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2년(진성여왕 6) 경에 견훤이 무주를 점령하자 전란을 피하였다가 890년대 27세를 전후한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하였다.
918년에 귀국하여 봉림사에 있던 심희를 찾았고 그곳에 머물다가 920년 견훤의 김해 침입을 피해 개경으로 이동하였다. 당시는 고려가 개국한 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고려 태조는 921년에 충담을 왕사로 임명하였는데 이는 고려 초기 국사 혹은 왕사로 임명된 최초의 사례이다. 이후 태조는 원주 흥법사(興法寺)를 중수하고 그곳에 충담을 주2 하였다. 충담은 940년(태조 23)에 그곳에서 입적하였다. 시호는 진공(眞空)이고 고려 태조가 직접 비문을 지어 당나라 태종의 글씨를 모아 새긴 고진공대사비(故眞空大師碑)를 세웠다. 충담은 봉림사를 떠난 승려였지만, 비에는 그가 봉림산문의 심희를 이은 주4이라는 사실이 강조되어 있다. 심희가 입적한 뒤 봉림산문은 경질선사에게 계승되었으나, 충담과 그의 문하가 고려 왕실의 후원을 받아 부각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다만 현재 전하는 비는 전체적으로 결손이 많아 자세한 행적을 파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