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벌론(北伐論)은 중원을 차지한 청나라를 정벌함으로써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 중화 질서의 재건을 모색한 조선 후기의 정치 담론이다. 조선 지배층은 청나라가 중원을 장악하자 큰 충격에 빠졌지만, 명나라가 회복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따라서 명나라의 회복에 적극 동참하자는 북벌론이 대두할 수 있었다. 특히 효종은 국가적 차원에서 북벌계획을 추진하였는데, 공세적 성격의 군비 확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북벌론은 명나라 회복의 가능성이 사라진 17세기 말 이후로는 주로 재야 인물들 사이에서 제기되었다.
1637년(인조 15) 청나라가 조선을 정복하고 뒤이어 중원을 차지하게 되자, 두 세기 넘게 유지되었던 명나라 중심의 중화 질서는 붕괴되고 말았다. 조선왕조의 경우 중화 질서의 정치적 안정성을 경험하였고 중화의 가치를 명에 버금가게 구비하였다고 자부해 온 전통도 오래되었다.
게다가 임진왜란 시기에 명의 군사적인 도움을 받은 사실에 대한 보은의 감정까지 더하여져 명의 멸망은 조선의 지배층에게 ‘하늘과 땅이 뒤집힌’ 참담한 사건이었다. 따라서 조선의 지배층은 당위적 질서와 현실이 괴리되는 모순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정치적, 사상적 모색을 추구하게 되었다.
조선의 지배층은 청에게 군사적으로는 정복되었지만 직접 통치되지는 않았다는 틈을 이용해서 청 중심의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를 정치적으로는 받아들이면서도 화이관에 입각한 명 중심의 중화 질서를 관념상으로는 포기하지 않는 이중적 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이중적 자세는 청의 중원 장악이 단시일 내에 종료될 것이며 명이 다시 회복되어 중화 질서도 복구되리라는 기대가 전제된 것이었다.
남명 정권의 존재는 이러한 기대의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머지않아 닥칠 당위적 질서의 복구에 조선은 어떤 방식으로 기여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고, 명의 회복에 무력으로 동참하자는 북벌론이 대두할 수 있었다.
소현세자의 급서 이후 정통성에 논란이 있는 채로 등극한 효종은 삼전도의 굴욕으로 추락한 국왕의 위엄을 되찾고 정국 주도력을 확보하려는 정치적 의도 속에서 친청파를 제거하고 이른바 산당(山黨) 세력들을 등용하고자 하였다. 반면 척화 계열로서 병자호란 후 낙향해 있던 산당 세력들은 다시 정계에 복귀할 정치적 명분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양자의 정치적 이해를 함께 충족시킬 수 있는 상징적 구호로서도 북벌론이 대두할 수 있었다. 효종의 북벌 의지 표명은 손상된 조선 국왕의 위엄이 회복되는 계기가 될 수 있는 동시에 새 조정에 대한 산당의 출사 명분을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북벌론은 효종에 의해 국가적인 차원의 북벌계획으로 구체화되었다.
효종은 원두표와 이완 등 친위 세력을 중용함으로써 군비 확충을 주도하였다. 구체적인 사례로는 수어청 개혁을 통한 남한산성 군사력 보강, 어영청의 확대 개편, 어영청 내 대포부대 창설, 금군의 편제 개편 및 확충, 영장(營將)의 삼남 파견, 강화도 해안가 진보(鎭堡) 설치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시책들은 대개 중앙군 강화에 치중되었거나 방어적 성격이 강하다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효종의 북벌계획은 국왕의 정국 주도라는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적인 성격을 함께 지녔다고 평가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또한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청나라가 조선의 사정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던 상황을 고려한다면 유의미한 공세적 성격의 계획 수립은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으며, 거듭된 자연재해와 흉년으로 인해 경제적인 여력도 부족하였다.
효종 즉위 직후인 1649년에 송시열이 올린 「기축봉사」에서 북벌의 당위성을 설파하면서도 시세와 우리의 강약을 살피고 청나라의 틈을 엿보면서 서서히 북벌을 준비하자고 하였던 것은 이런 사정을 송시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송시열이 보기에도 좀 더 시급한 것은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종의 강력한 의지로 추진되던 북벌계획은 재위 후반기에 들면서 백성들의 궁핍과 불만, 문 · 무신 간의 갈등, 김육을 비롯한 실무 관료들의 강력한 반대까지 일으키면서 효종을 정치적인 고립 상태로 몰아넣었고, 북벌계획의 추진 동력은 점차로 상실되었다. 효종은 중망(衆望)을 받던 송시열을 중용함으로써 이 난국을 타개하고자 했지만, 곧이어 효종이 승하하자 북벌계획은 중단되었다.
효종 승하 후 중단되었던 북벌계획은 현종 말과 숙종 초 삼번의 난을 계기로 잠시 부활되었는데, 이를 주도한 인물은 남인 산림 윤휴였다. 하지만 이때의 북벌계획 역시 출사 명분과 존재감을 부각하려던 윤휴의 정치적 의도가 투사된 결과였다고 이해되며, 그나마도 현실성이 없다고 같은 남인에게까지 비판되었다. 결국 그가 실세하자 논의는 금세 사그라졌다.
북벌론은 청의 중원 지배가 반드시 종식될 것이라는 희망 섞인 전망을 전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명 정권이 몰락하고 삼번의 난이 진압되어 청의 중원 지배가 확고해지는 17세기 말 이후로는 태생적으로 사그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명이 멸망한 지 60년이 되는 1704년(숙종 30)에 좌의정 이여가 정세의 변화를 근거로 이제는 북벌을 논할 수 없다고 고백한 것은 이 점을 잘 보여 준다.
결국 명의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점점 명확해지는 17세기 말 이후로 조선 지배층이 조선왕조를 중화의 유일한 계승자로 여기는 관념상의 방식을 새롭게 고안하게 되자, 북벌론은 주로 재야 인물들 사이에서 제기될 뿐이었고, 대부분의 조선 지배층에게는 잊지 말고 기념해야 할 가치를 지닌 정신적 유산으로 여겨졌다.
북벌론이 중화 계승 의식, 대명 의리론과 상호 표리를 이루면서 일체화되었던 사상적 경향에 균열이 생기면서 18세기 이후 중화 계승 의식과 대명 의리론으로부터 북벌론이 분리되는 경향이 나타난 것은 자연스러웠다. 18세기 후반 북학론의 등장은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