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우리나라에 진주한 미소 점령군의 군사분할선(軍事分割線)으로, 한반도 중앙부를 가로지르는 북위 38°선을 지칭한다.
조국의 광복이 실현되는 날 하나로 통일된 민족국가가 세워질 것을 내다보며, 국내외 각지에서 항일구국투쟁을 펼쳐 온 우리 민족의 자주적 의사와는 관계없이, 제2차세계대전의 전후처리를 위해 몇몇 전승 강대국들의 군사적 편의에 따라 그어진 선으로, 6·25전쟁이 일어나기까지 우리 국토를 남북으로 갈라놓는 분단선으로 고정되었다.
38선의 획정은 제2차세계대전에서 전세의 주도권을 장악한 연합국측이 마지막 군사작전을 마무리짓기 위한 방책과 세계 각지의 전후처리 문제들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1943년 12월 미국·영국·중국 등 3개국 수뇌가 카이로에서 회동하고, 종전이 예견되던 1945년 2월 소련을 포함한 연합국 수뇌들이 얄타에서 회동하였다.
이 얄타회담에서는 소련이 일본에 대항하여 참전하는 대가로 러일전쟁 이전에 러시아가 만주일대에서 장악하고 있던 경제적·군사적 이권들을 되찾아 가기로 양해하는 동시에, 한국에 대하여는 독립의 실현에 앞서 일정기간 신탁통치를 실시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 의견을 같이하였다. 이로써 소련은 만주에서의 발판을 확보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문제에 대한 발언권도 굳히게 되었다.
루스벨트(Roosevelt,F.D.)를 승계한 트루먼(Truman,H.S.) 대통령은 얄타회담이 끝난 뒤, 소련의 한반도에 대한 입장이 지나치게 강화되어 일방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을까 우려하면서, 이러한 만약의 사태를 미리 막아내는 데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1945년 7월 트루먼과 소련의 수상 스탈린(Stalin,I.)이 포츠담에서 만났을 때, 이들을 따라온 군수뇌들이 대일작전(對日作戰)을 마무리짓기 위한 연합군 참모장공동회의를 가졌다.
이 실무협의 결과 한반도에서는 공동작전을 펴기로 한다는 데 묵시적으로나마 의견의 접근을 보았다. 이러한 묵시적 양해는, 한반도에 관한 한 지상작전에서는 소련군측이 상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있었던 반면, 해상 및 공중작전에서는 미군측이 상대적인 우위에 있다는 군사능력의 실세에 바탕을 두고 성립되었다.
한반도에서의 공동작전 문제와 관련하여, 당시 미국의 정책당국은 한반도의 전후처리에 있어 그 주도권을 소련에게 넘겨주어서는 안 될 것이므로, 설령 한반도에서의 지상작전을 소련군이 전담할 경우에라도 종전 뒤의 점령만은 두 나라가 공동으로 해야 할 것이며, 다시 그로부터 국제신탁통치로 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리라고 판단하였다.
포츠담회담이 끝날 때까지 38°선이나 그와 비슷한 어떤 분계선을 정하여 두 나라 군대가 작전구역 또는 점령구역을 나누어 갖기로 합의한 사실이 있는지 없는지는 아직까지 확실하지 않으나, 적어도 이때쯤 미국 군부 및 고위정책당국이 한반도의 분할점령을 위한 그런 식의 구상을 검토하고 있었거나 검토를 마쳐 놓고 있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일단, 소련군의 점령 아래 들어간 지역은 공산화를 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미국 당국은 이미 폴란드사태를 통하여 충분히 경험하고 있을 때였다.
그뿐 아니라 포츠담회담이 끝난 다음부터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할 때까지의 약 10여 일 사이에, 가령 38°선을 분할진주선(分割進駐線)으로 하는 점령계획 따위를 두 나라 정부가 양해 또는 합의했을 가능성도 빼놓을 수 없다. 두 차례에 걸쳐 원자폭탄이 떨어진 다음 일본의 항복이 확실해짐에 따라 소련은 1945년 8월 8일 재빨리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를 휩쓸며 한반도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8월 10일 일본이 비로소 포츠담선언을 수락하여 무조건 항복을 할 뜻을 밝혀오자, 미국 정부의 실무진은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기 위해 연합군이 진주할 책임구역을 나라별로 할당하고, 한반도는 38°선을 기준으로 이남은 미군이, 이북은 소련군이 우리 나라에 있는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 문제를 담당하도록 제의하여 트루먼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트루먼 대통령은 일본이 항복한 직후, 그 최종안을 미국육군태평양지역 총사령관인 맥아더(MacArthur,D.)에게 하달하는 한편, 소련을 비롯한 관계국 정부에 이에 대한 동의를 구하였다.
맥아더는 1945년 9월 2일 전후처리를 위한 ‘미국육군 태평양지역 총사령부 일반명령 제1호’를 포고, 한반도에 있는 일본군은 38°선 이남에서는 맥아더 사령관 본인에게, 이북에서는 소련극동군 총사령관에게 항복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남북한에는 미소점령군의 군정이 시작되었다.
원래 카이로선언에서는 미국·영국·중국 3국의 수뇌들이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키기로 약속한다는 합의사항을 밝힘으로써 피압박민족이던 한국민에게 희망을 주었다. 얄타회담에서도 이와 같은 합의사항을 재확인하고, 한국을 구분된 지역이 아닌 단일체로 취급하기로 하였으나, 신탁통치를 하자는 논의에는 한민족으로서는 불만이었다. 얄타회담에 소련이 개입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였던 카이로정신은 변질되어 국토는 분단되고 말았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거론하자, 우리 국민은 신탁통치 결사반대를 주장하였으나, 소련공산당의 조종을 받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이 하루아침에 민족의 의사를 뒤엎고 신탁통치 찬성으로 기울어, 국토 양단의 불길한 전망은 더욱 굳어져 갔다. 한반도에 단일임시정부를 세우자는 모스크바3상회의의 논의에 따라서 1946년 3월과 1947년 5월 두 차례에 걸쳐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어 그 절차를 논의하였지만 합의점을 찾지 못하였다.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위하여 잠정적으로 설정되었던 점령지역 군사분계선이 동서냉전의 흐름에 휩쓸려 그 성격이 변질하여 정치적 분계선으로 고착화되어 갔다. 한국의 통일을 위해 국제연합의 결의에 따라 파견된 한국통일부흥위원단의 입북(入北)마저 북한측은 거절하였다. 광복 직후 38°선을 넘나들며 간헐적으로나마 이어지던 인원·물자·우편 등의 교류마저 끊어지고 38°선에는 철의 장막이 구축되었다.
남북을 통틀어 하나의 나라를 세우려던 노력들이 공산주의자들이 쳐놓은 장벽에 막혀 모두 수포로 돌아가자, 1948년 8월 15일 남한에서는 국제연합의 승인과 선거관리 아래 38°선 이남 지역에 유일한 합법정부로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같은 해 9월 북한에서는 소련 당국의 조작과 비호 아래 공산정권을 등장시킴으로써 남북한 사이에 대립이 항구화하기에 이르렀다.
38°선은 1950년 북한공산군의 남침과 더불어 소멸되었으나, 1953년 휴전협정이 조인되면서 ‘휴전선’이 다시 그어져 우리 국토는 여전히 갈라진 상태로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