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으로 악화되어 가는 전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정부는 그 해 12월 17일 「제2국민병소집령」을 발동, 약 50만 명의 장정들을 전국 각지의 51개 교육연대에 분산 수용하여 국민방위군을 편성하였다.
그러나 이 군대는 동원과 수송, 훈련과 무장을 위한 예산 확보 및 행정상의 조처를 미처 마련하지 못하였고, 간부급도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의 단원들을 뽑아 갑자기 현역계급으로 임관했기 때문에 지휘 통솔이 미숙하였다. 1951년 초 이른바 ‘1 · 4후퇴’를 당하여 서울과 각지의 방위군은 부산까지 약 15일간에 걸쳐 도보로 후퇴하였다.
하루에 주먹밥 한 덩어리로 배를 채우고 가마니로 이불을 삼는 참상 속에서, 아사자 · 동사자 · 병자가 1천여 명이나 발생하였다. 1951년 1월 15일 부산에서 열린 피난국회(避難國會)는 첫날부터 이 문제에 대한 정부의 대책을 추궁했다.
국회는 정부에 대한 건의안을 채택하여, ① 장정들을 인도적으로 처우하기 위해 시급히 수용을 단행하고, ② 병력 요소를 구비한 자와 비병력 요원을 구분하여 최소한 필요한 병력 요원만을 확보하고, ③ 병력 요원은 즉시 훈련을 실시하되 비병력 요원은 해산시키거나 생산 동원에 보충하라고 요구하였다.
그에 따라 정부는 2월 17일 36세 이상의 장정들을 귀향시켰으며, 이어 국회의 결의에 따라 5월 12일 국민방위군은 해체되었다. 이 과정에서 국민방위군 간부들의 국고금 횡령 사실이 국회의원 엄상섭(嚴詳燮)에 의해 폭로됨으로써 이른바 ‘국민방위군사건’이 표면화되었다.
국회진상조사단이 구성되어 그 해 5월 조사 결과를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국민방위군 간부들은 1950년 12월 17일부터 1951년 3월 31일까지 105일 동안 유령 인원을 조작하여 24억 원 어치의 금품을 착복하고 5만 2000섬의 양곡을 부정 처분하였다.
이 사건으로 부통령 이시영(李始榮)이 개탄하면서 사임서를 냈으며, 사건의 배후 인물로 지목된 국방부장관 신성모(申性模)가 사임하였다.
한편, 국회의 조사와는 별도로 정부에서는 헌병사령관 최경록(崔慶祿)이 진상조사를 진행하여 국회 조사와 대체로 같은 내용의 사실을 확인했다.
그에 따라 국민방위군 사령관 준장 김윤근(金潤根), 부사령관 준장 윤익헌(尹益憲), 보급과장 중령 박기환(朴基煥), 재무실장 중령 강석한(姜錫漢) · 박기현(朴基鉉) 등 5명이 그 해 6월 고등군법회의에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