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화상(白雲和尙)이라고도 한다. 전라도 고부(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출생.
어려서 출가하여 일정한 스승 없이 전국 유명 사찰을 다니면서 수행하다가 구법(求法)을 위하여 중국으로 건너갔다. 10여 년 동안 중국에 머무르며 지공(指空)에게 법을 묻고, 석옥(石屋)에게서 임제종(臨濟宗)의 선법을 전해받은 뒤 귀국하였다. 1353년(공민왕 2) 석옥은 임종하면서 그에게 전법게(傳法偈)를 지어 제자 법안(法眼)에게 전할 것을 당부하였고, 법안은 이듬해 고려로 와서 이를 전하였다.
1367년 보우(普愚)의 천거로 공민왕의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였고, 1365년 나옹(懶翁)의 천거로 다시 공민왕의 부름을 받아 신광사(神光寺)의 주지가 되었다. 1368년 경기도에 왕비 노국공주(魯國公主)의 원당(願堂)으로 창건한 흥성사(興聖寺)의 주지가 되었다.
1369년 김포 포망산 고산암(孤山庵)에 은거했다가, 다시 나옹의 추천으로 1370년에 있었던 공부선(功夫選)의 시관직(試官職)을 맡았다. 그 뒤 여주 혜목산 취암사(鷲巖寺)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이르는 곳이 모두 돌아갈 길이요 만나는 곳이 모두 고향’이라는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그의 사상은 선과 교는 이름만 다를 뿐 평등한 한 몸이라는 선교일체(禪敎一體)를 주장하여, 고려 말 불교계에서 가장 포괄적인 불교관을 보였다. 또, 나옹 · 보우 등과 함께 임제선(臨濟禪)의 법맥을 이었으나 선풍(禪風)은 보우와 다른 바가 있었다. 같은 석옥의 제자이면서 보우는 간화선(看話禪)을 강조하였고, 그는 오히려 간화선을 넘어선 구경지적(究竟地的)인 공부를 중요시하였으며, 무심무념을 주창하였다.
화두(話頭)로써 제자들을 가르칠 때는 조주(趙州)의 ‘무(無)’ · ‘만법귀일(萬法歸一)’ ·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을 들도록 하였고, 이 화두를 크게 의심하면 반드시 크게 깨닫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가장 오묘한 하나의 방편은 무심무념이라고 하였다. 즉, 선은 무심일도(無心一道)여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화두를 버릴 것을 강조하였다.
저서로는 법문집인 『백운화상어록(白雲和尙語錄)』과 프랑스 파리에서 발견된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 2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