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1·4후퇴 시기 국민방위군의 간부들이 방위군 예산을 부정 착복한 결과 철수 도중에 많은 병력들을 병사시킨 사건.
개설
역사적 배경
6·25전쟁 시기 아군은 1·4후퇴의 위기를 넘기면서 37도선에서 간신히 전선의 안정을 기하였으나, 중공군의 연속적인 공세에 전장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이 우리의 자유 독립을 위한 최후 결전 단계임을 선언하고 국민총력전으로 이를 극복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대통령의 성명으로 소집영장을 기다리던 청년들 사이에는 자진입대를 요청하는 인원이 증가하였고, 이들 중에는 “나는 화랑도 정신을 갖고 있다. 전쟁의 승리는 우리에게 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신명을 바칠 것이다”라는 혈서를 쓰고 지원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 무렵 미국정부가 새로운 부대를 창설하는 것보다 기존부대를 보충하는 것이 효과적인 방안이라고 강조함으로써 그 계획은 어렵게 되었다. 한국정부는 중공군과 맞서 싸우려면 많은 병력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하고 독자적으로 국민방위군을 설치하게 되었다. 국민방위군은 1950년 12월 21일 공포 실시된 ‘국민방위군 설치법’에 의하여 만 17세 이상 40세 미만의 제2국민병이었다. 병력 응모를 시작하자 순식간에 17세부터 40세까지의 장정들이 순식간에 50만 명을 넘어섰으며, 정부는 이들을 경남북도 일원에 51개의 교육대를 설치하고 수용하였다. 간부는 대체로 대한청년단 간부들로 구성되었다. 국방부와 육군본부는 국민방위군 사령관에 대한청년단 단장인 김윤근을 단번에 준장으로 임관시켜 임명하고 참모진을 구성하였다. 최소한의 기간요원만이 현역으로 임명되었고, 나머지 지휘관은 모두가 주로 청년단 출신에서 급조된 방위군 장교로 충당되었다.
경과
1·4후퇴 시기 전국 각지에서 창설 작업을 하고 있던 국민방위군은 지역별로 대구, 부산 등지로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사령부의 고급 간부들이 보급품을 부정으로 착복함으로써 급기야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영하의 기온에서 장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수많은 장정들이 식량과 피복을 지급받지 못해 곧바로 병력 1천여 명의 아사 및 동사자가 발생하였고 수 만 명이 영양실조에 걸려 이후 사망에 이르렀던 것이다(사망자 수는 9만여 명 이상으로 추산됨). 부당한 처우를 견디지 못한 국민방위군들은 집단탈출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사실이 국민들에게 알려지자 문제가 되기 시작하였다.
결과
의의와 평가
참고문헌
- 『대한민국사』제2권(한홍구, 한겨레출판, 2003)
- 『한국전쟁 (하)』(체한국 외, 국방군사연구소, 1997)
- 『국방정책변천사(1945-1994)』(국방군사연구소, 군인공제회, 1995)
- 『국방사』제2집(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87)
- 「국민방위군」(남정옥,『한국전쟁의 새로운 연구 제1권』군사편찬연구소,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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