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밀양(密陽). 초명은 손응구(孫應九), 그 뒤 손규동(孫奎東)으로 고쳤으며, 일본 망명 때에는 이상헌(李祥憲)이라는 가명을 썼다. 호는 소소거사(笑笑居士), 도호(道號)는 의암(義菴). 동학교도들은 성사(聖師), 천도교 제3세 교주, 교종(敎宗) 의암성사 또는 후천황씨(後天皇氏)라고도 불렀다. 충청북도 청원 출신. 손두흥(孫斗興)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둘째부인 최씨이며, 방정환(方定煥)은 사위이다.
어린 시절부터 자기와 같은 약하고 불우한 사람을 도우려는 마음이 자라났다. 가난 속에서도 호방한 기질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고 의리도 남달리 뛰어났다.
12세 때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관청에 공금을 내려고 가다가 눈길에 쓰러진 사람의 구휼비로 지급하는가 하면, 옥에 갇힌 친구 아버지의 석방을 위해 친구에게 자기 집의 돈 있는 곳을 알려줘 그 돈으로 친구 아버지를 풀려나게 한 적도 있었다.
22세 때인 1882년(고종 19) 큰조카인 손천민(孫天民)의 노력으로 평등사상을 내세운 동학에 입도하였다. 입도 3년만에 제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착실한 신도가 되었다. 이 사이에 동학의 교세는 날로 확산되었다.
1892년에는 최시형 등 간부들과 함께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전개했고, 동학대표 40여 명은 서울 광화문 앞에서 복합상소(伏閤上疏)를 하며 척왜척양(斥倭斥洋)을 부르짖었다.
그들은 다시 충청북도 보은군 장내(帳內)에 모여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왜척양’ 등 정부에 대한 본격적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최시형의 참모로서 크게 활약하였다.
이 무렵 정부의 부정부패는 심화되었으며, 특히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과 가렴주구에 대항해 동학접주 전봉준(全琫準)이 남접(南接) 산하의 동학교도들과 함께 일대 항쟁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남·북접의 관계가 미묘해지자 최시형은 타협 조절을 대도소(大都所)에 맡겼다. 손병희는 두령으로서 대도소장 김연국(金演局) 등과 함께 남접에 대한 성토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오지영(吳知泳)의 중재로 1894년 보국안민의 기치 아래 타협해 갈등은 해소되었다.
그 뒤 김연국의 뒤를 이어 북접통령(北接統領)이 되어 통령기(統領旗)를 받고 공주전투 등 항일구국전선에 나섰다. 또한 북접 산하 동학교도를 지휘, 통솔해 논산에서 남접의 전봉준과 합세하였다. 그러나 공주 우금치전투(牛金峙戰鬪)에서 패배해 남접과 헤어졌다.
이 후부터 최시형과 함께 충주 부근에 이르렀으나 12월 14일 개별적으로 행동하기로 하고 해산하였다. 그 뒤에 최시형과 손병희 등 주요 간부들은 관군의 추격을 받았으나 생존한 북접 간부들의 노력으로 교세는 명맥을 유지하였다. 특히 탄압의 손길이 적게 미쳤던 함경도와 평안도 지방으로 피신해 그곳의 교세 확장, 포교에 힘썼다.
최시형에게 성실한 생활태도와 지략의 역량을 인정받아 의암이라는 도호를 받았다. 1897년 12월 24일 실질적인 제3세 교주로서의 일을 맡게 되었으며, 최시형이 체포되어 서울 감옥에서 처형된 뒤에는 마침내 교주가 되었다.
교주가 된 뒤에는 먼저 두령이 참석한 데서 설법식(設法式)을 거행하고 이후 여러 지방을 돌며 동학의 재건에 진력하였다. 공주전투에서 패배한 뒤 포교가 사실상 불가능해지자 세계사정을 살피고 동학재건 구상을 위해 미국 시찰을 계획하였다.
1901년에는 동생 손병흠(孫秉欽)·이용구(李容九)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대판(大阪)에 머물렀다. 그러나 간신배들의 책동이 두려워 그 해에 상해(上海)로 가서 수 개월을 지내며 미국행을 시도했으나 좌절되고, 다시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일본에 이미 망명해 있던 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조희연(趙羲淵)·이진호(李軫鎬)·박영효(朴泳孝) 등과 만났으나, 가명을 썼으므로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망명생활 중 본국과 연락하면서 교세의 재건에 힘쓰면서 교도들에게 새로운 문명학술을 배우게 하고자 일본유학을 알선해 유학생이 상당히 나왔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국내의 교도들에게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게 하여 조직체계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교도의 교양을 위해 「삼전론(三戰論)」을 발표하고 의정대신과 법부대신에게 글을 보내어 정치개혁을 주장하였다.
진보회는 지방회원이 11만명에 달하는 큰 단체로 발전했지만, 그동안 태천(泰川)의 관치사건(串侈事件) 등으로 많은 회원이 참살, 익사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급속도로 발전, 390여 개의 지회조직을 비롯해 30여 만명이 단발(短髮)을 실천하는 등 생활개선에 앞장서 관민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이 단체가 동학교도인 것을 알게 되자 정부에서도 1894년 동학농민봉기 당시를 생각해 일본측과 교섭, 이를 탄압하므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또한 일제는 이토[伊藤博文] 등이 친일세력을 기르기 위해 조직한 유신회(維新會)의 송병준(宋秉畯)과 합세해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다가, 진보회가 확대되자 손병희의 지령을 배반한 이용구와 합병함으로써 진보회의 혁신운동은 실패하였다.
나아가 친일화함으로써 정부개혁과 일본과의 동맹을 체결하고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여 전승국의 일원으로 행동하려던 본래의 목적은 실패로 끝나고, 갑진혁신운동도 실패를 면하지 못하였다.
이용구의 동학 배반과 친일추구화를 나중에야 알고서 이용구 일파를 동학교에서 축출하는 한편, 동학의 이용을 막기 위해 정교분리(政敎分離)와 사후대책을 강구하였다.
먼저 동학포교 46년 12월 1일 『동경대전(東經大全)』의 ‘도즉천도(道則天道)’를 인용해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면서, 동학의 참신한 정신을 되살리며 본래의 종교운동으로 되돌아갔다.
이 때 동학의 본지(本旨)인 ‘인내천사상(人乃天思想)’을 일깨워, 사람이 곧 하늘이니 지금의 세상이 이와 같이 혼란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 혼란한 때문이라면서 먼저 사람의 마음을 고쳐 안정시켜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이어서 우리 도(道)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의 도라, 후천개벽은 인심개벽(人心開闢)에서 시작되는 것이요, 인심개벽은 정신개벽에서 시작되는 것이니 정신개벽은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천도(天道)를 잘 행하는 데 있는 것이라 하였다.
이어서 이용구 등 친일 배교분자(背敎分子)들의 매국행위를 보고 1906년 1월에 일본에서 귀국해, 2월 16일에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을 반포하고 천도교 중앙총부를 서울의 다동(茶洞)에 설치하였다.
이미 천도교를 선포할 때 오세창 등을 6임소(任所)에 임명했고, 자신은 대도주(大道主)의 직무를 겸무하며, 교도를 설교하고 일요일을 시일(侍日)이라 정해 시일식(侍日式)을 거행하였다.
귀국 후 천도교의 조직과 교세 확장에 힘쓰며 친일 배교한 이용구 일파까지도 회유 시켜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용구는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진회에 속한 천도교인들의 포섭공작을 펴면서 손병희를 중상모략하며 천도교의 파괴를 꾀하였다.
이에 일제를 배경으로 하는 일진회와 맞서는 것이 여러모로 불리함을 깨닫고, 1906년 9월 17일 자신이 가장 신임하고 재정문제까지 맡아 처리하던 이용구 이하 62명에 대해 동학으로부터 출교처분(黜敎處分)을 내렸다.
이들은 손병희의 망명기간 중 재정권을 거의 위임받아 처리했기 때문에 동산·부동산이 그들의 명의로 되어 있었고, 이로 인해 타격이 컸다. 이에 정교 분리를 내세워 오직 종교활동만을 전개하기로 하고, 당면한 재정난은 교도들이 한줌의 쌀을 내는 성미법(誠米法)의 제정을 통해 타개책을 모색하였다.
1911년 4월 일제가 성미의 염출마저 금지시키는 탄압을 받았으나, 교도의 자발적인 특별의연금으로 보충시켜나갔다. 1914년 3월에는 무기명성미제가 실시되어 재정상태는 호전되었으며, 이는 3·1운동 때 운동자금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한편, 천도교에서 쫓겨난 이용구·송병준 등 친일파는 시천교(侍天敎)를 만들어 일제의 비호를 받으면서 적극적으로 활동을 폈다. 이에 비해 천도교는 교세도 약화되었고 재정도 궁핍하였다.
이에 1907년 손병희는 일선에서 물러나고 대도주의 직을 김연국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나 김연국은 대도주의 직을 지닌 채 평소 비난하던 시천교의 대례사(大禮師)로 취임하였다. 이렇게 되자 손병희는 1908년 1월, 박인호(朴寅浩)에게 대도주의 직을 맡게 하였다.
손병희는 일본망명 중 민족혼을 일깨우고 독립정신을 함양시키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임을 깨달았다. 귀국 후 먼저 보성학교를 비롯해 합동소학교(蛤洞小學校)·광명소학교(光明小學校)·석촌동소학교(石村洞小學校) 등에 정기적인 보조와 일시적인 보조를 하여 학교폐쇄를 면하게 하였고, 또 문창보통학교(文昌普通學校)에도 관계하였다.
또한 여자교육기관인 동덕여자의숙(同德女子義塾)을 돕고 보성학원을 인수, 경영하였다. 1914년 말에는 동덕여자의숙의 경영권도 인수하였다. 이 밖에도 지방에는 대구의 교남학교(嶠南學校)·일신보통학교(日新普通學校), 청주의 종학학교(宗學學校) 등 7, 8개교에 관계하였다.
또한 최석창(崔錫彰)·민건식(閔建植) 등의 도움을 받아 출판기관으로 주식회사 보문관(普文館)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 시설은 사기사건에 연루되어 경무총감부에 계류되었다.
1910년 초 사동(寺洞) 중앙교당 옆에 창신사(彰新社)를 설립해 『천도교월보』 제1호를 내고 뒤이어 보성사와 병합해 보성사로 하고 시설을 확충하였다. 한때 일제의 탄압으로 운영난이 심각했지만 잘 극복하였다.
1910년 우리 나라를 강점한 일제가 일진회의 활동을 금지, 해산시키자 시천교도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또한 일제는 천도교의 교세 확장을 막기 위해 손병희를 헌병대에 소환하고, 천도교의 재원인 성미법을 폐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손병희는 포교에 더욱 힘쓰고 교당 건립에 진력해 4월 5일의 천일기념일(天日紀念日), 8월 14일의 지일기념일(地日紀念日), 그리고 12월 24일의 인일기념일(人日紀念日)의 3대 행사에는 시일식을 마치고 축연을 베푸는 등 더욱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대안동(大安洞) 중앙교당이 성립되었다. 일제의 탄압이 더욱 혹독해져 갔지만, 우리의 민족의식은 더욱 높아졌다. 이러한 가운데 천도교측에서도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16년에 이미 천도교도 중 민중봉기를 건의한 신도가 있었고, 1917년에도 같은 건의가 있었다.
1918년 민족자결주의의 영향과 연합국의 승리에 의해 국제정세가 한국독립에 유리해졌다. 이에 권동진·오세창과, 1919년 일본 동경(東京)의 2·8독립선언에 접한 최린(崔麟)·권동진·오세창이 협의하면서 독립운동을 거국적으로 벌이기로 하였다.
손병희는 천도교측의 대표로 3·1운동의 주동체로 참가, 그 해 1월 20일경 권동진·오세창·최린 등과 함께 독립운동은 대중화해야 하고, 일원화해야 하며, 비폭력으로 진행하기로 합의하였다. 구체적 방법과 진행은 권동진·오세창·최린·정광조(鄭廣朝)에게 일임하였다.
1919년 2월 27일 밤 천도교 직영의 보성사에서 독립선언문 2만 1000매를 인쇄, 이튿날 가회동 자신의 집에 민족대표 23명이 모여 다음날 거사를 재확인하였다. 그리고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할 경우의 불상사를 염려해 파고다공원 부근 태화관에서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하였다.
3월 1일 기념식을 거행한 뒤 일본경찰에 자진 검거되어 1920년 10월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1년 8개월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나 상춘원(常春園)에서 치료하였다.
논저로는 「수수명실록(授受明實錄)」·「도결(道訣)」·「명리전(明理傳)」·「천도태원설(天道太元說)」·「대종정의설(大宗正義說)」·「교(敎)의 신인시대(神人時代)」·「무체법경(無體法經)」·「성심신삼단(性心身三端)」·「신통고(神通考)」·「견성해(見性解)」·「삼성과(三性科)」·「삼심관(三心觀)」·「극락설(極樂說)」·「성범설(聖凡說)」·「진심불염(眞心不染)」·「후경(後經)」·「십삼관법(十三觀法)」·「몽중문답가」·「무하사」·「권도문」·「삼전론」 등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