 붓다와의 만남과 그 가르침을 듣는 행위까지는 초기 불교의 타력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스스로 수행하는 전통도 전해지지만 불보살의 타력에 의지하는 신앙 활동도 현저하다. 입시철에 자녀의 대학 합격을 위해 불보살에게 기도를 하는 것도 타력의 한 형태이다.
타자 즉 불보살의 원력을 의미하는 타력은 자신의 힘을 의미하는 자력(自力)에 대비되는 용어이다. 자신의 힘으로 깨달음의 이상을 추구하는 수행을 자력문(自力門), 불보살의 구제(救濟)의 원력에 의지하여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수행을 타력문(他力門)이라고 한다.
초기불교에는 깨달음을 얻는 2가지 방법으로 수신행(隨信行)과 수법행(隨法行)이 있다. 수신행은 믿음을 따르는 수행이며, 수법행은 스스로 지혜를 갖추는 수행이다. 대승불교 중 수신행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 정토사상과 법화사상이라고 할 수 있고, 수법행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 반야사상, 화엄사상, 선불교이다. 대승불교는 붓다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타력문의 속성을 가지고 있으나 상대적으로 자력문을 좀 더 강조하고 있는 것이 반야사상, 화엄사상, 선불교 등이라고 볼 수 있다.
대승불교의 정토사상을 대표하는 정토삼부경 가운데 『무량수경』에는 아미타불이 전생의 법장(法藏) 보살이었을 때 세운 48가지 소원을 성취해야 자신은 붓다가 되겠다는 본원(本願)사상이 있다. 48가지 소원 가운데 18번째 소원이 중생이 자신의 명호를 부르면 정토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소원〔十念往生願〕이다. 이 소원의 힘에 의해 아미타불을 소리 내어 염불하는 사람은 정토에 태어난다는 것이 정토사상의 타력문이다. “만일 내가 붓다가 될 때 시방의 중생들이 지극한 마음으로 믿고 좋아하여〔信樂〕 나의 국토에 태어나고자 하여 10념(念)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태어나지 못한다면, 나는 차라리 정각을 이루지 않겠나이다. 다만 5역죄(逆罪)와 정법을 비방하는 것은 제외합니다.”(대정장, T12, p. 268상)
이러한 타력문을 용수(龍樹, 나가르쥬나, 150~250)는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 「이행품(易行品)」에서 자력문으로서의 성도문(聖道門)과 대비해서 말했다. 용수는 믿음의 방법의 쉬운 수행〔信方便易行〕으로 보살의 물러남이 없는 상태〔阿惟越致, 不退轉〕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불법 가운데 헤아릴 수 없는 문이 있다. 마치 세간의 길에 어려운 길이 있고 쉬운 길이 있듯이 육지에서 걸어가면 고통이 따르고, 물에서 배를 타면 즐거움이 따르듯이 보살의 길도 이와 같다. 어떤 이는 자기 스스로 부지런히 수행 정진하고, 어떤 이는 믿음의 방법의 쉬운 수행으로 속히 물러남이 없는 상태에 이르는 사람도 있다.”(대정장, T26, p.41중)
원효는 아미타불의 본원을 중시하고 그 본원의 힘에 의지하여 중생이 정토 왕생할 수 있다는 기본적인 입장을 밝히고 있다. 또 그러한 본원을 이어받기 위해서 중생이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하는가라는 방법적인 면에 있어서 ‘십념(十念)’이라는 염불수행법에 대한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생명을 걸고 매달리는 것과 같은 절실한 마음에서의 십념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정토왕생에 있어서 타력뿐만 아니라 자력적인 면도 간과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휴정은 『선가귀감』에서 “자력과 타력이 있으니, 한쪽은 더디고 한쪽은 빠르다. 바다를 건너고자 하는 자가 나무를 심어 자란 뒤에 배를 만든다면 더딜 것이니 이는 자력을 비유한 것이다. 배를 빌려 타고 바다를 건넌다면 빠를 것이니 이는 불력을 비유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휴정도 자력보다는 불력이라는 타력을 의지하는 것이 더 쉬운 길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강조하고 있다.
불교에서 타력 사상은 초기불교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초기불교에서는 좋은 벗이나 스승을 의미하는 선지식(善知識)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상윳따 니까야』 「절반경」에서는 좋은 벗을 만나는 것은 성스러운 도를 거의 다 이룬 것과 같다고 붓다가 말하면서, 붓다의 제자들이 붓다를 만나 그 가르침을 받은 것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붓다와의 만남과 그 가르침을 듣는 행위까지는 초기불교의 타력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으며, 가르침을 듣고 스스로 실천하여 깨달음에 들어가는 것은 자력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붓다 당시에는 붓다에 대한 믿음 또는 붓다의 깨달음에 대한 믿음이 확립되는 것만으로 첫 번째 성자인 수다원이 되는 길도 있었다. 믿음에 의해 마음속에 잘못된 견해가 없어졌기에 성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붓다에 의존한 깨달음으로 타력에 의해 깨달음에 도달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여기에는 붓다에 대한 제자의 믿음이 있으면 된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붓다의 큰 자비심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으니 붓다의 현존과 붓다의 깨달음을 확신하는 자세는 제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믿음에 근거한 수다원의 성취자를 '믿음을 따르는 자〔수신행〕'라고 하였고, 믿음보다는 가르침을 듣고 자신의 노력과 수행에 의해 수다원의 깨달음을 얻는 자를 '법을 따르는 자〔수법행〕'이라고 한다. 따라서 수신행은 타력문이라 할 수 있고, 수법행은 자력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길은 결국 믿음과 지혜가 함께 갖추어지는 수다원이라는 성자에서 통합되기 때문에 수신행의 믿음은 결국 지혜를 동반하게 되고, 수법행의 지혜는 믿음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타력은 자력과 대비되는 개념이지만, 불교에서는 자력과 타력이 배타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초기불교에서는 붓다의 깨달음에 대한 믿음이 타력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고, 이 믿음에 근거해 스스로 노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자력이 요구되는 점이 중요하다. 이는 대승불교의 정토사상에서 보이는 타력사상에서도 스스로 염불을 해야 하는 자력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자력과 타력의 상보적 관계가 확인된다.
동아시아의 대승불교에서는 스스로 수행하는 전통도 전해지고 있지만 불보살의 타력에 의지하는 신앙 활동이 현저하다. 입시철이 되면 절이나 기도처에서 자녀의 대학 합격을 위해 불보살에게 의지하는 기도를 하는 것도 타력의 한 형태이다. 타력은 현대 대승불교에서도 중요한 개념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