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묘왜변의 배경은 조선과 일본 사이의 외교 관계가 원활하지 못한 점과 일본 국내 사정의 혼란에서 일어났다. 조일 관계에서 보면 1544년(중종 39) 왜인들의 약탈로 야기된 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으로 조선에서는 그들의 내왕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대마도주(對馬島主)의 사죄와 통교 재개 허용을 바라는 간청을 받아들여 1547년(명종 2) 정미약조(丁未約條)를 맺고 왜인들의 내왕 통교를 허용하였다. 정미약조는 결과적으로 왜인들의 위반 정도에 따라 통제가 강화된 내용이었다.
그러므로 이전까지 너그럽게 취급해 주던 조선측의 방침은 강화되었으며, 왜인들의 내왕무역에 대해서도 통제 규정이 강화되어 여러 가지 규제가 뒤따랐다. 따라서, 종전처럼 왜인들은 무역의 실리만을 추구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일본측의 사정으로 보아도 16세기에는 전국적으로 호족들이 세력다툼을 하면서 싸우던 전국시대로서 국내 혼란이 더욱 심해지던 때였다. 이에 일본 국내 통치를 해오던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 또는 足利幕府)의 중앙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약 1세기간의 혼란기에 접어든 때였다.
이로써 일본의 서부 지방에 사는 연해민들이 이웃인 우리 나라와 명나라에까지 침입해 노략질하면서 국제 관계가 순탄치 못하였다. 이와 같은 혼란은 도요토미(豐臣秀吉)가 전국시대를 통일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을묘왜변은 이와 같은 환경 속에서 왜구의 약탈 가운데 규모가 큰 것이었다.
이 사건은 1555년 5월에 왜구가 선박 70여척으로 일시에 전라남도 남해안 쪽에 침입하면서 일어났다. 그들은 이어 달량포(達梁浦)로 계속 침입해 성을 포위하였다. 또한 어란도(於蘭島)·장흥·영암·강진 등 일대를 횡행하면서 약탈과 노략질을 하였다.
이 때 왜구를 토벌하다가 절도사 원적(元積), 장흥부사 한온(韓蘊) 등은 전사하고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은 포로가 되는 등 사태가 매우 긴박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호조판서 이준경(李浚慶)을 도순찰사, 김경석(金景錫)·남치훈(南致勳)을 방어사(防禦使)로 임명, 왜구를 토벌하고 영암에서도 왜구를 섬멸하였다.
이렇게 침입한 왜구를 토벌하고 대마도주에게는 무역 통제를 더욱 강화하면서 강경책을 썼다. 그러자 그 해 10월에 대마도주 소(宗義調)는 약탈하고 만행한 왜구의 목을 잘라와 사과하며 세견선의 증가를 간청해 왔다.
이에 조선에서는 대마도의 생활 필수품을 돕고자 식량 사정 등을 고려해 그들이 내왕무역을 할 수 있도록 세견선 5척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일본내의 혼란은 더욱 심해 왜구의 침입은 여전했으며, 도요토미가 통일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와 동시에 왜구의 침탈은 대규모적인 임진왜란으로 이어져 조일 양국간의 통교는 파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