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은 자신 및 특정 대상(국가·임금·주인 등)에게 정성을 다해야 하는 도덕규범을 가리킨다. 공자는 인간의 모든 행위의 근본을 ‘충신’이라 하였고, 타인에 대한 경우에는 ‘충서(忠恕)’라 하였다. 법가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국가나 군주를 위해 자기의 능력과 정성을 다하는 충의(忠義)를 말하였다. 진한시대 이후의 중앙 집권 체제에서, 충은 효와 함께 중요한 덕목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신라 진흥왕대의 화랑도에서부터 충과 효가 뚜렷이 부각되고 있다. 현대적 도덕 가치로 볼 때, 충은 대상과 자신의 존재가 일체화되는 데까지 자신의 존재가 확대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조금의 속임이나 허식 없이 자기의 온 정성을 기울인다는 것으로서, 공자(孔子)는 인간의 모든 행위의 근본을 이에 두고 이를 ‘충신(忠信)’이라 하였다. 또한, 주로 타인에 대한 경우에는 이를 ‘충서(忠恕)’라 하였다. 이에 대해 주희(朱熹)는 “자기 자신을 온전히 실현하는 것을 충이라 하고, 그것을 미루어 타인에게까지 이르게 되는 것을 서(恕)라 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충신과 충서는 결국 동일한 정신이다. 충에는 다수의 사람 전체에 대하여 공평하게 성실을 다한다는 의미도 있다. 개인보다도 국가나 군주를 우선하는 법가(法家)의 사상에서, 충은 자신을 돌보지 않고 국가나 군주를 위해 자기의 능력과 정성을 다하는 충의(忠義)의 덕이 되었다.
충이 특정 대상에 대한 것일 때에는 이는 주로 신하가 임금에게 임하는 도리를 지칭한다. 『논어』 팔일편(八佾篇)의 “신하는 충으로써 임금을 받든다”라거나, 어느 정도 법가적 성격을 띠고 있는 『순자(荀子)』 신도편(臣道篇)의 “군주의 명령에 거슬리더라도 군주의 이익을 위하는 것을 충이라 한다”라는 언급에서 잘 나타나 있다.
중국에서는 특히 진한시대(秦漢時代) 이후의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 아래에서, 이런 의미의 충이 효(孝)와 병행하여 매우 중요한 덕이 되어 갔다. 당나라 때부터 정사(正史)에 충의열전(忠義列傳)이 씌어지기 시작하여, 충의에 투철한 인물들을 역사에 길이 표창하게 되었다.
또한, 『충경(忠經)』이라는 책이 있는데, 후한 시대 마융(馬融)의 저작이라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충의의 고양을 부르짖던 송나라 때의 저작일 것이라 추측된다.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충의 대상은 자신에서 시작하여 가정은 중간이요, 국가는 종착지라 하여 국가가 가장 크고 마지막 대상이 되고 있다.
둘째, 각자의 위치에서 해야 할 충의 도리로서, 백성에게 신망 있는 위정자의 충, 진실로 국가를 위해 희생적으로 직분을 다하는 관리, 즉 공직자의 충, 국법을 준수하고 효도와 우애를 다하며 생업에 충실한 백성의 충 등을 말하고 있다.
셋째, 효도를 행하는 이는 반드시 충을 귀중하게 여기며, 군자가 효도를 할 때는 반드시 먼저 충성을 하며, 충성을 다하면 복록(福祿)에 이른다고 한다. 사회적 규범으로서 충의가 이처럼 강조되고 있으나 흔히 규범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기도 한다.
곧, 중국 사회는 가족이 사회 조직의 기본으로 확인되고 있으며, 또한 왕조가 교체될 경우에 임금에 대한 충성(忠君)과 나라에 대한 사랑(愛國)이 반드시 일치되지 않는다는 점과, 충의와 효행 사이에 마찰이 있다는 점도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이에 대해 “충신은 반드시 효자의 문에서 나온다”라는 언명에서 그 일치성을 찾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효에 더 중점이 두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유교사상이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온 때를 한문자(漢文字)의 전래와 같이 본다면, 그것은 한사군 설치 이전까지 소급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역대로 충사상이 활용되었던 예를 보면, 그것은 효와 더불어 신라 진흥왕대(534∼576)의 화랑도의 교화 이념에서 비로소 뚜렷이 부각되고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중국의 유교경전을 교재로 하였던 삼국시대의 교육 기관에서 충효 정신을 함양시켰으며, 『삼국사기』 열전(列傳) 등에는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 · 온달(溫達), 밀우(密友)와 유유(紐由) 및 백제의 성충(成忠) · 흥수(興首) · 계백(階伯) 등의 충의정신이 높이 찬양되고 있다.
신라의 경우 『삼국사기』 열전에는 주로 화랑 출신인 김유신(金庾信) · 사다함(斯多含) · 관창(官昌) · 원술(元述) 등의 충절이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에도 이러한 충의정신은 그대로 계승되어 제6대 성종은 전국 12목(牧)에 경학박사(經學博士)를 두게 한 다음 전교(傳敎)를 내려 말하는 가운데, “재주를 품고 국량을 지녀서 군왕을 섬김은 충의 시작이요, 출세하여 이름을 드날림으로써 부모를 드러냄은 효의 마침이다”라고 하여, 충과 효를 아울러 권장하였다.
고려시대에 충절을 지킨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몽주(鄭夢周)와 길재(吉再)를 들 수 있다. 정몽주는 고려 말의 극심한 사회 혼란과 위태로운 국운을 지키려다 결국 목숨을 바쳤던 절개 높은 위인이며, 길재 또한 고려 말 국운이 기우는 것을 보고 관직에서 물러 나와 후진 교육에만 힘썼다.
그의 「고문영공실행기(高文英公實行記)」에는 “옛 사람들이 말하기를 충신은 반드시 효자가 나오는 가문에서 나오는 것이니 거기에서 구하라고 하였다. 따라서, 어버이에게 먼저 효도를 하면 자연히 임금에게 충성을 할 수 있게 되고, 임금에게 충성을 하면 부모에게도 효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대체로 충성과 효도는 마음 속에 고유하게 있는 것으로 병행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그의 충효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로부터 안향(安珦)에 의해 도입된 주자학은 조선 왕조가 고려를 대신하면서, 국가의 지도 이념으로 채택되었다. 조선 왕조는 건국과 동시에 도학(주자학)을 중심으로 정치의 도리와 교육의 원리를 추구하였다.
1431년(세종 13)에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충신 · 효자 · 열녀 각 35인의 행적을 그림으로 설명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간행하였는데, 이는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충효의 정신을 널리 보급시키고자 하는 데 그 목표가 있었던 것이다.
조선 시대를 통해 볼 때, 충의정신이 발휘되는 경우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첫째는, 왕조 찬탈의 경우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신조로써 꿋꿋이 절개를 지키는 경우이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을 내쫓고 즉위할 당시, 성삼문(成三問)을 비롯한 소위 사육신(死六臣)의 충절과 김시습(金時習)을 비롯한 생육신(生六臣)의 절의는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둘째는, 왜란 · 호란으로 국운이 위태로울 때라든지 외국과의 굴욕스러운 화친 관계를 맺어야 할 때와 같은 대외적인 관계에서 발휘되는 충의 경우이다. 왜란의 위기를 당해 이순신(李舜臣)이 지닌 충렬정신과 선비였던 조헌(趙憲)의 충의정신에 의한 의병 활동, 그리고 유정(惟政)의 승병 활동 등이 왜란 시의 대표적인 충의 발휘이다.
임진왜란을 겪고 난 뒤 퇴폐한 국민 도의를 바로잡기 위하여 광해군대에 심혈을 기울여 편찬하였던 『동국신속행실(東國新續行實)』은 주로 임진왜란 후에 표창된 인물들의 간략한 전기라 할 수 있다. 그 대상은 주로 우리나라의 수천 년간을 통해 효 · 충 · 열을 집대성한 것으로 남녀와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행실이 뛰어난 인물들을 수록한 책이다.
병자호란 당시의 인물로서는, 청나라와의 관계에 있어서 척화파(斥和派)와 주화파(主和派)의 대립이 계속되는 가운데 끝까지 척화 · 배청(排淸)의 태도를 고수하고 주체적인 사상 하에 북벌 계획에 주력하였던 김상헌(金尙憲)의 충절이 뛰어났다.
조선 말기로 내려오면, 저명한 성리학자 이항로(李恒老)가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대의를 주장하여 그 문하에서는 척사위정(斥邪衛正)과 창의호국(倡義護國)의 운동을 벌인 역사적인 중심 인물이 많이 나왔다.
이항로는 조광조(趙光祖)의 도학과 의리 정신에 많은 영향을 받아 조광조의 절명시(絶命詩) 중에서 “임금 사랑하기를 부모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근심하기를 집안 근심하듯 하였네(愛君如愛父 憂國如憂家)”는 구절을 선비의 기본적인 도리로 내세워 의리 사상을 이어왔다.
이항로의 사상을 이어받은 대표적 인물로는 최익현(崔益鉉) · 유인석(柳麟錫) 등 ‘충의’사상가들이 있다. 한일협약이 강제로 맺어진 뒤, 민영환(閔泳煥) · 최익현 등 많은 인사들이 그들의 애국과 충절을 유서에 남기고 스스로 생명을 끊었으며, 윤봉길(尹奉吉) · 안중근(安重根) 등 의사들의 장렬한 행위는 시대의 충의정신으로 찬양되었다.
역사적으로 충의정신의 발휘와 충절을 지켰던 인물들을 살펴보면, 충의의 선비 가운데 대부분이 고난을 무릅쓰고 순사(殉死)하였으며 편안히 일생을 마친 경우가 드물다. 그것은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다(不事二君)’는 배타적 충절만이 요구되어 왔으며, 또한 자기 희생을 통해 얻어지는 경지였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개인의 자아 의식을 강조하는 현대의 도덕적 가치 기준에서 볼 때 전통의 충절 정신과 행적은 현대인에게 괴리감을 심화시킬 수 있다. 여기에 충의 현대적 의의를 고찰해 볼 필요가 생긴다.
충(忠)이라는 글자의 형태, 즉 ‘중(中)’과 ‘심(心)’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충이 바로 속마음, 주체적 인격의 자리임을 말해 준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충을 강조하고 윤리 규범으로 확립해 왔던 것은 본질적으로는 인간으로서의 자기 발견을 추구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때 충이 단순히 국가 · 군주 등을 향한 상대적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과 자신의 존재가 일체화되는 데까지 자신의 존재가 확대되는 데에서 비로소 본질적 의미에서의 충이 실현된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