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국 제3대 문왕(文王)대흠무(大欽茂)가 742년(문왕 6)에 국초 이래 수도였던 돈화분지(敦化盆地)에서 이곳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로 천도해, 755년(문왕 19) 무렵까지 발해의 정치 · 경제 ·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던 곳이다. 현재의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북고성촌(北古城村) 남동쪽으로 보고 있다.
중경현덕부의 위치 비정은 정약용(丁若鏞)의 후르하[虎里河] 서북인 액돈산(額敦山)을 비롯해, 나단포러[那丹佛勤], 화전현(華甸縣)의 소밀성(蘇密城)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었으나, 이 중 1915년 일본학자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가 주장한 길림성(吉林省) 돈화(敦化)로 비정하는 설이 가장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1933년에서 1934년에 걸쳐 일본의 동아고고학회(東亞考古學會)에서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를 발굴해 발해의 도성 규모가 밝혀짐에 따라 중경현덕부의 돈화설도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돈화분지의 여러 산성이나 소밀성은 규모가 너무 작아 발해왕국의 수도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1934년부터 상경용천부와 같은 규모의 도성 유지(遺址)를 찾으면서 두만강 북안에서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해란하(海蘭河) 기슭의 화룡현(和龍縣)서고성자(西古城子)라는 설이 유력해졌다. 서고성자는 도리야마 기이치[鳥山喜一] 등의 일본인들에 의해 1937년, 1943년, 1945년에 각각 발굴되었다. 도리야마 기이치 등은 발해의 중경현덕부임을 구체적으로 제기하였으며, 1942년 사이토 진베이[齋藤甚兵衛]가 조사하기도 하였다.
특히 1980년대 말 화룡현 서고성자 부근에서 문왕의 넷째 딸 정효공주묘(貞孝公主墓)와 완전한 석각 묘지(墓誌)가 출토되면서, 이 서고성자가 발해의 중경현덕부였다는 주장이 더욱 확실시되었다. 또한 이 성의 평면구조가 발해 도성이었던 상경성(上京城)이나 팔련성(八連城)과 거의 같다는 점과 성내에서 출토된 유물로도 고고학적으로 이 성이 서경성(西京城)이라는 사실을 더욱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서고성은 외성(外城)과 내성(內城)으로 되어 있는데, 외성은 장방형이며 동서 길이가 600m, 남북 길이가 720m이다. 내성은 외성 중간에서 북쪽에 치우친 곳에 위치해 있으며, 남북 길이는 310m, 동서는 190m이다. 내성에는 5개의 궁지(宮址)가 있고 3개의 궁지는 남북 중추선에 한 줄로 배열되어 있다. 최근에는 사이토가 1942년 무렵 입수했던 항공사진이 확인됨으로써 서고성지 및 그 주변의 하남둔 고성(河南屯 古城)과 인근 고분군들의 당시 모습까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중경현덕부에 소속된 주(州)로는 노주(盧州), 현주(顯州), 철주(鐵州), 탕주(湯州), 영주(榮州), 흥주(興州) 등 6개 주가 있었으며, 현주의 포(布), 노주의 쌀(稻), 철주의 속현(屬縣)인 위성의 철(鐵)은 발해의 주요 산업으로 당나라에까지 알려졌다.
문왕이 발해의 건국지인 ‘구국(舊國)’에서 중경현덕부로 천도한 것은 이 지역의 철을 비롯한 자원 개발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중경현덕부는 무도평원과 연길의 조양천평원 모두 관개에 편리하여 농업발전에 적합한 지역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 및 신라와의 외교교섭을 펼치는 데 있어서도 보완이 되는 곳이었다. 이러한 지리적 입지와 위상으로 인해 중경현덕부는 상경용천부와 더불어 발해의 중심 수도로서 기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