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5부의 하나로 추정되는 동부(東部) 출신이다. 244년과 245년의 두 차례에 걸친 조위(曹魏)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의 침입으로 고구려의 동천왕은 국도인 환도성(丸都城 : 지금의 集安縣山城子山城)을 함락당하고 멀리 남옥저(南沃沮 : 지금의 咸興)까지 피신하였지만, 계속적인 위군의 공세로 말미암아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 때 유유는 밀우(密友)와 같이 위군의 진영에 가서 항복을 청하는 척하면서 위의 지휘관을 살해하고 함께 죽음으로써, 고구려가 위군에 대한 일대 반격을 가하여 위군을 패주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관구검의 고구려 침입기사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지(三國志)』 위서 제왕방기(齊王芳紀),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에는 246년 한 차례 침공으로 되어 있으나, 『삼국지(三國志)』 위서 관구검전과 『삼국지(三國志)』 동이전 및 『북사(北史)』 고려전에는 244년과 245년 두 차례 침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관구검군을 격퇴시킨 뒤 고구려는 유유에게 구사자(九使者 : 大使者의 오기로 추정됨)를 추증하였고, 그의 아들 다우(多優)도 대사자(大使者)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