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3월 근대적인 「재판소구성법」이 공포되고, 그 해 5월 개항장 재판소 설치가 공포되었다. 이에 따라 감영·유수영(留守營) 및 기타 지방 관아에서 행하던 재판 사무를 폐지하고, 각 해당 재판소에서 수리(受理), 심판하게 되었다.
개항장 재판소의 판사는 부윤을 겸한 감리였는데, 근대화에 따른 시대적 요청에 따라 개항장과 개항장 내의 섭외통상사무, 그리고 대청(對淸)·대로(對露) 육로통상관계 사무 등을 처리하기 위해 이를 제도화한 것이다.
1899년 5월 규정된 재판소는 지방재판소·한성부 및 각 개항시장재판소·순회재판소·평리원(平理院)·특별법원 등 5종류였다. 이와 같이 각 개항장과 개시장의 재판소는 한성부의 그것과 동일하였다.
설치 지역은 인천·부산·원산 이외에 한성·경흥(慶興)·무안·삼화(三和)·창원·성진·옥구 등이었다. 재판소의 관할 업무는 민사·형사 사건을 모두 취급하였는데, 특히 외국인과 관련된 민사사건도 처리할 수 있었다.
이때 재판권은 단석 판사가 가졌다. 다만, 각 재판소에 2인 이상의 판사를 둘 때에는 단석 또는 합석이 가능하나, 합석의 경우 수석 판사가 재판을 선고하고 이들 사이에 의견이 다를 때에는 수석 판사의 견해에 따르도록 하였다.
관원으로는 판사·검사·주사·정리 등을 두도록 하였으나 재판소의 규모에 따라 약간씩 달랐다. 특이한 것은 판사나 검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규정하여 사법관 시험을 거친 자로서, 칙임관(勅任官)은 황제의 임명에 의하고, 주임관(奏任官)은 법부대신이 추천, 상주하여 임명한 것이다.
개항장이 증가하면서 개항장 재판소도 점차 증설되었다. 따라서, 종전에 해당 군에서 수리(受理)하던 소송 문서나 죄수까지도 취급하게 되었다. 1900년 창원·성진·옥구항과 평양에, 1904년 용천·의주 등에 13개의 개항장·개시장재판소가 설치되었다.
이 가운데 한성·평양·의주의 3개소만이 개시장재판소이며, 모두가 개항장 내에 국한해서 재판권이 부여되었다. 따라서, 개항장이 설치되기 이전까지 해당 군에서 취급하던 재판 관계 문서 일체를 개항장 재판소로 이관하였다.
그런데 을사조약 이후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1906년 10월 감리서가 폐지되면서, 각 개항장·개시장 재판소 및 지방 재판소의 위치와 관할 구역이 변경되었다. 그리고 1907년 3월 개항장·개시장 재판소의 판·검사의 사무 처리 규정이 변경되었다.
판사가 유고시에는 해당 부(府)의 참사관 또는 주사로 하여금 사무를 처리하게 한 반면, 검사가 유고시에는 해당 부의 주사 또는 총순(摠巡)으로 하여금 담당하게 하였다. 또한, 주사가 판사서리가 되면 검사서리를 겸할 수 없게 하였다.
순회 재판소의 세칙은 7개 항목으로 되어 있으며, 1900년 10월에 공포되었다. 순회재판소 판사가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는 각 개항장·개시장재판소 또는 지방재판소에 임하여 각각 판사의 직무를 행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순회 재판소 판결에 불복할 경우, 다른 순회 재판소 판사가 이를 접수, 처리함을 요한다고 하여 개항장·개시장 재판소가 협조할 것도 아울러 규정하였다.
이어 각 지방 및 개항장·개시장 재판소에 사무의 다소에 따라 통역관 또는 통역관보 1인을 두도록 하였다. 이 때 통역관은 주임이며, 통역관보는 판임(辦任)으로 판사와 검사의 지휘를 받아 재판에 관한 통역 사무에 종사하게 하였다.
이들의 임면과 징계는 법부대신이 행하도록 하였는데, 반포일인 1907년 3월 22일부터 효력을 발생하였다. 그리고 칙령에 따라 이들은 각 도와 부의 통역관 및 통역관보를 겸임하게 하였다.
이어 개항장·개시장 재판소 판사의 임명 관계를 보면, 1차 임명은 감리이고 2차 임명은 부윤이며 3차 임명은 판사이다. 그러나 새로운 개항장이 설정되어 감리서가 설치될 때에는 해당 지방 부윤이 감리로 임명되는 경우가 많아, 판사까지 겸임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부윤이라 하더라도 감리로 공식적으로 임명되는 경우에는 감리 겸 부윤이라 하였다. 그런데 감리가 개항장 재판소의 판사를 겸하는 것이 통례였던 것 같다.
개항장은 외국인 관계가 주된 임무였다. 그런데 감리서의 감리가 최고 행정책임자로서 내외의 사무를 처리하였기 때문에, 개항장 재판소 판사도 어디까지나 개항장 내의 직무를 처리하는 하나의 방편이었다.
이는 지방 제도와 지역 형편에 따라 관찰사와 지사에게 개항장에서의 대외 관계 사무를 분산시켜 섭외 사무를 처리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개항장 내의 소송 사건을 심의하면서 외국과의 일원화를 위하여 감리가 판사직도 겸하였다.
해임은 임명을 받고 임지(任地)에 부임하지 않거나 교섭상에 잘못을 저질렀을 때, 1차적으로 감리직, 2차적으로 부윤직, 3차적으로 판사직에서 면직되었다. 이상과 같은 근대적 재판소 조직을 갖춘 개항장재판소는 대외 관계 사무 처리를 위한 창구 구실을 하면서 1905년 일제의 침략으로 외교권을 강탈당할 때까지 유지·존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