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기 후반경에 국사(國事)를 총괄하는 관직으로 성립되었으나,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집권 이후 고구려의 정치 · 군사 양권(兩權)을 장악하고 국정을 전담하는 최고의 관직이 되었다. 즉, 당나라의 중서령(中書令)과 병부상서(兵部尙書)의 직을 겸임한 것과 같은 직책이었다.
막리지의 성격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 고구려 제1위 관등인 대대로(大對盧)와 동일한 것으로 대대로를 통칭하여 막리지로 불렀다는 주장이 있다. 또, 막리지는 제2위 관등인 태대형(太大兄)의 별칭(別稱)이라는 견해도 있다. 즉, 고구려 말기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세력이 대두될 때 보다 강력하게 권력을 집중시키기 위해 전통적 권위의 상징인 대대로 대신 태대형을 개조, 활용하여 막리지로 하고 병마와 인사를 장악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막리지는 대대로로서, 본래 다수의 막리지가 3년을 임기로 교체하며 국사를 총괄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러한 막리지 중 한 사람인 연개소문이 정변에 성공한 뒤 국사뿐 아니라 병마권(兵馬權)도 장악하고 종신 막리지로 있으면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부터 이 초월적인 권한을 가진 막리지는 대막리지(大莫離支)라고 하여 다른 막리지와 구별하는 명칭을 쓰게 되었으며, 그 뒤 그의 아들대에는 그 위세를 더욱 과시하기 위해 태대막리지(太大莫離支)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막리지는 사료상으로는 대대로와 태대형에 모두 대응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대대로는 『한원(翰苑)』의 기록에 의하면 1인인 것과 달리 막리지는 다수의 존재로 나타나고 있다. 집권적 성격의 막리지가 다수라는 점은 이 시기 귀족 연립 정권의 성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막리지의 권력이 『당서(唐書)』의 기록 및 연개소문의 경우를 통해서도 군사권의 장악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각 귀족 집단들이 독자적으로 거느리고 있던 사병은 빈번한 대외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일정하게 공적인 군사 조직 안으로 흡수 · 개편되어 갔다. 때문에 귀족 세력의 정쟁(政爭)에서 공적인 군사권을 장악한 사람이 보다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을 것이며, 이러한 이유로 막리지는 고구려 후기의 중심적 권력체로 부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