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법사는 통일신라의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려 태조 왕건의 명으로 924년경에 크게 중창한 바 있다. 그 후 왕사였던 진공대사(眞空大師) 충담(忠湛, 869∽940)이 입적 시까지 머물렀는데 태조 왕건이 직접 찬술한 진공대사의 탑비가 남아 있다. 탑비에 기록된 당시의 사찰 명칭은 흥법선원(興法禪院)이었다. 현재 흥법사지 동남쪽 250m 지점에는 섬강이 흐르고 있다. 사지 진입부에는 축대를 쌓아 단을 만들었으며 이 축대 뒤편으로 넓은 평탄지가 펼쳐져 있다. 평탄지 중심부에는 삼층석탑이 세워져 있고 석탑 뒤편으로 진공대사탑비의 귀부와 이수가 있다. 탑비의 기록에 의하면 태조 왕건은 흥법선원을 중건한 뒤 충담을 주지로 임명하였다. 충담은 경명왕 때 신라의 국사에 책봉된 심희(審希, 835∽923)의 제자인데 890년대에 입당 유학하였고 918년 귀국한 후 태조 왕건으로부터 왕사에 봉해진 고승이다. 충담이 흥법사의 주지로 임명되어 부임한 시점은 대략 922∽924년경이다. 그는 부임 후 흥법사에 머물면서 친궁예 세력의 영향력이 여전히 잔존해 있었던 원주지역을 교화하는 데 노력하다가 940년 7월 입적하였다. 충담이 입적 직후 승탑이 바로 건립되었으며 탑비는 그다음 해인 941년에 조성되었다. 탑비는 태조 왕건이 직접 비문을 지었으며 당 태종의 글씨를 집자하여 비석에 새겼다. 태조의 재위 기간에 작성되거나 건립된 승려들의 비문과 탑비는 총 11건인데 이 중 유독 진공대사탑비만 태조가 직접 찬술하였다. 태조가 충담의 비문을 직접 찬술한 이유는 충담이 봉림사의 법맥을 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도 있지만 보다 본질적으로는 새로운 통일왕조 고려의 등장을 알리고자 하는 상징적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는 동시대의 다른 탑비와 다르게 역동적이며 강건하게 조성되었는데 이러한 미적 감각은 괴량감 넘치는 힘을 보여주는 논산 개태사 석조삼존불상의 상징성과 통한다. 두 작품 모두 새로운 왕조 출범의 충만한 기상과 활력 넘치는 자신감을 보여주고 있다.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은 후백제 유민들에게, 그리고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는 신라의 유민들에게 새로운 통일왕조 고려의 출범을 알리고자 하는 상징적 의미가 각각 내포되어 있다. 흥법사는 강원도와 경상도 일대의 사람들이 개경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충주를 거쳐 가지 않는 한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길목에 자리 잡은 사찰이다. 이러한 지정학적 특성으로 인해 흥법사는 고려 초기 국가적 관심 하에서 중창되었으며 태조 왕건이 직접 찬술한 탑비가 건립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