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벌의 역사는 형벌만이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다. 형법의 일부로 발전한 것이며, 더구나 공권력 내지 국가권력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 특히, 전근대사회의 형벌은 전체적 발전의 규정적 요소라고 말할 수 있다.
고대부족사회의 형벌제도에 관한 기록은 중국의 사서(史書)에 기록되어 있는데, 부족에 따라 조금씩 다르나 대체로 공통된 문화기반에 따른 공통점이 많다. 고조선의 8조법에 의하면, 살인죄인을 죽이는 생명형, 상해죄인을 곡물로 배상하게 하는 재산형, 절도죄인을 노비로 만드는 인격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부여는 형벌이 매우 준엄하였다. 살인죄인은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을 노비로 만드는 연좌적인 인격형을 병과(倂科)하였고, 절도죄인은 12배를 배상시켰으며, 처가 질투하면 사형에 처하였다.
고구려에도 사형과 연좌적인 인격형이 있었으며, 부여와 같이 절도죄인에게 12배를 배상하게 하였다. 그 밖에 옥저 · 예 · 삼한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형벌기록이 전하여오지 않으나, 대체로 엄준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구려는 373년(소수림왕 3)에 성문법전인 율(律)을 공포, 시행하였으므로 제도로서의 형벌이 정비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하지 않으므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중국의 사서와 『삼국사기』 등에 의하면, 사형으로서 기시(棄市) · 참형 · 화형 · 족형(族刑) · 찬형(竄刑) · 적몰형(籍沒刑) · 태형이 있었다.
모반과 반역죄는 화형을 가한 뒤에 참수하고 그 가산을 몰수하였으며, 성을 지키지 못하고 적에게 항복한 자, 전쟁에서 패배한 자, 일반 살인자, 강도는 사형을 과하였는데 참수의 방법에 의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절도자는 절취물의 12배를 배상하여야 하고, 가난하여 배상하지 못할 경우에는 자녀를 노비로 하여 배상하게 하였다. 그리고 남의 소나 말을 죽인 자는 노비로 삼았으며, 공사의 채무를 갚지 못하는 자도 노비로 삼았다.
신라는 고구려율을 이어받았으므로 고구려율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수 · 당 이전의 형벌 계통에 속한다.
사형으로는 범죄인의 친족까지도 연대처벌하는 족형, 수레에 머리와 사지를 묶어 몸을 찢어 죽이는 거열(車裂), 사지를 베어 죽이는 사지해(四支解), 시장 또는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처형하는 기시(棄尸), 묘에서 시체를 파내어 다시 참수하는 육시(戮屍), 참(斬) 등이 있었다. 그 밖에 일종의 명예로운 사형인 자진(自盡)이 있었다. 그러나 교형(絞刑)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유형(流刑)은 원래 수 · 당의 형벌로서 그 이전의 사변형(徙邊刑)이 지양된 것이며, 신라에서는 이 사변형에 해당하는, 즉 섬에 가두는 입도(入島) 또는 투기원도형(投棄遠島刑)이 있었다. 또한, 신체형으로서는 장형(杖刑)이 있었으며, 도형(徒刑)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따라서, 형벌에는 장 · 유 · 사의 3종이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백제의 형벌에 관한 기록은 중국사서나 『삼국사기』에도 매우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는데, 참형 · 유형 · 금고형 · 족형이 있었다.
반란 · 퇴군(退軍) · 살인자는 참형에 처하고, 관인으로서 뇌물을 받거나 절도한 자는 3배를 징수하고 종신토록 관직에 등용하지 않았다. 또한, 일반 절도범은 2배를 배상하고 유형에 처하며, 부인이 간통을 범하면 남편집의 종으로 삼았다.
고려는 당률(唐律)을 본받았으므로 형벌에 있어서도 당률에서 완성을 본 태(笞) · 장(杖) · 도(徒) · 유(流) · 사(死)의 오형제도가 확립되었으며, 삼국시대에 비하면 조직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① 태형: 오형 중에서 가장 가벼운 경범죄에 대한 형벌이다. 태 10에서 50까지 5등급이 있다. ② 장형: 태형보다는 중한 형벌로 역시 장 60에서 100까지 5등급이 있다. 태와 장은 초목(楚木) 또는 형목(荊木)으로 만든 형구이며, 가는 것이 태이고 굵은 것이 장이다. ③ 도형: 강제노역에 종사하는 형벌이며, 도 1년에서 3년까지 5등급의 형벌로 되어 있다.
④ 유형: 도형보다 무거운 형벌로 서정배 또는 귀양이라고도 한다. 먼 섬이나 벽지의 배소(配所:죄인을 유배할 곳)에 거주를 제한하는 형벌로서, 유 2,000리 · 유, 2,500리 · 유, 3,000리의 3종이 있었으며 속형(贖刑)이 허용되었다. ⑤ 사형: 오형 중에 가장 무거운 형벌이며, 생명을 끊는 생명형이다. 사형에는 교(絞)와 참(斬)의 두 종류가 있었으며, 참이 교형보다 더 무거운 형벌이었다. 교는 목을 죄어 질식시켜 죽이는 형벌이며, 참은 형칼이나 도끼로 목을 베어 죽이는 형벌이다.
① 절장법(節杖法): 『고려사』 형법지 명례항에 의하면 오형 중 태 · 장 · 도 · 유의 4형에 대하여서는 절장으로 형벌을 경감할 수 있게 제도화하고, 5형표에 난을 만들어 수속법과 같이 절장법을 표기하고 있다.
절장이란 4형을 모두 장형으로 환산하여 경감하는 것을 의미하며, 수율(隋律)이나 당률에는 없던 것이며, 송(宋) 법제에서 제도화한 것을 도입한 것이다. 예를 들면, 태 50은 절장하여 장 10이고, 장 100은 절장하면 장 20으로 경감되고, 도 1년은 장 13에, 유 2,000리는 장 17에 배역(配役) 1년을 병과하는 따위이다.
② 수속법(收贖法): 형벌의 중요도에 대응하여 소정의 재화의 납부로 실형의 집행에 갈음(같은 것으로 바꾸어 대신함)하여 형을 면제받는 것을 말한다. 5형표에 난을 만들어 수속금액을 표기하고 있다. 예를 들면, 태 10은 속동(贖銅) 1편이고, 장 60은 속동 6편, 도 1년은 속동 20편 따위로 사형에 이르기까지 수속액이 명기되어 있다.
③ 관당법(官當法): 『고려사』 형법지 직제항에 고려율이 일부 예시되어 있는데, ‘왕법장(枉法贓)’ 즉 법을 어겨서 장물을 취득하는 범죄에 대하여 장물 1척이면 장 100, 1필이면 도 1년……, 8필이면 유 3,000리, 15필이면 교와 같이 엄한 규정을 하고 있다.
다만, 범인이 유관품자(有官品者)인 경우에는 관당도 할 수 있고 수속도 할 수 있으며, 장물이 1필 이상일 때에는 제명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관당이란 도 · 유의 형벌에 갈음하여 관품을 삭탈하는 것이다. 형벌을 재화로 때우는 것이 수속이고, 형벌을 관품으로 때우는 것이 관당이다. 관당법은 당률에 있는 그대로 도입한 것이며, 관당과 수속을 관리의 범죄에 대하여만 적용한 것은 관료 우대에 목적을 둔 제도이기 때문이다.
오형 외의 각종 극형은 삼국시대 이래의 고대형벌을 계승한 것으로 다음과 같다. ① 기시: ‘기시우시(棄尸于市)’라 하여, 죄인의 시신을 토막내어 시장에 전시하여 예방효과를 거두고자 하는 형벌이다. 태조 1년에 반역죄에 기시한 이래 구모(毆母) · 불효 · 시부모(弑父母) 등에 기시형을 가한 예가 있다.
② 효수: 현수목상(懸首木上)이라고 하여, 참수하여 머리를 나무에 매달거나 높은 데 올려 놓아 일반에 공개 전시하는 형벌이며, 효시(梟市)라고도 한다. 의종 14년에 어머니를 죽인 자를 ‘참수효시 3일’이라고 하였고, 공민왕 12년에 모역한 석기(釋器)를 참하고 ‘전수우경효시(傳首于京梟市)’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며, 기타 효수의 예는 많다.
③ 거열: 시신의 사지를 수레에 묶어 찢어서 조각내어 공개하고 혹은 지방에 회람하는 극형이며, 『고려사』 형법지에 원악향리(元惡鄕吏)를 거열에 처하였다는 예가 보일 뿐이다.
④ 지해: 체해(體解)라고도 하며, 시신을 토막내어 전시하는 형벌이다. 공민왕이 간신 김횡(金鐄)을 ‘지해이순제도(支解以徇諸道)’라 하여 시신을 각 도에 돌려 전시하였고, 공양왕 2년에 김종연(金宗衍)을 지해에 처하고 각 도에 돌려가며 전시하였다는 예가 보인다.
이 형벌은 시신을 조각내어 전시하거나 각 도에 순시(徇示)하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능지(凌遲)나 다름없는 형벌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는 고려율을 제정하여 오형의 정형제를 채택하고, 한편으로 형의 면제나 경감의 길을 터놓고 한편으로 오형 외의 각종 부가형을 가하였다.
① 삽면형(鈒面刑): 경면형(黥面刑) 또는 자자형(刺字刑)이라고도 하며, 얼굴이나 팔꿈치에 자자(刺字: 얼굴이나 팔뚝의 살을 따고 흠을 내어 죄명을 찍어 넣는 일)하여 표적이 나게 하는 표징형이다. 『고려사』 형법지의 도적항 · 휼형항(恤刑項) 및 노비항에 각 일례가 보인다. 경면하여 유배하는 것을 특히 경배(黥配)라고 칭하였는데, 경배의 예가 『고려사』 세전과 열전에 각각 두 예가 보인다.
② 제명 · 수직첩(收職牒): 『고려사』 형법지 직제항에 왕법장죄를 규정한 조문의 말단에 왕법장물이 1필 이상이면 제명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제명이란 관직과 관품을 모두 박탈하고 서민(課役을 담당하는 양민)에 편입한다는 것이다.
같은 항의 관리임감자도조(官吏臨監自盜條)에 수직첩 귀향이라는 말이 있는데, 수직첩은 관품과 관직의 임명장인 고신(告身)을 환수한다는 것이므로 제명과 뜻이 같다. 비슷한 말로 몰관(沒官)이라는 말이 있으며, 몰관은 입관(入官)과 같은 말로 범장물(犯贓物)을 비롯하여 범금물(犯禁物)을 몰수한다는 별개의 술어이다.
③ 귀향: 귀향의 용어는 고려 전기에 빈번히 보였던 용어이다. 귀향의 형벌은 원칙적으로 관인에 대한 형벌이나 간혹 노비에게도 귀향의 형벌이 있었던 것으로 볼 때, 귀향을 고향에 돌려보내는 것이라는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
고려 초기의 사회구조는 군 · 현과는 별도로 각 지방에 향(鄕) · 소(所) · 부곡(部曲)과 진(津) · 역(驛) · 관(館) · 처(處) · 도(島)의 천민집단의 구역이 널리 산재하고 있었으며, 향 · 소 · 부곡의 백성은 전지(田地)의 분배를 받지 못하였다.
광산노동이나 사냥 · 제염(製鹽) · 도살업 · 옹기구이 · 대장장이 · 고리장이 등 장인으로 등록되면 대대손손 무거운 신공의 의무를 진 천인으로서 경중(京中)이나 지방의 노비보다도 더한층 떨어진 최하급 천민집단이었다.
그러므로 귀향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향 · 소 · 부곡의 향으로 추방되어 유주(留住)를 강제당하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귀향에 충향호(充鄕戶)를 병과하여 향호에 편입되면 더욱 가혹한 형벌이 아닐 수 없었다.
고려 후기에 접어들면서 점점 향 · 소 · 부곡의 인구도 늘고 농경생활의 제한도 완화되어 향 · 소 · 부곡민의 생활이 일반평민이나 다름없이 성장하였다. 그리고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에는 향 · 소 · 부곡이 군 · 현으로 승격되거나 혹은 군 · 현이 모반으로 강호(降號)되어 향이나 부곡으로 전락하였다.
따라서 군 · 현과 향 · 소 · 부곡의 차이가 점점 없어져 조선시대에 이르러 귀향의 형벌적인 원초적 의미를 상실하고 정배와 같은 뜻으로 변해 버렸다. 그 결과 향은 본향 또는 고향의 뜻으로만 이해하게 된 것이다.
④ 충상호(充常戶): 『고려사』 형법지 호혼항의 관사(官私) 노비가 양민의 자식을 유인하여 팔아넘긴 자를 처벌하는 규정에서, 범인이 남자인 경우에는 초범이면 귀향보내고, 재범인 경우에는 충상호에 처한다고 하였는데, 이 규정의 성질로 보아 귀향보다는 충상호가 한층 더 무거운 형벌임이 틀림없다.
같은 지의 휼형항을 보면, ‘승도범간 영충향호(僧徒犯奸永充鄕戶)’라는 규정이 있고, 간비항(奸非項)에는 ‘승간여색 충상호(僧奸女色充常戶)’라는 규정이 있는 것을 보면, 충상호와 충향호는 같은 뜻을 가진 용어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충상호라는 말은 충향호, 즉 천민집단의 구성호인 향호에 편입한다는 뜻이라고 해석된다. 즉, 신공의 무거운 의무를 지는 천민에의 전락을 의미한 것이다.
같은 지의 직제항에 승인(僧人)으로 사원의 미곡을 절도한 자를 처벌하는 규정에서 ‘귀향 충편호(歸鄕充編戶)’라고 하고 있다. 충편호도 충상호와 같은 뜻이며, 이 경우는 귀향에 더하여 충편호의 병과형을 의미한다.
⑤ 적몰가산(籍沒家産): 적몰가산의 준말을 적기가(籍其家)라고 하며, 918년(태조 1) 6월에 모반한 마군대장(馬軍大將) 이흔암(伊昕巖)을 ‘기시 적기가(棄市籍其家)’라고 하였다.
그리고 1269년(원종 10) 4월에는 평장사(平章事) 유경(柳璥)을 ‘유흑산도 적기가(流黑山島籍其家)’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 밖에도 적기가의 예가 많으며, 적기가의 형벌은 정형인 기시나 효수에 따른 부가형이었다.
조선시대는 중국의 명률(明律)을 계수하여 보통형법으로서 적용하였으므로 명률의 형벌이 일반적으로 시행되었으며, 조선 고유의 형법과 형벌이 우선적으로 시행되었다. 따라서, 명률의 형벌과 조선 고유의 형벌을 나누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명률의 형벌체계는 당 이래의 오형제도를 근간으로 하고 있으며, 오늘날의 형법총칙에 해당하는 명례율(名例律)에 오형지도(五刑之圖) · 오형명의(五刑名義) · 옥구지도(獄具之圖) 등을 규정하고, 태 · 장 · 도 · 유 · 사의 오형을 들고, 각각 금납에 의한 수속액(收贖額)을 명시하고 있다. 오형은 고려시대의 오형과 별로 다르지 않다.
명률은 정형으로 태 · 장 · 도 · 유 · 사의 오형제도를 채택하고 있으면서도, 실지 형벌을 운영함에 있어서는 오형 외의 형벌을 여러 가지로 추가하고 또는 각종 부가형(종형이라고도 함)을 첨가하여 사실상 율령상의 형벌보다 가중시키고 있다.
① 능지처사(凌遲處死): 좌참(剉斬) 또는 지해(支解)라고도 하며, 죄인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사지를 하나씩 베어내고 마지막에 목을 베어서 여섯 토막을 내어 죽이는 가장 잔인한 형벌이며, 명률의 반역죄를 비롯하여 도적 · 인명 · 투구 등 각 항에 그 예가 보인다.
조선시대에도 개국 초부터 능지형의 예가 많이 보인다. 능지는 시체를 토막내는 것으로 종결되는 것이지만, 시체토막을 기시하여 공개하거나 각 도에 회람시키거나 머리만을 매달고 효시하는 등 후속되는 부가형이 있어 시체에 대한 형벌을 가중시켰다.
② 천사(遷徙): 오형 가운데 유형은 본래 유 2,000리 · 유 2,500리 · 유 3,000리의 3종으로 그치는 것인데, 명률은 유 1,000리의 유형을 추가하고 천사형이라 칭하였으므로 유형이 4종이 된 셈이다. 천사형은 ‘천리향토천리지외(遷離鄕土千里之外)’ 하는 것이므로 유형의 실체와 다를 바가 없다. 명률의 호율 호역항 제9조에 천사형의 예가 보인다.
③ 변원충군(邊遠充軍): 대개 장형(杖刑)에 첨가되는 부가형이며, 장형을 집행한 뒤에 죄인은 변원지방으로 보내어 군인에 충당하고 군역에 종사하게 한 것이다. 군역을 천역이요 고역이라고 생각하여온 봉건사회제도하의 형벌이며, 무기한 군역에 종사한 것이다. 그러므로 군(軍)자를 붙인 직업은 오늘날까지도 천역을 의미하는 대명사로 사용된다.
④ 자자(刺字): 고려율의 경면형과 같으며, 재물에 관한 죄를 범한 자에게 장(杖) · 도(徒) 등의 정형에 따르는 부가형이며, 명률에 의하면 오른팔 위 또는 왼팔 위에 도관전(盜官錢) · 창탈(槍奪) · 절도 · 강도 · 강와(强窩) 등의 2자 또는 3자를 찍어 넣었다.
각 글자의 사방 총면적은 1촌 5푼, 각 획의 너비는 1푼 5리로 위로 팔꿈치를 지나지 못하며, 아래로 팔목을 지나지 못하였다. 자자는 명률, 형률, 도적항에 많이 보인다. 자자를 씻어 없앴을 때에는 장 60에 처하고 다시 자자하였다.
⑤ 파직(罷職) · 파역(罷役): 파직은 유품관인(有品官人)이 불법행위를 범하였을 때에 그 관직을 삭탈하는 부가형이고, 파역은 이원(吏員)의 관역, 즉 관인 아래에서 잡사를 맡아 관인을 돕는 이원의 직무를 박탈하는 것을 말한다. 파직이나 파역은 대개 변원충군이 수반되는 형벌로, 명률의 조문에 무수히 그 예를 볼 수 있다.
⑥ 이이(離異): 이이귀종(離異歸宗)이라 하여 남녀의 연을 끊고 혼인 전의 상태로 강제로 환원하는 것, 즉 강제이혼시키고 여자를 친정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말한다. 즉, 여자에 대한 일방적인 처벌이다. 명률 호율의 혼인항에 그 예가 많이 보인다.
⑦ 재산단부(財産斷付): 단부는 부여(付與) · 급부와 같은 말이며, 재산단부는 범죄인의 재산의 전부 또는 일부를 강제로 빼앗아 피해자 또는 피해자의 가족에게 급부하는 재산적인 급부형이다. 명률의 형률 인명항과 소송항에 그 예가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개국 이래 명률을 형법전으로 삼고 적용 또는 의용(속대전 이후)하면서도 명률 소정의 형벌에 만족하지 않고 명률의 형벌을 가중하거나 변용하고 혹은 명률 외의 형벌을 발굴하거나 창설하여 조선 특유의 각종 형벌이 발생, 소멸, 번성하였다. 그 가운데 중요한 각종 형벌은 다음과 같다.
① 대시(待時)와 부대시(不待時): 명률에 의하면, 사형은 교(絞)와 참(斬) 두 가지뿐인데 우리 나라에서는 참형을 다시 대시참과 부대시참으로 나누었다. 십악(十惡:몸과 마음과 입으로 짓는 열 가지 죄악) 간도살인(奸盜殺人)이나 강상범(綱常犯)을 제외한 잡송(雜訟)은 무정(務停) · 무개(務開)라고 하여 춘분 후에는 정지하고 추분 후에 재개하게 되어 있었다.
사형의 집행은 추분 후, 춘분 전에 행형(行刑)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즉, 사형판결을 받아도 추분이 올 때까지 기다려 집행하는 것을 대시참이라고 하고, 추분을 기다리지 않고 언제든지 사형을 집행하는 것을 부대시참이라고 하였다. 예를 들면, 사주전문자(私鑄錢文者)나 승야취당살인자(乘夜聚黨殺人者)는 부대시참이었고 사민도망자(徙民逃亡者)는 대시참이었다.
② 거열 · 기시: 거열은 환(轘) 또는 환시(轘市)라고도 한다. 『경제육전』에는 원악향리를 거열에 처하는 규정이 있고, 1407년(태종 7) 11월에 내은가이(內隱加伊)가 환형을 당한 일이 있다.
환은 시체를 거열하는 것으로 능지보다는 덜 참혹하므로 능지에 대신하여 자주 행하여졌다. 1410년 4월에 개국일등공신 조호(趙瑚)를 혜민국(惠民局) 가로상에서 환하고 시체를 지방에 회람시킨 일이 있다.
1456년(세조 2) 6월에는 백관(모든 벼슬아치)을 거리에 몰아놓고 박팽년(朴彭年) · 유성원(柳誠源)을 거열하여 머리를 효시하고 각 도에 시체를 전시하였다.
능지나 지해(팔다리를 떼내는 형벌)도 공개회람하는 행위가 뒤따르며, 기시도 시장에 시체토막을 공개하는 것이므로 거열(환) · 기시 · 효시 · 능지(지해) · 순형 등이 서로 관련이 있는 연속적 행형행위와 일환(一環)이며, 각 부분적 특징에 불과하다고 생각된다.
③ 사사(賜死): 죄인에게 독약을 하사하여 강제로 마시게 함으로써 그 독약으로 생명을 끊게 하는 사형의 일종이다. 독약을 사약이라고 하며, 사약에 의한 사형은 왕족 또는 세도 있는 고관대작을 극형에 처할 수 없어 그 명예를 존중하여 왕이 직접 사약을 내려 자살하게 하는 것이다. 단종의 독살을 비롯하여 조광조(趙光祖) · 송시열(宋時烈) · 김수항(金壽恒) 등 많은 인재가 사약으로 희생되었다.
④ 팽형(烹刑): 팽아지형(烹阿之刑) · 팽아지전(烹阿之典) · 저형(煮刑) · 정확지형(鼎鑊之刑) · 확팽지형(鑊烹之刑)이라고도 하며, 중국 한나라 때 생긴 형벌이다. 솥에 넣고 끓여 죽이는 형벌인데 매우 참혹한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팽형을 시행한 일은 없다.
다만, 조선 영조 초에 탐관오리를 팽형에 처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실형으로 처한 일은 없고, 의례적 · 상징적으로 처한 예는 전하여지고 있다.
즉, 탐관오리를 체포하여 종로 네거리 보신각 앞에 큰 솥을 걸어놓고 군막(軍幕)을 치고 포도대장 이하 포도청 관리들이 도열한 가운데 죄인을 끌어다가 솥 속에 던져 넣은 뒤 포도대장이 죄인의 죄목을 낭독하고 팽형을 실시하였는데, 불을 피우는 형식을 취하여 팽형의식을 종료하고 죄인을 가족에게 인계하였다.
가족은 죄인이 사형으로 처형된 것으로 간주하여 형식적인 장례를 치르면 죄인은 사망자로 취급되고 은둔생활을 하여야 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① 유형: 명률에 의하면, 그 종류로는 유 2,000리 · 유 2,500리 · 유 3,000리의 3등급이 있고, 따로 천사(遷徙) 1,000리가 있었다. 국토가 광대한 중국의 형벌이므로 우리 나라에서 명률 유형의 적용에는 처음부터 문제가 많았다.
태종은 유형제의 속형제가 있음을 감안하고 유배지를 가장 먼 경원부 1,680리, 그 다음으로 동래현 1,230리, 마지막으로 축산(丑山) 1,065리를 기준으로 하여 유 1,680리는 속동 24관 오승포 360필, 유 1,230리는 속동 22관 오승포 330필, 유 1,065리는 속동 20관 오승포 300필로 책정하여 시행하였다.
세종은 12년 5월에 전국적으로 유배지를 배치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경성 · 경기좌우도 · 유후사(留後司)의 유 3,000리인 자는 경상도 · 전라도 · 함길도 · 평안도의 빈해각관(濱海各官)에 정배(定配: 배소를 정하여 죄인을 유배시킴)하고, 유 2,500리인 자는 경상도 · 전라도 · 평안도 · 함길도의 중앙각관 또는 강원도의 빈해각관에 정배하고, 유 2,000리인 자는 경상도 · 전라도 · 평안도 · 함길도 각 도의 시면각관(始面各官:도경 첫머리에 속하는 고을 수령) 또는 강원도의 중앙각관에 정배보내는 식으로 유배지를 단축하고, 혹은 우회하여 도착시키는 식으로 변용하여 시행하였다.
같은 해 윤12월에는 이를 다시 검토하고 각등유배의 거리에 해당하는 유배소의 위치를 더욱 구체화하였다. 경성 · 유후사 · 경기의 유 3,000리는 경상도 · 전라도 · 평안도 · 함길도 각 도 내의 30식(息) 밖에 있는 빈해(바다에 가까운 땅) 각 고을, 유 2,500리는 위 각 도 내의 25식 밖에 있는 각 고을, 유 2,000리는 위 각 도 내의 20식 밖에 있는 각 고을 등으로 결정한 것이다. 이것으로 유배소상정은 마지막이 된 것이다.
② 부처(付處): 유형(중죄에 대한 형벌로 죄인을 먼 곳이나 섬으로 귀양보냄)의 거리 이내의 근처에 가족과 함께 머물러 살 것을 명하는 것이며, 관인계급의 가벼운 범죄에 대한 유형의 일종이다. 그러므로 부처를 일명 중도부처(中途付處)라고도 한다. 부처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비교적 무거운 순서로 적으면, 중도부처, 부처본관(付處本貫) · 부처본향(付處本鄕), 사장부처(私莊付處), 원방부처(遠方付處) · 외방부처(外方付處), 자원부처(自願付處) · 자원류(自願流), 외방종편(外方從便), 경외종편(京外從便)이다.
위 순서 중 자원부처 이하는 머물러 사는 강제성이 희박하므로 형벌이라기보다는 근신 격리 정도의 뜻이 있는 것이었다.
③ 안치(安置): 유삼등(流三等) 이상의 유형의 집행을 의미하며, 왕족이나 고위관원에 대한 대접으로 유형에 갈음하여 안치를 명한 것이다. 하급관리나 서민은 안치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배소에서의 유거(幽居:속세를 떠나 그윽하고 외딴 조용한 곳에 묻혀 삶)를 강제당한 것이므로 두문불출이라고도 하였다.
안치는 처첩과 미혼자녀와 동거할 수 있었고, 부모와 기혼자녀의 왕래상봉이 허락되었다. 종류가 많으며, 무거운 순서대로 적으면, 가극안치(加棘安置) · 천극안치(荐棘安置:배소 내에서 기거하는 방을 다시 또 위리하는 것) · 위리안치(圍籬安置) · 절도안치(絶島安置) · 극변안치(極邊安置) · 본향안치(本鄕安置) · 안치사장(安置私莊) · 안치농장(安置農莊) · 자원안치이다.
안치의 배소는 보수인(保授人)의 감시를 받으므로 보수지가(保授之家)라고도 하는데, 보수지가의 주위를 탱자나무로 위리하는 것을 위리안치라고 한다. 천극이나 가극도 가시나무로 위리하는 것을 말하므로 같은 의미를 지닌 숙어였다.
그러나 조선 말기 순조 때에 안치죄인이 기거하는 방을 가시나무로 다시 위리하는 방법을 고안하여 천극이라고 불러 위리안치보다 무거운 형벌로 생각하였고, 가극안치를 천극안치보다 더 무거운 것으로 보았다.
안치죄인이 기거하는 방을 위리하는 것 자체가 남형이며, 관념적인 특징에 불과하고, 위리안치 · 천극안치 · 가극안치는 모두 혼용되고 있어서 실질적으로 같은 명칭이었다.
④ 정속(定屬) · 충군(充軍): 정속은 영속(永屬) · 정역(定役) 등과 같이 모두 유배지의 관노비로 삼는 것이며, 유형의 부가형이다. 충군은 변방에 유배하여 군역에 충당하는 것을 뜻하며, 유형의 부가형으로 명률의 변원충군과도 같은 형벌이다. 군역이 천역으로 생각되던 봉건시대이므로 충군이 엄한 형벌로서의 뜻을 가졌던 것이다.
단근형(斷筋刑)은 발꿈치의 힘줄을 끊어내는 육형의 하나로 절도법을 다스리기 위하여 채택된 형벌이다. 단근형은 중국 수 · 당의 율령제도는 물론 명률에도 없는 율외형이었다. 단근법이 채택된 것은 세종 때였다.
1435년 6월 전 형조판서 신개(申槩)가 절도재범과 삼범은 해도(海島)로 보내는 것이 전례이나 도망치므로, 재범자는 경면하고 삼범자는 단근하자고 역설하여 이듬해 10월 태 · 장을 면제하고 단근자자(斷筋刺字)하는 절도단근법을 입법하였다.
그리하여 1466년(세조 12)부터는 절도초범이라도 공미(公米) 3석 이상, 사미(私米) 6석 이상을 절취한 자는 단근하고, 소 · 말이나 포화(布貨) 잡물죄에도 적용하였으며, 성종 2년부터는 왼편다리 복사뼈의 힘줄을 1촌 5푼 끊도록 되었다.
① 곤형(棍刑): 곤장형이라고도 하며, 곤장으로 볼기와 허벅다리를 번갈아 치는 잔인한 형벌로 도범과 군율범을 다스리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
곤형은 중국의 형벌도 아니고 조선시대 역대실록이나 『경국대전』을 비롯한 역대 법전에도 보이지 않는 형벌이다. 영조 때 제정된 『속대전』과 『영조실록』에 비로소 곤형의 규정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영조 때에 만들어진 조선시대 고유의 형벌로 추정된다.
곤형의 종류 · 규격은 1778년(정조 2) 반포된 흠휼전칙(欽恤典則)의 군문곤제식(軍門棍制式)에 규정되어 있다. 즉, 각종 곤장의 곤상(棍上)에는 곤명 · 길이 · 너비 · 두께의 치수를 새겨 곤장의 혼동을 막고 있다.
곤장형의 용형자(用刑者)는 군무를 담당하는 각 기관장으로 되어 있었다. 위와 같이 곤장의 규격은 정해져 있었으나, 치도곤을 제외한 일반 곤장은 어떠한 죄에 어느 종류의 곤장을 사용하는 것인지 죄의 규정과 곤형량의 규정이 없었다.
그러므로 곤형제도는 창시 초부터 남형(濫刑:가리지 않고 함부로 처형함) 가능성을 안고 있었고, 장과는 너비 · 두께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무겁고 두꺼운 널빤지였으므로 인명피해가 심한 악형 중의 악형이었다. 다만, 곤장을 치는 도수에 관하여서는 1757년(영조 33) 5월에 내린 영조의 윤음에 1회에 10도를 넘지 않도록 규제하고 있었다.
② 원장형(圓杖刑): 장의 상부가 원형으로 되고 무거운 것이며, 그 규격에 대하여 법적 기록이 없어 경외의 각 관부에서 마음대로 만들어 사용한 것 같다.
즉, 도범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법에서 정한 장은 너무 가볍다고 생각하여 크고 무거운 장을 고안하고 원장이라고 부른 것이며, 조선 고유의 형구이다. 예종 때에 고안되고 엄격한 규제 아래 사용되기 시작한 것 같다.
그 뒤 원장은 널리 사용되어오다가 1761년 8월 폐지하였으며, 『속대전』에서도 원장을 사용한 자는 남형률로 논죄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그리하여 원장을 폐지하는 대신 치도곤이 새로 고안되었던 것이다.
① 적몰가산: 고려시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재산형적인 부가형이며, 조선시대에는 반역죄인에 대하여 과하였다.
② 파가저택(破家瀦宅): 죄인의 집을 헐고 그 집터에 못을 만드는 것이며, 삼강오륜을 위배한 강상죄인을 다스리기 위하여 과한 것이다.
아울러 처자를 종으로 만들고 읍호(고을에서 재력이나 권력이 으뜸가는 사람)도 강등시키며 수령을 파직하였다. 강상죄인 외에도 범상부도(犯上不道)나 능욕수재(凌辱守宰)의 경우에도 시행하였으며, 『속대전』 형전 추단조에 규정되어 있다.
① 모반대역의 연좌: 죄인과 일정한 친족관계에 있는 자에게 연대적으로 그 범죄의 형사책임을 지우는 제도로, 명률에 규정된 모반(謀反) · 모반(謀叛) · 대역의 경우가 대표적이며, 죄인의 부자 · 처첩 · 조손 · 형제자매 · 자의 처첩까지 연좌되었다.
또, 『속대전』에는 병사를 동원하여 반역을 도모한 괴수의 형제는 그 처첩을 사형에 처하고, 그 아비로서 80세 이하인 자는 사형 대신에 정배(定配)하고, 2, 3세 된 어린아이는 정배하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다. 연좌형은 1894년 갑오개혁 때 비로소 폐지되었다.
② 전가사변(全家徙邊): 전가입거(全家入居)라고도 하며, 죄인으로 하여금 전 가족과 함께 변경지방으로 옮겨 살게 하는 일종의 유형이라 할 수 있다.
주로 인적이 드문 미개척지인 함경도 경원 · 영북(寧北) 등 북방지역의 개척을 위하여 백성을 이주시키는 것인데, 조선 초기에는 단순한 이주정책의 일환이었으나, 이것이 형벌의 성격을 가지게 되어 중종대 이후에 형벌로 고정되었다.
③ 강읍호(降邑號)와 연좌: 현 · 군 · 부 · 목 등에서 강상죄인이 나오거나 수령을 능욕하고 읍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킨 경우에는 읍을 강등함으로써 읍 전체에 연대책임을 과하였으며, 이것은 친족에 대한 연좌형(緣坐刑)이 아니라 연좌형(連坐刑)이라고 한다. 강호하면 10년이 지나야 원래의 등수에로 복귀할 수 있으며, 심지어 충청도를 공충도(公忠道)로 강호한 일도 있었다.
④ 금고형: 관리로 되는 길을 막는 뜻이며, 조선시대에는 관리로서 뇌물을 취하거나 관물을 횡령하는 자에게 과하였다. 그 구체적인 뜻은 다시는 관리로 채용하지 않는 영불서용(永不敍用), 사족(士族)을 서인으로 만드는 폐위서인이라고도 표현하였으며, 명예형의 일종이었다.
금고한다는 뜻은 자손에게까지 미치는 연좌형이고, 서인으로 하는 것도 자손에게까지 미치는 것이다. 이 형벌은 조선시대 특유의 형벌이며, 역대왕이 많이 활용하였다. 또, 삼성추국신장(三省推鞠訊杖)은 의금부에서 주로 강상죄인을 다스리는 추국을 뜻하며, 의정부 · 사헌부 · 사간원의 입회하에 의금부에서 고문하였다.
법에 정하여진 고문 외에도 자백을 얻기 위하여 법률에서 정한 것 외에 매우 잔혹한 고문이 행해졌으며, 그 결과로 얻어진 자백이 유죄의 증거로 되었다. 관리들은 이러한 법외고문을 서슴지 않아 폐단이 심하였다.
그런 예로는 죄인의 오장육부가 있는 등을 치는 태배형(笞背刑), 신장으로 가리지 않고 몸을 마구 치는 난장(亂杖), 난장의 변형으로서 붉은 색칠을 한 둥근 몽둥이로 여러 사람이 마구 치는 주장당문(朱杖撞問)이 있다.
또한, 양다리를 묶고 그 사이에 두개의 붉은 몽둥이를 가위를 벌리듯이 좌우로 벌리는 전도주뢰형(剪刀朱牢刑: 여기에서 주리를 튼다는 말이 나왔음), 양다리의 무릎뼈를 둥근 나무막대로 문지르는 압슬(壓膝), 양다리를 묶고 양손을 뒤로 묶어 놓고 쇠막대기를 뜨겁게 달구어서 발가락 사이에 넣는 포락(炮烙)이 있었다.
그리고 곤장의 모서리로 정강이뼈나 발뒤꿈치를 치는 것, 형틀에 묶어 놓고 곤장의 두 끝으로 문질러서 볼기의 가죽을 벗기는 것, 나무집게로 죄인의 급소를 짚어 누르는 것, 양다리를 묶어 나무 위에 거꾸로 매달리게 하고 잿물을 콧구멍에 부어 넣는 것, 끈으로 두 발의 엄지발가락을 묶어 세 모서리가 있는 막대기를 끼워서 거꾸로 매달고 끈을 치는 것, 발목을 씨아에 넣고 치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네 모서리의 말[斗] 속에 무릎을 꿇게 하고 양손을 뒤로 묶어 놓고 막대기로 치는 것, 저고리를 벗기고 양손을 뒤로 묶어 깨진 기왓장 위에 앉히고 등을 치는 것, 큰 침으로 볼기를 찌르는 것, 돌로 입이나 뺨을 치는 것, 보리가시랭이를 입에 문지르는 것, 목에 씌운 나무칼을 나무에 매단 채 발에 돌을 달게 하는 것 등 수없이 많았다.
법률상 이러한 고문을 한 관리는 장 100도 3년에 처하고, 치사하게 한 자는 장 100에 영불서용(永不敍用: 죄지어 파면된 관원을 영구히 재임용하지 않는 일)에 처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으나, 이 규정은 거의 적용된 일이 없었고, 법외고문을 금지하는 국왕의 명령이 수시로 있었으나 역시 지켜지지 않았다. 고문은 정식의 형벌은 아니었으나 조선시대에는 법률상의 정형과 구별되지 않고 모두 형벌로 의식하였으며, 근대에 이르러 형벌과 구별되었으나 고문은 고문대로 다양하여지고 기술적인 것으로 되었다.
오늘날의 형벌은 19세기 말의 개화기에 정비되기 시작하여 그 뒤로 사형 · 징역 · 금고 · 자격상실 · 자격정지 · 벌금 · 구류 · 과료 · 몰수의 9종으로 되었다. 전근대사회에 있었던 형구도 이제는 없애고, 구치소나 교도소 내에 구금하며 수갑을 채우고 포승으로 묶으며, 그 이상의 신체의 자유를 구속하는 형벌이나 형구는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고문도 허용되지 않으나 음성적으로 행하여지는 것은 전통시대로부터의 규문주의(糾問主義: 형사소송에서 법원이 범죄 사실을 발견하였을 때 소추권자의 소추를 기다리지 않고 직권으로 범죄를 수사하여 범인을 체포 · 심리 · 재판하는 주의)에 의한 자백의 증거능력을 과신하는 타성에 의한 것이다. 과학적인 수사능력이 개발될수록 고문은 사라질 것이며, 인권사상의 신장과 더불어 형벌의 집행도 완화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