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담 ()

불교
인물
고려 태조의 왕사를 지낸 선승.
이칭
시호
진공(眞空)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869년(경문왕 9)
사망 연도
940년(태조 23)
출생지
경상북도 경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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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충담은 고려 태조의 왕사를 지낸 선승이다. 신라 말기 무주에서 활동하다가 입당구법(入唐求法)하여 귀국한 승려로, 고려 개국 후 개경으로 이동하여 태조의 공경을 받았다. 그는 고려시대 왕사로 임명된 첫 사례이며 이후 왕명으로 원주 흥법사에서 주석하다가 입적하였다. 태조가 직접 그의 비문을 찬술하였다.

정의
고려 태조의 왕사를 지낸 선승.
가계 및 인적사항

속성(俗姓)주3은 김씨로 주1의 관족(官族)이라고 하나 선대가 낙향한 듯하다. 어려서 양친을 여의고 880년에 부친과 친분이 있던 무주 장순선사(長純禪師)에게 출가하였다. 당시 무주에는 가지산문, 동리산문, 사자산문 등의 선종이 번창하고 있었다. 무주 영신사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송계선원의 심희를 찾아가 수학하였다. 심희는 후에 신라왕이 국사로 높이는 고승이다.

주요 활동

892년(진성여왕 6) 경에 견훤이 무주를 점령하자 전란을 피하였다가 890년대 27세를 전후한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하였다.

918년에 귀국하여 봉림사에 있던 심희를 찾았고 그곳에 머물다가 920년 견훤의 김해 침입을 피해 개경으로 이동하였다. 당시는 고려가 개국한 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고려 태조는 921년에 충담을 왕사로 임명하였는데 이는 고려 초기 국사 혹은 왕사로 임명된 최초의 사례이다. 이후 태조는 원주 흥법사(興法寺)를 중수하고 그곳에 충담을 주2 하였다. 충담은 940년(태조 23)에 그곳에서 입적하였다. 시호는 진공(眞空)이고 고려 태조가 직접 비문을 지어 당나라 태종의 글씨를 모아 새긴 고진공대사비(故眞空大師碑)를 세웠다. 충담은 봉림사를 떠난 승려였지만, 비에는 그가 봉림산문의 심희를 이은 주4이라는 사실이 강조되어 있다. 심희가 입적한 뒤 봉림산문은 경질선사에게 계승되었으나, 충담과 그의 문하가 고려 왕실의 후원을 받아 부각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다만 현재 전하는 비는 전체적으로 결손이 많아 자세한 행적을 파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참고문헌

원전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조선총독부, 1919)

논문

정동락, 「忠湛(869~940)의 생애와 활동」(신라사학회, 2010)
주석
주1

‘신라’의 다른 이름. 숲속에서 이상한 닭 울음소리가 들리기에 가 보니, 나뭇가지에 금빛의 궤가 걸려 있고 그 아래에서 흰 닭이 울었는데 그 궤 속에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가 되는 김알지가 있었다는 설화에서 유래한다. 우리말샘

주2

선종에서, 승려가 입산하여 안주하다. 우리말샘

주3

승려가 되기 전의 성. 우리말샘

주4

선종의 승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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