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립 당시에는 51개국이 회원국이었으나 1998년 6월 말에는 185개국으로 늘어났으며, 본부는 미국 뉴욕에 있다. 제1차세계대전 후 결성되었던 국제연맹이 붕괴된 모순점을 해결하고 다시 한번 세계평화질서를 재건하자는 노력의 결과, 1941년에 「대서양헌장」, 1942년 연합국공동선언을 거쳐 1943년 모스크바선언에서 국제기구 설립의 일반 원칙이 정해졌다.
이어 1944년 덤바튼오크스회담을 열고 미국·영국·소련·중국(중화민국) 등 4대 강국이 일반 국제기구의 창설에 합의, 「국제연합헌장」의 기초작업에 들어갔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을 거쳐 그 해 4∼6월 동안의 샌프란시스코회의에서 최종적으로 헌장을 채택하였으며, 그 해 12월 27일 51개국 회원국 모두가 이를 비준하였다.
헌장의 목적은 ① 세계의 평화와 안전을 유지한다. ② 세계 각국간의 우호관계를 발전시키고 세계평화를 강화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강구함으로써, 국가간의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 국제연합이 중심적인 지위에 선다.
③ 비정치적 분야인 경제·사회·문화·인도 분야에서의 기능적 국제협력을 통한 문제의 해결과 인권 및 기본적 자유의 신장을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④ 이러한 공동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각국의 행동을 조절하는 중심기구로서의 구실을 수행한다는 등이다.
국제연합은 6개의 주요 기관과 그 산하에 많은 보조기관 및 전문기구를 두고 있다.
총회: 국제연합의 최고의결기관으로서 각국의 주권평등의 원칙하에 표결시에는 1국1표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안전보장이사회의 일차적인 책임인 국제평화와 안전에 관한 사항 이외에는, 국제연합의 활동범위에 속하는 어떠한 문제라도 토의, 권고하는 권능을 지닌다. 그리고 주요 문제는 출석하여 투표하는 국가의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일반문제는 과반수로 의결한다. 정기총회는 매년 9월의 셋째 화요일에 개최되어 왔으나 제52차 국제연합 총회(1997년)운영위원회에서는 제53차 총회부터 매년 9월 1일 이후 첫번째 화요일에 총회를 개최하도록 결정하였다. 특별총회는 안전보장이사회의 요구가 있거나 총회에서 과반수 이상의 회원국들의 요구가 있을 때 15일 이내에 개최한다. 그러나 세계평화에 대한 일차적 책임기관인 안전보장이사회가 강대국의 빈번한 거부권행사로 그 기능이 자주 마비되는 관계로, 6·25전쟁중인 1950년 11월의 제5차 총회에서는 총회의 권능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평화를 위한 단합결의(Uniting for Peace Resolution)’를 의결하였다. 안전보장이사회에서의 거부권행사로 평화유지를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없을 때, 총회에게 평화를 위한 적절한 조치를 권고할 수 있는 권능을 부여한 것이다. 그 이후에 이에 따른 구체적인 조치를 취한 예로는 1956년의 수에즈운하 위기와 헝가리사태, 1958년의 레바논문제, 1960년의 콩고사태, 1967년의 제3차 중동전 등이 있다.
안전보장이사회: 헌장상 국제평화와 안전의 유지를 위한 일차적 책임을 지고 있는 기관이다.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의 5대 상임이사국과 임기 2년으로 총회에서 선출되는 10개 비상임이사국 등 15개 이사국으로 구성된다. 상임이사국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전상임이사국이 동의해야만 회원국을 구속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따라서 상임이사국의 거부권행사로 그 기능이 자주 마비되고 있다.
경제사회이사회: 국제사회의 경제·사회·문화·교육·식량·통신 등 비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기관이다. 총회에서 선출되는 임기 3년의 54개 이사국으로 구성되고 매년 18개국씩 개선되며, 재선도 가능하다. 국제연합의 17개 전문기구들이 이 이사회와의 협정을 통하여 산하에 들어가 있다.
신탁통치이사회: 총회 산하에서 신탁통치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기관이다. 그러나 국제연합 발족 당시의 신탁통치지역이 거의 독립하였고, 1990년 12월 20일 안보리 결의 제683호에 따라 태평양의 4개 섬이 모두 독립하였고 마지막 신탁통치 지역이었던 팔라우(Palau)도 1994년 10월 1일 자로 독립하여 오늘날은 신탁통치위원회의 기능은 끝났다. 신탁통치는 향후 지구환경에 대한 인류공동의 신탁통치 개념으로 발전되고 있다.
국제사법재판소: 국제연합의 사법기관이며, 국제연맹에 속하였던 상설국제사법재판소와 그 기능이 유사하다. 「국제연합헌장」과는 별도의 「국제사법재판소규정」을 가지고 있으며, 네덜란드의 헤이그에 본부가 있다. 재판관은 15명이고 임기는 9년이다. 이 기관에는 모든 회원국이 당사국이 되며, 회원국이 아닐 경우는 안전보장이사회의 권고나 총회가 정하는 조건에 따라서 당사국이 될 수 있다. 재판소 관할권을 승인하는 회원국들간의 분쟁에 대해서는 국제법에 따른 판결을 내릴 수 있으며, 총회 요구에 따라 어떤 분쟁에 대한 권고적인 의견 제시 등을 한다.
사무국: 국제연합의 사무를 관장하는 상설기관이다. 사무총장 1명과 30여명의 사무차장 등 1만 5000여 명의 직원이 있다. 사무총장은 상임이사국을 포함한 안전보장이사회의 권고로 총회에서 임명된다.
초대 사무총장은 노르웨이의 리(Lie, T.), 2대는 스웨덴의 하마슐드(Hammarskjold, D.), 3대는 미얀마(현재 미얀마)의 우 탄트(U Thant), 4대는 오스트리아의 발트하임(Waldheim, K.), 5대는 페루의 케야르(Cuellar,T.P.), 6대 사무총장은 부트로스 갈리(Boutros Ghali), 7대 사무총장은 가나의 코피 아난(Cofi Annan)이었으며, 8대 총장은 대한민국 출신의 반기문(潘基文)이었다. 현재는 포르투칼 출신의 안토니오 구테헤스(Antonio Guterres)가 9대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1997년 1월부터 2001년 12월 31일까지의 임기를 가지고 있다. 사무총장은 유엔을 대표하는 총회 및 이사회의 모든 회의에 참가하여 이들 기관으로부터 위임된 임무를 수행한다. 사무총장의 임기는 헌장상의 규정은 없으나, 초대 사무총장이 5년간 재임한 전례를 따르고 있으며 중임할 수도 있다. 사무국 직원은 국제법상 외교관이 지니는 특권과 면책권을 가진다.
격렬한 냉전구조 속에서 위축되었던 유엔의 기능은 탈냉전기류 속에서 활성화되는 듯 하였고 그것은 1991년의 걸프전쟁을 계기로 뚜렷해졌다.
즉, 유엔 안보리의 결의를 통해 국제공권력이 창출되었고 집단안보적 성격을 지니는 무력사용이 행해졌다. 그러나 유엔의 기능은 다시 평화유지활동에 국한되었고, 국제경제의 어려움 등에 따라 그러한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한 재정적 부담의 증가는 유엔을 다시 어려운 상태로 몰아 넣고 있다.
비록 탈냉전에 따른 유엔의 정치적 기능은 위축되고 있으나 환경의 신탁통치제도론 등 많은 기능적 분야에서의 유엔에 대한 기대는 커가고 있으며 세계질서의 관리자로서의 유엔의 기능은 아직도 그 중요성을 더해 가고 있다.
한국의 임시정부 수립 문제를 위하여 설치된 미소공동위원회가 1947년 결렬되자 그 해 미국은 ‘한국독립에 관한 문제’를 미국이 국제연합 총회에 상정하였다. 소련은 미소공동위원회의 실패는 미국의 책임이며, 국제연합에의 안건상정은 모스크바협정의 위반이라고 비난하였다. 한국의제를 접수한 총회는 이 안건을 총회의 제1위원회(정치위원회)에 부의하여 결과를 보고토록 하는 절차를 진행시켰다.
미국은 이 위원회에서 “국제연합 한국임시위원단(UNTCOK)을 파견하여 그 관리하에서 가능하면 1948년 3월 31일까지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구체적인 제안을 하였고, 소련은 한국의 미국·소련 주둔군의 철수를 제안하며 맞섰다.
소련측 제안이 먼저 부결되고 미국의 제안이 상정되자, 소련·우크라이나·체코슬로바키아 등 공산진영은 표결에 참가하지 않았다.
미국측 제안은 제1위원회를 통과한 다음, 1947년 11월 14일 총회 전체회의에서 찬성 43, 반대 0으로 채택, 확정되었다. 국제연합 총회의 결의에 따라 국제연합 한국임시위원단의 1차회의가 1948년 1월 서울에서 개최되어 인도 대표인 메논(Menon,K.)이 의장에 선출되고 활동에 들어갔으나, 북한 군정당국은 이 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하였다.
위원단은 이 사실을 국제연합 중간위원회(일명 소총회)에 보고, 협의하여, 우선 선거가 가능한 남한지역만의 선거관리를 결의하고 1948년 5월 10일 총선거가 실시되었으며, 그 해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다.
1948년 10월 이 위원단은 국제연합에 최종보고서를 냈고, 그 해 12월 12일 파리에서 열린 제3차 국제연합총회는 “국제연합 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하에 실시된 선거에 따라 수립된 대한민국정부는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선언하며, 점령국들은 가능한 한 조속히 한국으로부터 점령군을 철수시킬 것을 권고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이 결의안은 국제사회에서 남북한의 정통성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우리에게 유리하게 작용되었다. 미국은 1949년 1월 1일 대한민국을 승인하였고, 우리 정부는 그 달 19일 국제연합에 회원국 가입신청을 냈으나, 소련의 거부권행사로 가입이 좌절되었다.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의 전쟁기간에 있어서 한국문제는 국제연합의 중대한 문제가 되었는데, 북한의 남한 침공 사실은 당시 한국에 주재하고 있던 국제연합감시단에 의하여 보고되었고, 미국은 전쟁 발발 당일 안전보장이사회에 제소하였다. 같은 날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공산군의 철수를 요구하였으나 사태는 확전으로만 치달았다.
6월 27일 안전보장이사회는 회원국들에게 한국에 대한 원조를 권고하였고, 미국으로 하여금 유엔군사령부를 만들어 미군과의 통합군을 조직할 것을 요청하였다.
소련은 이때 중공(중국)의 대표권문제 해결에 불만을 품고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출석을 거부하고 있었으므로, 이사회의 조치들은 가능하였다. 같은 해 10월 총회는 우리나라의 통일과 독립을 위하여, 우리나라의 원조 및 재건을 임무로 하는 국제연합 한국통일부흥위원회(UNCURK)의 설치를 결의했다.
6·25전쟁 중에도 해마다 한국문제가 국제연합에 상정되었으나, 번번이 소련의 거부권행사로 방해를 받았다. 1953년에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한국문제는 협정에 따라 제네바정치회담에서 논의되었으나, 회담이 실패하자 한국문제는 다시 국제연합의 의제로 넘어갔다.
국제연합 한국통일부흥위원회의 보고서에 기초하여 한국문제는 매년 총회의 의제로 자동상정되었고, 동서 양 진영의 ‘한국문제에 관한 결의안’ 표대결이 되풀이되었다.
1961년 제16차 총회에서 미국 대표 스티븐슨이 한국 대표로 하여금 제1정치위원회에서의 한국문제토의에 참석하게 하자는 결의안을 제출하였다. 결과적으로 남북한 조건부 동시초청안이 되고 만 이변이었으나, 1962∼1967년에 이르는 동안 자동적인 상정방식으로 일관되었고, 1968년부터는 국제연합 한국통일부흥위원회의 보고서를 사무총장에게 제출하는 이른바 재량상정방식으로 전환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실효성이 없는 한국문제의 토의를 총회의 부담으로부터 덜어내려 하였으나, 북한은 계속 외국군철수안과 국제연합 한국통일부흥위원회 해체안을 총회에 제기함으로써 국제연합에서 남북한간의 대결은 지속되었다.
한편, 국제연합은 제3세계의 진출이 두드러져 그 세력판도가 달라졌으며,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일기 시작한 화해기운은 1971년에 중공의 국제연합 가입을 실현시켰다. 우리나라는 이러한 세계정세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위하여 1973년 6·23선언을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1973년 제28차 총회는 국제연합 밖에서의 화해기운과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시작으로 한 남북대화를 각각 지지하는 양 진영의 결의안을 합의성명의 형식으로 채택하였다.
서방진영이 제시한 남북한 동시가입, 국제연합 한국통일부흥위원회의 자진해체, 남북대화의 지지, 안전보장이사회를 통한 당사국들간의 협의 등을 내용으로 한 결의안과 공산측의 국제연합 한국통일부흥위원회의 해체, 유엔군사령부의 해체 및 주한 외국군의 철수 등을 내용으로 한 결의안을 정치위원회에서 절충하여 합의성명을 채택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합의의 내용은 ① 남북대화의 계속, ② 남북한 7·4공동성명의 환영, ③ 양측이 합의하는 국제연합 한국통일부흥위원회의 해체의 선에서 이루어졌다. 이로써 이 위원회는 남북대화를 계기로 한국의 구체적인 노력에 의하여 1973년 11월 29일 해체됨으로써 23년간의 활동을 끝냈다.
1975년 제30차 총회는 한국문제에 전혀 상반된 결의안을 동시에 통과시킴으로써, 한국문제 해결에 있어서 국제연합이 전혀 무기력한 기관이 되었다. 그 뒤부터 남북한은 한국문제를 국제연합에 제기하지 않고 있다.
제30차 총회를 계기로 한국문제는 유엔정치과정에서 탈락되었고 유엔테두리 밖에서 한반도 문제의 해결을 위한 ‘휴전당사국회담 제의’를 둘러싼 논쟁만 지속되었다.
1991년 9월에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 회원국이 될 때까지 지속되었으나 1990년대의 새로운 국제질서 속에서 유엔의 기능이 달라짐에 따라 남북한은 유엔 내에서 새로운 협력을 모색할 단계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