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사상은 부처의 본원력에 의지하여 정토의 실현을 추구하는 불교교리이다. 정토란 괴로움으로 가득찬 세상인 예토의 반대 개념으로 아미타불의 서방 정토가 대표적이다. 정토는 청정한 불국토로 즐거움으로 충만한 극락세계이다. 본원력이란 불·보살이 이타적 자비심으로 세운 서원의 힘이다. 정토사상은 이 힘에 의지해 정토에 왕생하여 불퇴전의 경지에 도달함을 목적으로 하는 사상으로, 자력신앙이 아닌 타력신앙의 토대가 된다. 우리나라는 신라의 원광에 의해서 들어왔으며 이후 원효 등 여러 고승들의 노력으로 더 깊은 의미와 체계가 갖춰진 신앙으로 이어져 왔다.
이 신앙은 선종(禪宗)과 같은 자력신앙(自力信仰)과 비교하여 타력신앙(他力信仰)이라고 부른다. 정토란 예토(穢土: 속세, 괴로움으로 가득찬 세상)의 반대 개념으로, 가장 대표적인 정토는 극락이다. 정토사상을 설하고 있는 불경은 약 650여 부의 대승경전 중 200여 부나 되는 것으로 보아, 정토사상이 대승불교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정토관계 경전 중에서도 『아미타경』 1권, 『무량수경(無量壽經)』 2권,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1권은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이라 하여 정토사상의 근본 소의(所依)경전이 되고 있다.
이러한 정토경전을 바탕으로 용수(龍樹)의 저술인 『대지도론(大智度論)』의 왕생품(往生品)과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의 석원품(釋願品) · 이행품(易行品)에서 정토왕생과 정토십상(淨土十相)이 설명된다.
이어 무착(無着)의 『섭대승론(攝大乘論)』과 세친(世親)의 『무량수경우바제사원생게(無量壽經優婆提舍願生偈)』에 이르러 논리적 기초를 다졌다. 『무량수경우바제사원생게』에는 29종장엄정토(二十九種莊嚴淨土)를 논하고, 정토왕생의 정인(正因)으로 5염문(五念門:禮拜 · 讚歎 · 作願 · 觀察 · 廻向)의 수행방법을 설하였다.
이러한 인도의 정토사상은 중국의 담란(曇鸞) · 혜원(慧遠) · 도작(道綽) · 선도(善導) 등에 의하여 더욱 발전되어 정토종(淨土宗)으로까지 성립되었다. 그리고 신라의 원효(元曉) · 경흥(憬興) · 현일(玄一) · 의적(義寂) · 태현(太賢) · 신방(神昉) 등에 의하여 우리 나라의 정토사상이 전개되었다.
정토사상은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해 정토에 왕생하여 불퇴전(不退轉)의 경지에 도달함을 목적으로 하므로, “법(法)에 의지하고 자신에 의지하라.”는 불교의 일반적 사상과는 다른 점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정토사상은 힌두이즘의 유신론 사상의 영향을 입었다고도 하며, 초기의 원시경전에는 생천사상(生天思想)이었으나 대승경전에 이르러서 정토왕생으로 전개된 것이다.
정토사상의 발생 동기를 정토관계 문헌을 통해 살필 때, 강력하게 대두되는 극한상황적 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 정토삼부경의 하나인 『무량수경』에는 원시경전 또는 『반야경』 · 『법화경』을 비롯한 대승경전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 사회의 괴로움[五苦 · 五病 · 五燒]이 묘사되고 있다.
또, 『관무량수경』에도 아사세(阿闍世)라는 불효막심한 아들로 말미암아 처참한 상황에 처한 빈비사라왕의 왕비 위데희(韋提希)를 설법의 대상으로 등장시키고 있다.
경전에서뿐만 아니라 정토사상가들에서도 이러한 극한상황적 의식은 잘 나타나고 있다. 용수는 정토교(淨土敎)를 하열법(下劣法:깨우침의 능력이 낮은 이를 위한 교리)을 좋아하는 범부를 위한 이행도(易行道:쉽게 행할 수 있는 수행)로 이해하였다.
중국의 도작은 정토교에서의 극한상황을 말법시대(末法時代)로 파악하고 이러한 시대에 적합한 법은 오직 정토교뿐이라고 단정하였다. 선도도 『관무량수경』의 심심(深心)에 대하여 자신이 죄악범부(罪惡凡夫)임을 깊이 믿는 것이라고 주석하고 있다.
즉, 정토사상은 극한상황에 처하여 자신의 힘으로 깨달음을 실현할 수 없는 나약하고 죄장(罪障)이 두꺼운 범부를 의식하고 출발한 대승불교의 독특한 결실이다.
정토사상의 중심 과제는 정토와 왕생에 있다. 정토란 부정잡예(不淨雜穢)가 사라진 청정한 불국토(佛國土)로, 즐거움만이 충만된 극락세계를 가리킨다. 경전에는 아미타불의 서방정토 외에도 여러 가지 정토가 설해지고 있다. 미륵보살의 도솔천정토(兜率天淨土), 약사여래의 유리광정토(瑠璃光淨土) 등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승한 것은 미타의 서방정토라고 찬탄하였다.
『무량수경』이나 『관무량수경』 등에 설해진 미타정토의 장엄상(莊嚴相)은 땅이나 수목 등이 모두 황금이나 칠보(七寶)로 되었고, 깨달음을 얻으려는 보살(菩薩) · 성문(聲聞) 등이 성황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장엄상을 용수는 10상(相), 무착은 18원정(園淨), 세친은 3엄(嚴) 29종(種)으로 정리하였다.
이는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수도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 환경임을 설명한 것으로 모든 중생은 불타(佛陀)와 같은 일체지(一切智)를 얻어야 한다고 하는데 우리들의 환경과 생활이 여의치 못하다는 것이다. 서방정토는 황금이나 칠보로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되지 않는 것이 없는 곳으로, 모든 유혹과 번뇌가 끊어진 곳이다.
아미타불은 무량한 수명과 광명(光明)을 가진 부처라는 뜻으로, 정토에 태어난 사람들은 무량한 수명과 광명의 공덕 속에 있게 되며, 부처와 같은 깨달음을 얻는 데 어렵지 않고, 불퇴전지(不退轉地:뒤로 물러서지 않는 깨달음의 자리)의 경지에 이르러 보처(補處)가 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정토사상은 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왕생은 예토에서 정토로 가서 태어난다는 뜻으로 정토왕생은 인간의 죽음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죽음 이후의 일도 제시됨과 동시에 방위(方位)를 논한다. 서방정토를 비롯한 여러 정토는 사바(娑婆)인 예토를 중심으로 방위가 표시되는데, 이를 정토사상에서는 지방입상(指方立相)이라고 한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반야사상에서 볼 때, 지방입상적인 정토설은 용납되지 않는다. 반야개공(般若皆空) · 일체불가득(一切不可得)의 견지에서 볼 때, 정토장엄이나 사후왕생과 같은 사상은 표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므로 정토사상가들은 반야사상과 정토사상의 이러한 모순을 화해하려는 여러 가지 시도를 행하였다.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정토를 수행자의 마음에 나타나는 해탈의 세계로 보려는 것이다.
용수에 의하면, 정토는 부정잡악이 사라진 중도실천(中道實踐)의 묘과(妙果)이며, 무착과 세친에 의하면 불(佛)의 3신(三身) 중 수용신(受用身, 報身)이 머무는 보토(報土)이다. 예토와 정토를 마음 하나로 보는 선가(禪家)의 유심정토사상(唯心淨土思想)은 이러한 정토관을 궁극까지 밀고 간 것이다. 이러한 정토사상에 의하면 정토와 예토는 공간적으로 동일한 위치를 갖게 되며, 오직 주관적인 심식(心識)의 차이일 뿐이다.
따라서, 정토의 모습도 공(空)과 가(假)가 상즉(相卽)하는 원리로 이해하게 됨은 물론이고, 담란이 주장한 바와 같이, ‘불왕(不往)도 왕(往)이요 불생(不生)도 생(生)’이 된다. 심지어는 정토장엄은 마음의 해탈계(解脫界)를 상징적으로 또는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정토관은 정토사상과 반야사상과의 갈등을 해소하여 정토사상을 선양하고자 하는 데 그 뜻이 있다. 그러나 정토를 단지 유심적(唯心的)으로만 이해하려는 태도는, 정토사상이 본래 자신의 힘만으로는 해탈을 실현할 수 없는 극한상황에 처한 범부를 상대로 한 사상이라는 점에서 문제를 가져온다.
정토의 왕생을 목적으로 하는 정토사상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하고 있다. 원시불교에는 업설(業說)에 입각한 생천설(生天說)로 인간보다 상위인 천상(天上)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10선업(善業)을 닦는다. 정토왕생은 원시불교의 이러한 생천설에 기원을 둔 것이기는 하지만, 그 방법에서는 부처의 본원력에 의할 것을 강조한다.
본원이란 부처의 발심(發心) 때 세우는 서원(誓願)을 가리킨다. 그러한 서원 속에는 자신의 깨달음을 실현하겠다는 자리적(自利的)인 것과 함께 남에게도 깨달음을 얻게 하자는 이타적(利他的)인 서원이 동시에 세워진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타적 서원이 자리적 서원보다도 우위를 차지한다. 지장보살은 지옥중생을 다 제도하기 전에는 성불하지 않겠다고 하였으며, 아미타불은 부처의 깨달음이 극한상황에 처한 중생이라도 제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취하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본원력이란 바로 이러한 불보살의 이타구제적인 원력(願力)에 의한다는 뜻으로 이러한 부처의 본원력이 사상적으로 주의를 끌게 되면서 정토관계 경전에는 부처의 본원 수가 점점 불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아촉불국경(阿閦佛國經)』에는 20원, 『평득각경(平得覺經)』에는 24원, 『무량수경』에는 48원으로 나타났다. 발전의 최고 단계에 있는 『무량수경』의 원에 의하면, 죄악 범부를 어떻게라도 구제하려는 원심(願心)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48원 중에서도 제18원은 모든 정토사상가들의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 내용은 “시방중생(十方衆生)이 지심(至心)으로 신락(信樂)하여 내 나라에 태어나고자 하면 오직 10념(念)만 하되, 만일 태어나지 않는다면 나는 정각(正覺)을 이루지 않겠다.”는 것이다. 정토사상가들은 이와 같은 내용의 제18원을 미타본원(彌陀本願) 성취의 참 정신이라고 중요시하였다.
이는 곧 정토사상의 목적이 정토왕생에 있고, 극한상황에 처한 범부에게 가장 알맞은 길은 이 제18원의 내용이며, 특히 임종과 같은 극한상황이라 하더라도 10념 정도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량수경』에서는 제18원에 “5역(逆:다섯 가지의 큰 죄악)과 방법(謗法:법을 비방함)을 범한 자는 제외한다.”는 조건이 있지만, 『관무량수경』에는 5역죄가 허용되고 10념도 ‘나무불(南無佛)’을 열번만 외우는 10성(聲)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정토왕생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 큰 죄를 범했거나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 하더라도 ‘나무아미타불’을 열 번만 생각[念]하든가 소리내어 외우면 가능해지는데, 그것은 자력(自力)으로가 아니라 미타의 본원력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신라시대는 한국 정토사상의 전성기였다. 7, 8세기경 정토사상을 논한 사상가들은 대개 자장(慈藏) · 원측(圓測) · 원효 · 의상(義湘) · 경흥 · 의적 · 도증(道證) · 태현 · 법위(法位) · 현일 · 도륜(道倫) 등으로, 우리 나라 정토사상의 중요한 저술을 남겼다.
이 시대는 중국에서도 법상(法常) · 도작 · 가재(迦才) · 혜정(慧淨) · 선도 · 용흥(龍興) · 혜일(慧日) · 법조(法照) 등이 배출되어 중국 정토사상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우리 나라의 정토사상과 중국의 정토사상이 다른 점은 중국의 정토사상은 『관무량수경』을 중심으로 발달하였으나, 우리 나라는 『무량수경』을 중심으로 하였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서로 다른 경전을 중심으로 발전한 이유는 명확히 밝힐 수 없으나, 신라의 정토사상에는 두 계통의 흐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수나라 정영사(淨影寺)혜원 계통인 지론계(地論系)와 당나라 현장(玄奘) · 규기(窺基) 등의 유식계(唯識系)로 대별할 수 있다. 신라에 처음으로 정토사상을 도입한 사람은 분명하지 않지만, 원광(圓光)으로 추측하고 있다. 원광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장안(長安)의 담천(曇遷) 문하에서 『섭대승론』을 배웠고, 당시 담천 문하에는 혜원도 함께 청강하였다.
혜원은 『무량수경소(無量壽經疏)』 2권, 『관무량수경소(觀無量壽經疏)』 2권을 저술하였으며, 담천 문하에서 『섭대승론』을 배울 때는 67세의 만년이었으므로, 정영사 혜원의 정토사상은 신라 출신인 원광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또, 자장의 『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 1권, 『아미타경의기(阿彌陀經義記)』 1권은 신라 최초의 정토사상을 논한 저술이며, 원효의 정토사상은 중국 혜원의 사상과 동일한 계통임을 나타내고 있다. 원효와 입당구법(入唐求法)의 뜻을 함께했던 의상의 16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의적은 『무량수경술의기(無量壽經述義記)』 3권, 『관무량수경강요(觀無量壽經綱要)』 1권 등을 저술하였다.
이 역시 혜원의 정토사상을 중심으로 도작과 선도의 정토사상을 도입하고 있다. 법위와 현일도 혜원의 정토사상을 수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법위는 『무량수경의소(無量壽經義疏)』 2권을 지었고, 법위의 저술에 의하여 현일이 『무량수경소(無量壽經疏)』 2권을 지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들의 사상은 도작과 선도의 사상과는 관계가 없음도 알 수 있다.
한편, 현장과 규기의 유식계 정토사상에 속하는 사상가로는 원측 · 경흥 · 도륜 · 태현 등을 들 수 있다. 원측은 현장의 문인으로 『무량수경소』 3권을 비롯하여 다수의 유식에 관한 저술이 있으며, 그의 제자 도증 문하에는 태현이 있다.
태현은 『무량수경고적기(無量壽經古迹記)』 3권, 『아미타경고적기(阿彌陀經古迹記)』 1권, 『칭찬정토경고적기(稱讚淨土經古迹記)』 1권, 『정토총료간(淨土總料簡)』 1권 등을 비롯하여 많은 저서를 지었지만, 현존하지 않으므로 그 논지를 확실히 알 수는 없다.
경흥은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국사(國師)가 되었으며, 『무량수경연의술문찬(無量壽經連義述文贊)』 3권과 『아미타경기(阿彌陀經記)』 1권 등 40여 부의 저술을 남겼다. 그의 『무량수경연의술문찬』에서는 혜원 · 법위 · 원효의 학설을 논파하고 의적의 설을 비판하고 있으므로, 역시 현장 · 규기계 정토사상가였다고 볼 수 있다. 도륜의 저술인 『아미타경소』 1권도 현존하지는 않지만, 규기의 유식계 정토사상을 주장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신라의 정토사상은 정영사 혜원계와 현장 · 규기의 유식계로 대별되고 있으며, 당나라의 도작 · 선도의 정토사상을 수용하고 있는 사람은 오직 의적뿐이다. 그러나 신라의 이러한 정토사상 관계 문헌들은 대부분 일실되어 그 사상 내용을 분명히 말하기는 어려우나 현존 자료에 의해 그들의 사상을 살핀다면, 불과 법위 · 원효 · 현일 · 의적 · 경흥을 들 수 있을 뿐이다.
법위의 전력(傳歷)은 분명하지 않다. 현일이 그의 사상에 입각하여 『무량수경』을 주석하였고, 경흥이 『무량수경연의술문찬』의 일부분에서 그의 사상을 논파하고 있으며, 원효의 정토사상이 법위보다 한 걸음 발전되어 있다는 점에서 원효와 동시대의 선배가 아닌가 추측될 뿐이다.
그가 저술한 『무량수경의소』 2권은 이미 나라(奈良)시대에 일본에 전해졌으며, 헤이안(平安) · 가마쿠라(鎌倉) 시대에는 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여 일본의 『안양집(安養集)』을 비롯한 정토관계의 각종 저술에 많이 인용되고 있다.
이들 인용문에 의한 법위의 정토사상은 혜원의 『무량수경소』에 의하여 『무량수경』을 주석한 것으로, 48원 · 제18원 · 10념 · 별시의(別時意) · 3배왕생(三輩往生) 등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견해가 나타난다.
48원을 섭법신(攝法身) · 섭정토(攝淨土) · 섭중생(攝衆生)의 3원으로 분류한 것은 정영사 혜원의 논지에 의한 것이지만, 그는 이를 다시 13종으로 분류해서 그 중에서도 제18 · 19 · 20원의 3원을 더욱 중시하여, 제18원을 상삼품인(上三品人), 제19원을 중상품인(中三品人), 제20원을 하삼품인(下三品人)의 서원으로 하였다. 이와 같이 3원을 중요하게 취급하는 사상은 후세 신라 정토사상에서뿐만 아니라 일본의 정토사상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법위는 48원 하나하나에 원명(願名)을 붙였는데, 이 같은 원명 호칭은 법위 이전의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그가 최초로 시도하였다. 이후 신라 정토사상과 일본 정토교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또, 48원문의 10념에 대하여 10법 10념이라고 해석하고, 이 10법10념을 1념이라도 결해서는 안 되며, 정토왕생을 위해서는 반드시 10법10념을 구족할 것을 필수조건으로 삼았다. 이러한 사상은 중국의 도작 · 선도 등의 정토사상과 그 내용을 달리하는 것으로, 정영사 혜원도 주의하지 않은 법위의 독자적인 견해이다.
10법10념이란 ① 일체중생을 언제나 자심(慈心)을 일으키게 하고, ② 일체중생에 대하여 깊은 자심을 일으키고, ③ 호법심(護法心)을 일으켜 신명(身命)을 다하고, ④ 인욕(忍辱)을 하면서 결정심(決定心)을 내고, ⑤ 마음을 청정하게 하며 이익에 물들지 않고, ⑥ 모든 착한 마음을 일으키고, ⑦ 일체중생에게 존중심을 일으키고, ⑧ 세속된 이야기에 매력을 느끼지 말고, ⑨ 깨달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갖가지 선근인연(善根因緣:착한 마음으로 빚은 인연)을 일으켜 산란한 마음을 멀리하고, ⑩ 바른 생각으로 부처님을 관(觀)하여 모든 감각작용을 쉬라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제18원문에 “오직 5역죄와 정법을 비방하는 것은 제외한다(唯除五逆誹謗正法).”고 하였으므로, 상삼품인을 위한 본원을 밝힌 것이라고 해석한 결과이다. 그렇다면 『관무량수경』 하하품(下下品)에 설한 5역의 죄인이라도 임종시에 열 번만 소리내어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면[十聲稱佛]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될 것인가?
이것은 제20원에 의하여 왕생되는 것으로 제18원에 의한 것은 아니라고 하고, 『관무량수경』 하하품의 10성칭불을 1법10념이라고 하고 제18원의 10념을 10법10념이라고 하여 둘을 구별하였다.
또한, 별시의 문제에 대해서, 1념의 칭명(稱名)은 별시의이지만 10념을 만족하면 이는 별시의가 아니고 순차왕생(順次往生)된다고 하였다. 3배왕생에 대해서는 상배(上輩)를 상삼품으로 제18원에 배대(配對)하고, 중배(中輩)를 중삼품으로 제19원에, 하배(下輩)를 하삼품으로 제20원에 배대하여 10법10념을 상삼품의 왕생이라고 하며 중요한 의의를 두고 있다. 『관무량수경』 하하품의 10성칭불은 1법10념이므로 별시의라고 주장하였다.
원효의 정토사상은 10념 중에 현료(顯了)와 은밀(隱密)의 두 가지 뜻이 있다고 보았다. 10념을 은밀의 10념이라 하고 『관무량수경』 하하품에 설한 칭명의 10념을 현료의 10념이라고 보았으니, 『무량수경』의 제18원의 10념을 현료 · 은밀의 두 가지 뜻[二義]을가진 것으로 파악하였다.
현료의 10념은 범부가 내는 것으로 실보토(實報土)에 왕생하려면 별시의가 되지만, 은밀의 10념은 성인이 내는 것으로 실보토의 인(因)이 되는 것이므로 별시의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무량수경』 제18원의 10념과 『관무량수경』 하하품에 설한 칭명의 10념을 구별하였다. 정토에 대해서도 법위는 변화토(變化土)와 수용토(受用土)로 나누어 해석하고 있으나, 원효는 법성토(法性土) · 실보토 · 수용토 · 변화토 등 4토로 나누어 해석하였다. 그리고 지엄(智儼)의 『화엄공목장왕생의(華嚴孔目章往生義)』의 사상을 수용하여 인(因)과 과(果), 일향(一向)과 불일향(不一向), 순(純)과 잡(雜), 정정(正定)과 비정정(非正定)의 4종상대(四種相對)로 정토를 해석하고 있다.
이 중 인과 과는 법성 · 실보토에 해당하고, 일향과 불일향, 순과 잡은 수용토에 해당하며, 정정과 비정정의 상대는 변화토에 해당하는 것으로, 『무량수경』의 정토는 변화토이나 법성과 실보토에도 통하는 것으로 보았다. 구품왕생(九品往生)의 계위(階位)에서도 보살 · 이승(二乘) · 범부 각각에 상중하의 차별이 있다고 보았다.
정토왕생의 정인(正因)으로는 보리심(菩提心)을 들고, 10념은 조인(助因)이라고 하였다. 보리심 정인설은 일찍이 중국의 담란 이래 많은 정토사상가들이 다 같이 주장한 것이지만, 조인이란 『무량수경』의 3배, 『관무량수경』의 16관, 『왕생론』의 5염문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들 행(行) 중에 원효는 10념에 중점을 두고 은밀과 현료의 두 가지 뜻을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원효의 정토사상은 법위의 설보다는 상세히 정토를 관찰하고 있음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원효는 염불이란 관불(觀佛)과 칭념(稱念)을 아울러 갖춘 칭관염불(稱觀念佛)이어야 하고, 어디까지나 순정심(淳淨心)을 가져야 한다고 염불의 특징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근기가 낮은 범부들인 부정종성(不定種性)은 수사발심(隨事發心)을 해야 하지만, 근기가 수승한 보살종성(菩薩種性)은 순리발심(順理發心)을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원효의 정토사상이 당시 일반에게 얼마나 유통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겸위성인설(兼位聖人說)을 주창한 그의 사상은 골품(骨品)으로써 엄격히 구성된 신라사회의 일반 서민에게는 하나의 정신적 양식이 되었을 것이다.
의적도 법위처럼 48원의 하나하나에 원명을 붙였으며, 특히 48원과 『왕생론』에서 설한 29종의 정토장엄(淨土莊嚴)을 대비하여 제1원에서 제32원까지를 국토장엄(國土莊嚴)으로 보고, 제33원에서 제40원까지를 불장엄(佛莊嚴)으로, 제41원에서 제48원까지를 보살장엄(菩薩莊嚴)으로 배당하였다. 48원 중에서도 제18 · 19 · 20원의 3원을 중요시함은 물론, 그 중에서도 특히 제18원을 중요시하였다.
제18원의 10념과 『관무량수경』 하하품에 설한 칭명의 10념을 같이 취급하였다. 이 두 가지의 10념을 다 같이 칭명의 10념이라고 한 것은 법위나 원효의 주장과는 그 입장을 달리하는 것이며, 오히려 당나라 선도의 사상에 접근한 것이다. 그러나 선도의 사상과 다른 것은 칭명의 10념 중에는 제18원의 10념을 구족했다고 주장한 점이다.
별시의의 문제에 대해서도 『섭대승론』의 별시의는 오직 원(願)에 의해서 수용토에 태어난다고 하였으며, 『무량수경』이나 『관무량수경』의 삼배구품왕생(三輩九品往生)은 원과 행이 상응하고 있지만, 태어난 정토는 수용토가 아니라 변화토이므로 별시의는 아니라고 하였다. 이 또한 법위나 원효와는 그 주장을 달리한 것이며, 오히려 당나라의 도작 · 선도의 설과 비슷한 점이 많다.
미타정토는 수용토와 변화토를 겸한 것이라고 함으로써 원효의 설과 입장을 같이했으나, 선도가 주장한 유보비화(唯報非化)의 입장과는 달랐다. 삼배왕생에서 상배의 위(位)는 10해(十解) 이상이고, 행은 10신위(十信位)의 중위(中位)이며, 중배는 10신 미성취(未成就), 하배는 10신위 중 최초 발심으로 보므로 대체로 혜원의 설을 따르고 있다.
특히, 선도의 『왕생예찬(往生禮讚)』에 대한 사상적 영향으로 아미타불의 큰 서원(誓願)을 통한 광명서원(光明誓願)으로 시방의 중생을 섭화하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아미타불을 전념(專念)하면 모두가 부처님의 원력에 의하여 왕생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러 염불상속(念佛相續)하면 염불을 한 만큼 부처님의 원력에 상응하게 된다고 하여 본원의 염불, 구칭의 염불을 강조하였다.
경흥은 그의 『무량수경연의술문찬』에서 혜원이나 법위 · 원효의 학설을 비판하고, 의적의 『무량수경술의기』의 설들도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 정토사상가들과는 달리 유식계 정토사상을 고취한 것이다.
그는 48원을 구불신원(求佛身願) · 구불토원(求佛土願) · 이익중생원(利益衆生願) 등 셋으로 분류하고, 그 중 제18원을 섭상품의 원, 제19원을 섭중품의 원, 그리고 제20원을 섭하품의 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법위와 현일의 학설과 유사한 주장이며, 의적의 학설인 제18원을 하품, 제19원을 상품, 제20원을 중품으로 한 것을 논파하였다. 또, 제18원문의 10념의 문제에서도 법위의 10법10념을 반대하여, 제18원의 10념도 『관무량수경』의 10념과 다 같이 10성칭불을 의미하는 것으로, 중생들이 발원하여 염불하면 원과 행이 구족하여 화토(化土)에 왕생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관무량수경』의 아미타불은 타수용신(他受用身)으로, 『무량수경』의 극락을 화토라고 본 것처럼 『무량수경』의 3배와 『관무량수경』의 구품과는 개합(開合)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밝혔다.
삼국통일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란과 사회적 불안은 신라에 미타정토사상을 전개시키는 한 요인이 되었다. 통일 이전의 사상과 신앙은 통일을 목표로 한 흥국위민의 이념적 경향이 있다면, 통일 이후에는 사회안정을 위해서도 정토왕생을 목표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정토사상은 당시 서민 대중의 불안을 달래 주고 이상세계인 정토를 동경하게 하였다.
왕생은 발원과 10념만으로도 가능하다는 사상이므로 높은 학문과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누구라도 마음만 먹는다면 정토왕생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사자(死者)의 왕생, 타력의 왕생사상이 대승불교의 대중화와 함께 자력왕생(自力往生), 현생생불설(現生生佛說)을 가져오게 되었다.
정토사상이 극한상황과 위기의식을 극복하는 것 발생적 요인을 생각할 때, 신라의 정토사상은 당시의 사회 여건과 함께 발전된 사상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정토사상은 곧 정토신앙과 직결된다. 정토사상은 엄밀한 의미에서 학문적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 불교신앙의 실천적 한 방법이다.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은 사상적 전개는 정토사상이 전문가적 입장에서 논의된 것이므로 일반 대중의 신앙은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신라의 정토사상이 어떠한 신앙형태로 나타났는가가 주목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의 정토신앙을 알 수 있는 자료는 극히 제한된 것이므로 전모를 알기에는 대단히 미흡한 상태이지만, 다행히도 『삼국유사』에 신라의 정토신앙을 살필 수 있는 상당한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① 광덕(廣德)과 엄장(嚴莊)의 서왕(西往)에서, 아내를 가진 광덕은 밤마다 단정히 정좌(正坐)하여 아미타불을 염(念)하고 16관행을 닦아 정토에 왕생하였고, 엄장은 광덕처럼 생활 속에서의 수행이 어려워 원효를 찾아가 그의 가르침에 의하여 관법을 닦아 왕생하였다. 이는 정토신앙이 이미 문무왕때 생활 속에서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② 인용사(仁容寺)의 미타도량(彌陀道場)을 통해서는 사자(死者)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신앙형태를 살필 수 있다.
③ 백월산(白月山)의 미타현신성불(彌陀現身成佛)에서는 수행자 자신이 아미타여래로 성불하였다. 이는 서방정토왕생이 아니고 신라 국토에서 아미타불로 현신(現身) 성불한 것이다. 이야말로 미타신앙의 신라적 특징이며, 신라 불국토사상과도 깊은 관계를 가진 설화이다.
④ 포천산(布川山) 5비구(比丘)의 서왕에는 함께 염불하던 다섯 비구가 동시에 왕생하였는데, 연대(蓮臺)에 앉아 공중에서 설법을 하고 몸을 버리고 진신(眞身)만 왕생하였다고 한다. 이는 출가한 승려가 단체로 정토신앙을 수행했음을 보여주는 기사이다.
⑤ 욱면비(郁面婢)의 염불서승(念佛西昇)에서는 염불하던 한 비녀(婢女)가 몸을 버리고 대광명을 놓으면서 서왕하였다. 이는 사문의 왕생이 아닌, 천한 종의 왕생이라는 점에서 정토신앙의 또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다.
또, 이 기사에는 선사(善士:불교신도) 수십 명이 서방왕생을 원구하여 미타사라는 절을 세우고 만일염불계(萬日念佛契)를 맺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 또한 승려가 아닌 신도가 왕생을 위하여 절을 세우고 염불결사를 조직한 것이므로 정토신앙이 일반 대중에 널리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는 한 예가 된다. 더구나 만일회나 염불계는 조선 후기까지도 성행했던 염불조직이었다.
이러한 것 외에도 죽은 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미타상(彌陀像)을 조성하였고, 염불사(念佛師)의 염불소리가 서라벌의 성안에 들리지 않은 곳이 없었다는 기사들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설화들이 주는 의미를 통하여 신라의 정토신앙은 사원이나 승려만의 전유물이 아닌 대중 신앙으로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도들이 모여 염불을 목적으로 사원을 건립하고, 염불단체를 구성하였으며, 만일(萬日)이라는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한 것이나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하여 감산사(甘山寺)의 미타불상을 조성한 것 등은 모두 대중 속에 있어 온 정토신앙의 단면이다. 뿐만 아니라 광덕은 신을 삼았고, 장엄은 농사를 지었으며, 달달박박(怛怛朴朴)은 산업(産業)에 종사하였고, 욱면비는 곡식을 찧었다.
이렇게 생업에 종사하면서 염불을 하였다는 것은 정토신앙이 대중 속에 깊은 뿌리를 내렸고, 일반 대중에게 널리 보급되었음을 뜻한다. 그리고 이들이 모두 왕생을 성취함으로써, 반드시 출가비구가 아니더라도 미타신앙 성취가 가능함을 보여준 것이다.
염불사의 염불소리가 성 안에 울려 퍼졌다는 기사도 어떤 의미에서는 성내의 모든 사람들이 소리내어 염불을 한 것이 아닌가 하고 추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의 정토신앙은 대중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린 대중 신앙이다.
고려의 불교는 신라시대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계속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이는 태조의 적극적인 숭불정책에 힘입은 것이다. 정토사상의 독립된 연구나 정토종의 성립은 이룩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정토사상은 의천에 의해 개창된 천태종이나 지눌에 의해 부흥한 선종과 밀교(密敎)에 의하여 전개되었다.
천태종계의 정토사상가로는 백련사(白蓮社)를 중심으로 한 요세(了世) · 천인(天因) · 천책(天頙) · 운묵(雲默)을 들 수 있으며, 선종계로는 지눌과 보우(普愚) · 혜근(惠勤)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또, 밀교적 입장에서 정토사상을 수용한 원참(元旵)을 들 수 있다.
이들 고려의 정토사상가들은 신라의 정토사상가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정토삼부경에 대한 전문적인 논의를 전개하지는 않았고, 다만 각기 종파의 입장에서 수용하거나 원용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정토사상의 본지(本旨)인 하근(下根:깨달을 수 있는 능력, 즉 근기가 낮음)의 범부를 구제하려는 철저한 태도에는 변함이 없다. 먼저 선종계(禪宗系)의 정토사상을 살펴보면, 고려 선종의 대표적 인물인 지눌이 있다.
그는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에서 “정도(正道)가 쇠약해진 말법(末法)시대에는 정혜(定慧)를 닦기 어려우므로 미타를 염(念)하여 정업(淨業)을 닦음만 같지 못하다.”는 견해에 신랄한 비판을 가하였다.
법의 흥쇠(興衰)를 논하는 것은 삼승권학(三乘權學)의 견해요 지혜 있는 사람의 것이 아니며, 예토와 정토를 구별하고 상법(像法)과 말법을 구별하는 것은 모두 불요의경(不了義經:부처님의 교설을 제대로 알지 못함)이라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므로 지눌의 정토사상은 선의 입장에 선 유심정토관(唯心淨土觀)을 주장하였다.
수행자들이 염불하여 왕생만 하면 그만이지 무엇이 필요한가하고 말하지만, 9품연대(九品蓮臺)에 오르고 내림이 모두 자기 마음의 크고 작고 밝고 어두움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마음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부처의 뜻을 아는 자는 왕생을 위하여 염불하지만, 불국토의 장엄이 진여(眞如)를 떠나지 않은 것이며, 마음의 산란과 혼침을 여읜 선정과 지혜의 성품에서 나타난다고 보았으므로, 정토의 왕생은 오직 이 마음에 의한 것으로 보았다.
여기에서, 자력신앙인 선종의 특징과 타력신앙인 정토신앙은 심각한 갈등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눌은 유심정토관을 주장하여 선정일여(禪淨一如:선수행과 정토신앙이 다르지 않음)를 꾀하였이다. 또한, 지눌은 『염불요문(念佛要門)』에서 10악(惡)과 8사(邪)를 끊지 않고 5계(戒) 10선(善) 등을 닦지 않으면서 서방정토에 왕생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10종염불을 닦을 것을 권하고 있다.
10종염불이란 ① 계신염불(戒身念佛), ② 계구염불(戒口念佛), ③ 계의염불(戒意念佛), ④ 동억염불(動憶念佛), ⑤ 정억염불(靜憶念佛), ⑥ 어지염불(語持念佛), ⑦ 묵지염불(默持念佛), ⑧ 관상염불(觀想念佛), ⑨ 무심염불(無心念佛), ⑩ 진여염불(眞如念佛)이다.
이 10종염불은 모두 일념진각(一念眞覺:한 생각에 참된 깨달음을 얻음)에서 나오는 것으로, 일념진각은 돈오(頓悟)요 10종염불은 점수(漸修)로 보아 선정일치(禪淨一致)의 염불을 주장하고 있으나, 결론적으로는 염불수행의 정토사상을 선사상(禪思想) 속으로 흡수한 것이다.
보우의 정토관은 그의 어록(語錄)을 통하여 약간 나타날 뿐 전문 저술은 없다. 그는 “사람의 본성인 큰 영각(靈覺)은 본래 생사가 없고 예나 지금이나 신령하고 밝으며, 깨끗하고 묘하며, 안락하고 자재(自在)한 것이므로 어찌 무량수불(無量壽佛)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며, ‘오직 마음이 정토요, 자성이 아미타불[唯心淨土 自性彌陀]’이라는 정토관을 보였다. 이러한 견해 위에 염불공안선(念佛公案禪), 즉 염불선(念佛禪)을 주장하였다.
이는, 자신이 아미타인데 다시 서방에 왕생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염불은 선 수행의 방편인 공안으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진실로 염불을 하려면 사위의(四威儀:行 · 住 · 坐 · 臥)에 자성미타를 생각하기를, 아미타불의 이름을 마음속과 눈앞에 두고 마음과 눈과 부처의 이름을 하나로 만들되, 마음에 계속되고, 생각에서 어둡지 않고, 때로는 생각하는 이것이 무엇인가고 자세히 돌이켜보아 오랫동안 계속하면 갑자기 생각이 끊어지고 아미타불의 참모습이 눈앞에 우뚝 나타날 것이니, 이때야말로 본래부터 움직이지 않는 부처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선사 특유의 정토관이며, 아미타불이나 정토를 선수행의 공안으로 끌어들여 염불공안선을 주장한 것이다. 혜근도 보우의 정토관과 비슷한 유심정토관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혜근은 보우에게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선수행의 공안으로까지 정토를 수용하지는 않았다.
오직 마음이 곧 아미타불이니 딴곳에서 구하지 말라고 했을 뿐이며, “서쪽을 향하여 염불하면 연화대의 상품이 저절로 열리리라.”라고 하여 하근기를 위한 타력신앙으로서의 정토교를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혜근의 작으로 알려진 「서왕가(西往歌)」는 곧 혜근의 정토에 대한 관심을 잘 설명하고 있다. 「서왕가」는 염불하는 사람과 염불하지 않는 사람의 과보(果報)가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주고 염불을 권한 노래이다. 비록 「서왕가」가 혜근의 작이 아니라 하더라도 혜근의 정토관은 선정겸수(禪淨兼修) 태도임을 알 수 있다.
선과 염불은 같은 불교의 수행방법이지만 몇 가지 특수성과 한계성이 있다. 그러나 고려의 선종계에서는 이러한 특수성을 개발하고 한계성을 극복하여, 염불선 · 염불공안선이라는 선정겸수 · 선정일여의 정토사상으로 발전시켰다고 볼 수 있다.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에 의해 개창된 고려의 천태종은 왕실 · 귀족의 절대적인 후원 아래 국청사(國淸寺)를 중심으로 눈부신 발전을 해왔다. 그 뒤 지눌에 의한 선종의 발전과 정혜결사의 영향을 받아 천태종계의 원묘국사(圓妙國師) 요세는 백련사를 결성하고 천태종 중흥의 사명을 다하였다.
이때 요세는 선종계인 지눌의 입장과는 달리 정토사상을 비판적 입장에서 선으로 흡수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긍정적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요세의 백련결사는 지눌의 정혜결사운동에서 문제되는 죄악중생(罪惡衆生)의 근기(根機)를 의식한 결사운동이다. 따라서 지눌의 선체계가 성적등지(惺寂等持) · 원돈신해(圓頓信解) · 경절오입(徑截悟入)의 3문(門)으로 조직된 것처럼, 요세는 천태지관(天台止觀) · 법화삼매참(法華三昧懺) · 정토구생(淨土求生)이라는 3문의 백련사 실천강요를 수립한 것이다. 이러한 요세의 정토구생은 죄악범부 중생을 정토문으로 섭수하려는 천태종계의 정토사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는 만덕사(萬德寺) 보현도량(普賢道場)에서 『법화삼매참의(法華三昧懺儀)』에 의하여 법화참을 닦을 때 정토왕생을 함께 구했으며, 그의 일과 속에는 아미타불의 명호를 1만 성(聲)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임종 때도 오로지 서방왕생을 구하였고, 원효의 「미타증성가(彌陀證性歌)」를 부른 다음 서쪽을 향하여 입적하였다.
이어 백련사 제2세가 된 천인은 그의 『만덕산백련사제이대정명국사후집(萬德山白蓮社第二代靜明國師後集)』에서 정토사상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은 『법화경』 28품을 품에 따라 찬송한 것이 주된 내용이지만, 이 찬송 앞에 「계수귀명문(稽首歸命文)」과 「미타찬(彌陀讚)」 1송이 있다. 「계수귀명문」은 본사(本師) 석가모니불과 『법화경』 속의 제 불보살에 귀명하고 자신의 업장(業障)을 인식하고 참회하면서 정토의 왕생을 미타의 본원력에 호소하고 있다.
이러한 정토신앙은 천인에게서 보는 바와 같은 범부의식에 의한 참회와 정토구생의 견해를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미타찬」에 의한 그의 정토사상은 “미타의 법성신(法性身)은 허공과 같아 걸림이 없고, 이 법성신에 의하여 32상을 나타내니, 서방을 떠나지 않고 사계(沙界:사바세계)에 두루한다.
그러므로 신심(身心)을 떠나지 않는 것이니, 마음 밖에서 구함은 심히 전도(轉倒)된 것이다.”라고 하여 미타를 법성신으로 보는 입장을 취하였다.
요세의 입적에 이르러 천인은 “마음이 곧 정토인데 어디로 가시렵니까?”라고 물음으로써 약심관불(約心觀佛)의 정토사상을 주장한 셈이다.
백련사 제4세인 진정국사(眞淨國師)천책은 그의 「근송미타경원문 勤誦彌陀經願文」에서 정토와 예토를 비교하여 정토의 수승함을 논하고, 예토를 버리고 정토에 가고자 하는 자는 미타교관(彌陀敎觀)을 궁구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유심정토설과 타력정토설을 겸한 것으로, 요세와 천인의 약심관불적 정토관과 비슷하다.
백련사계의 운묵은 『석가여래행적송(釋迦如來行跡頌)』 2권을 저술하였다. 그 내용은 석가의 일대기를 노래하고 필요한 부분에 산문으로 주(註)를 삽입한 것이나, 여기 본송(本頌)과는 깊은 관계가 없는 듯이 보이는 권계(勸戒) 부분이 있다. 그는 여기서 선(禪)에 대한 비판과 귀족불교에 대한 반발과 정토 찬양을 설하였다.
“말법시대를 당하여 정토를 구하지 않고 무엇을 하겠는가. 사람들이 흔히 이 법문에 의심하고 비방하여 정토를 구하는 사람을 웃고 말리지만, 이것은 자타를 함께 오도(誤導)하는 것이니 슬프고 슬픈 일이다.”라고 하면서 백련사 초기 요세의 정토 찬양을 재흥하고자 하였다. 운묵은 같은 백련사계통인 의선(義璇)의 귀족불교를 비판하였다.
“마음과 교(敎)는 둘일 수 없으니 교외별전(敎外別傳)은 도대체 어떤 마음이란 말인가. 만일, 세존의 염화시중(拈花示衆)을 일러 별전(別傳)이라고 한다면 이것 또한 교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며…….”라고 한 것은 선가(禪家)의 맹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는 시흥산(始興山)에 암자를 짓고, 20년 동안 『법화경』을 외우고 아미타불을 염하며 불화(佛畫)를 그리고 경을 서사(書寫)했다고 하니, 백련결사를 개창한 요세가 아미타불 1만 성을 일과로 한 것과 상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고려의 천태종계에서는 정토사상의 서민불교적 종교성으로 귀족불교로의 전환에 반기를 들기도 하였으며, 백련결사의 실천 방향으로까지 수용하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고려의 정토사상은 독립된 종파로의 성립은 없었으나, 천태종과 선종 등을 그들의 처지에 맞는 범위에서 소화하고 흡수하였다. 이는 정토사상이 지니고 있는 범부의식과 극한상황에 대한 극복이라는 어쩔 수 없는 종교성을 장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의 정토사상은 기화(己和)와 보우(普雨)를 통하여 파악할 수 있다. 기화는 배불(排佛)에 대한 불교의 바른 이해를 위하여 『현정론(顯正論)』 1권을 찬술하였으며 『원각경소(圓覺經疏)』 등 많은 저술을 남긴 조선 초의 학승이다. 그는 임종에 이르러 서방극락을 염원했으나, 신심별체(身心別體)에 입각한 심상신멸(心常身滅)의 견해를 가지고 있으므로 순일(純一)한 선지(禪旨)의 입장에 있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 정토사상 역시 마음은 영원하지만 몸은 멸하는 것이라는 영혼설에 의한 서방정토를 설하였다. 물론, 당시 불교계는 선과 정토를 큰 거부감 없이 함께 받아들이는 일반적 경향이 있었다. 이는 ‘마음이 곧 정토요 자신의 성품이 곧 아미타불’이라는 사상적 견지에서였다. 이러한 흐름은 조선시대 기화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그는 뚜렷한 선사상의 입장에서 정토를 수용하는 태도가 아니라, 선교관과 정토가 양립하는 다소간의 모순된 두 사상을 동시에 수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선정양립(禪淨兩立)은 조선 초기의 일반적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보우는 불유융합(佛儒融合)의 일정론(一正論)을 주장한 사상가로, 배불숭유의 국가정책에 대하여 불교 부흥에 노력한 나머지 요승(妖僧)이라는 누명을 쓰고 끝내는 귀양지에서 장살(杖殺)을 당하였다.
그는 선종판사(禪宗判事)를 지낸 선승이지만 사상면에서 일관된 선사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권념요록(勸念要錄)』을 통하여 아미타불을 염(念)할 것을 권하고 있으며, 또한 선지를 논하면서도 결국은 정토를 주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에 한 권의 경이 있는데 모양과 이름이 없다. 이 경이 무슨 경이냐.”고 묻고는 결국 극락으로 인도할 것을 설하였다[共濟冥遊 以導樂國]. 뿐만 아니라 기복과 밀교적 관법도 설하고 있어 사상의 다양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조선 전기의 정토사상은 특징을 찾기 어려우나 관심도에서는 다양성을 나타내고 있다. 선사상에서도 발전적인 모습은 볼 수 없으며, 오직 여러 가지의 잡다한 사상이 혼잡되고 거기에 유교의 사상까지 가미되어 사상적 침체성을 면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조선 중기 이후의 정토사상은 휴정(休靜)을 분기점으로 삼을 수 있다. 휴정은 꺼져 가는 불교를 중흥한 조선시대의 대표적 인물이다. 보우가 정책적인 면에서 불교 중흥에 노력했다면, 휴정은 정책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불교학의 중흥에도 큰 공헌을 한 대표적인 불교사상가이다. 그는 쇠퇴한 선법을 바로잡고, 선에 기초를 두고 정토사상을 조명하였다. 따라서, 고려의 지눌 · 보우 등의 사상이 다시 휴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는 선과 교가 둘이 아니라는 지눌의 사상을 수긍하면서, 정토는 오직 마음에 있다는 유심정토설을 펼쳤다. 그러므로 염불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 송불(誦佛)에 그쳐서는 안 되며, 반드시 마음과 입[心口]이 부합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염불에는 구송(口誦) · 사상(思像) · 관상(觀相) · 실상(實相)의 네 종류가 있는데, 근기에 맞추어 적절히 수행해야 하며, 정토는 서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마음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염불이 곧 참선이며, 참선이 곧 염불이라는 염불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마음과 입이 일치된 염불은 서방정토에 왕생한다고 하여, 근기가 낮은 범부를 위한 타방정토설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와 같은 휴정의 정토사상은 조선 후기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성총(性聰)과 도안(道安), 응윤(應允)과 각안(覺岸) 등을 통하여 전승되었다. 그러므로 이들의 사상적 경향도 휴정의 정토사상적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