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정장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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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부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한반도의 북위 38도선 이남에 존재한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在朝鮮美國陸軍司令部軍政廳, 약칭 미군정청) 최고책임자의 관직.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군정장관은 해방 직후부터 정부수립까지 북위 38도선 이남에 존재한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약칭 미군정청) 최고책임자의 관직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항복 후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분할하여 남과 북을 각각 점령하였다. 북위 38도선 이남에 진주한 미군은 3년간 남한을 점령하고 미군정청을 통해 군정을 실시했다. 역대 군정장관은 아놀드 소장(초대), 러취 소장(2대), 딘 소장(3대)이었다. 이 중 러취는 친우익적 성향의 인사로 이승만이나 한민당과 가까웠다. 미군정은 한국인을 통한 간접통치를 실시하였으나 실권은 미군정 고위관료들이 장악하였다.

목차
정의
해방 직후부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한반도의 북위 38도선 이남에 존재한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在朝鮮美國陸軍司令部軍政廳, 약칭 미군정청) 최고책임자의 관직.
개설

1945년 9월부터 1948년 8월까지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 소속 현역 장성들이 역대 군정장관으로 취임했다. 초대 군정장관은 아놀드(Archibold V. Arnold, 재임기간 1945.9.12∼1946.1.4) 소장, 제2대는 러취 (Archer L. Lerch, 재임기간 1946.1.4∼1947.9.11) 소장, 제3대는 딘(William F. Dean, 재임기간 1947.11.25∼1948.8.15) 소장이었다.

내용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함에 따라 연합국의 일원인 미국과 소련은 북위 38도선으로 한반도를 분할하여 남과 북을 각각 점령하였다. 9월 8일 북위 38도선 이남에 진주한 미군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수립될 때까지 3년간 남한을 점령하고 군정을 실시했다. 미군정청은 남한에 군정을 실시하기 위해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가 수립한 기구였다.

남한에 진주할 목적이었던 하지(John R. Hodge) 중장 지휘하의 미 육군 24군단은 9월 8일 인천에 상륙, 9일 서울에 입성해서 38도선 이남지역에 대한 군정을 선포했고, 12일 미 육군 24군단 휘하의 제7보병사단장 아놀드 소장이 초대 군정장관에 취임했다. 아놀드 소장은 7사단의 담당구역이 서울 · 경기 · 충청 · 강원 지역이란 이유만으로 군정장관이 되었다.

아놀드는 미국 코네티컷주 콜링스빈시 출신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며, 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남한에 진주할 때까지 군대에서 33년 간 복무한 포병출신 지휘관이었다. 남한 진주 당시 56세였던 그는 2대 군정장관 러취 소장에게 군정장관직을 물려준 뒤 미소공동위원회 미국 대표단 초대 수석대표로 임명되었고, 1946년 9월 23일 귀국할 때까지 수석대표직을 맡았다.

아놀드는 취임 후 한민당 소속의 김성수(金性洙)를 비롯한 11명의 한국인을 군정장관 고문으로 임명했으며, 1945년 10월 10일 “남한에는 미군정 이외의 다른 정부가 있을 수 없다”는 강경성명을 발표하여 좌익이 우세한 조선인민공화국을 불법화하였고, 이후 중국 충칭(重慶)에서 귀국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부 자격 역시 부인했다.

1945년 말까지만 해도 군정은 전술군의 지휘계통 아래 통합되어 있었으나 1945년 11월 말경부터 전술군의 지휘체계로부터 민정조직이 분리되기 시작해서 1946년 1월 4일부터는 독자적인 중앙집권적 민사행정조직이 수립되었다.

제2대 군정장관 러취 소장이 처음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45년 가을 그가 미 육군 헌병사령관으로 방한했을 때였다. 그는 당시 아놀드의 후임을 찾고 있던 하지로부터 군정장관직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를 승낙하여, 동년 12월 다시 서울에 왔다. 그는 한국에 부임할 당시 버지니아대학 소재 군정학교 교장이었고, 그가 제2대 군정장관에 취임한 것은 의도적인 결정이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남한에서는 우익이 권좌에 올라야 하고, 국내정치에 관한 한 우익에게 모든 책임을 맡겨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그는 이승만이나 한민당과 가까웠다. 그리고 러취 소장 재임 중인 1946년 2월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이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의 자문기구로 출범했다.

이승만 민주의원 의장이 해방 이전 미국 체류시 미국인 고문에게 광산채굴권을 매각했다는 추문으로 사퇴한 뒤, 미군정은 1946년 5월부터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했다. 1946년 12월 김규식을 의장으로 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개원했으며, 1947년 2월 과도입법의원인 안재홍이 군정장관 산하의 한국인 민정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미군정은 이 시기부터 행정부서의 책임자를 한인으로 임명하면서 군정의 한인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이는 점령당국이 충원한 구식민지관료 및 우익세력에게 행정실권을 부여하는 과정과 다름없었다. 미군정은 1947년 5월 과도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한국인을 통치의 전면에 내세우는 일종의 간접통치를 실시하였지만 실권은 여전히 미군정 고위관료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러취 소장은 1946년 11월 탈장수술로 이듬해 1월까지 치료를 받았으며, 1947년 6월에는 원조 등 당면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도미(渡美)하였다. 그는 미국에서 돌아온 뒤 1947년 9월 대동맥관상폐쇄증으로 쓰러져서, 그 해 9월 11일 서울에서 향년 53세로 사망하였다.

러취 사망 후 미국은 1947년 9월 17일 한국문제를 국제연합(UN)으로 이관했고, 헬믹 군정장관 대리를 거쳐 3대 군정장관으로 딘 소장이 부임하였다. 이후 1948년 8월까지 딘 소장이 군정장관 직무를 수행했다.

참고문헌

『미군정기 지배구조와 한국사회 -해방 이후 국가시민사회 관계의 역사적 구조화-』(이혜숙, 선인, 2008)
『해방전후 미국의 대한정책』(정용욱,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한국의 국가 형성과 민주주의 -미군정기 자유민주주의의 초기제도화-』(박찬표, 고려대학교 출판부, 1997)
『한국 현대 민족운동 연구 -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서중석, 역사비평사, 1993)
『한국전쟁의 기원』(브루스 커밍스, 청사, 1987)
『해방삼년사 Ⅰ·Ⅱ』(송남헌, 까치, 1985)
『주한미군30년』(서울신문사 편, 행림출판사,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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