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와 조선의 국가 운영은 기본적으로 3성 6부제(三省六部制) 또는 의정부(議政府) 6조(六曹) 체제 등 관료제(官僚制)상의 정규 관부를 통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들 정규 관부는 정해진 업무가 있어 이를 벗어난 국정의 다양한 사안을 처리하기는 어려웠다. 도감(都監)은 이처럼 정규 관부가 담당하기 어려운 국정의 긴요한 사안을 처리하도록 할 목적으로 필요할 때마다 설치 운영하였다.
고려는 건국 초기에 태봉(泰封) 제도를 계승하여 광평성(廣評省) 및 내봉성(內奉省)을 설치하고 태조가 내의성(內議省)을 두어 국정을 운영하였다. 982년(성종 1) 중국 제도를 수용하여 3성 6부제를 수립하여 이러한 관료제를 바탕으로 국가를 운영하였다.
이들 관료 기구들은 정규 관부로서 국가 운영과 관련하여 분업화되고 정해진 업무가 있었다. 그러나 국가의 운영은 정규 업무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규 관부가 처리하기 어려운 국정의 사안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고려는 이를 처리하기 위해 도감을 설치하였다. 도감은 정규 관부가 다루지 못하는 국정의 긴요한 사안이 생길 때에 설치하여 업무를 담당하도록 했다가 일이 끝나면 폐지하는 임시 관부였다. 다만 이들 중에 일부는 상시적으로 운영할 필요가 있었고 그런 경우에는 상설 관부로 운영하기도 하였다. 도감의 설치와 폐지는 재추(宰樞)의 회의와 국왕의 결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고려의 임시 관부는 도감으로만 명명되지 않았다. 『고려사(高麗史)』 백관지(百官志)의 제사도감각색(諸司都監各色) 조항은 고려시대에 설치, 운영된 임시 관부를 기록한 것인데, 도감 · 사(司) · 색(色) · 방(房: 坊) · 원(院) · 고(庫) · 점(店) · 직(直) 등을 비롯한 19개 종류의 109개 관부가 있다.
도감의 관원은 대체로 사(使) · 부사(副使) · 판관(判官) · 녹사(錄事)로 구성되었으나 고려 후기에 도감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사 위에 판사(判事)가 추가되었고 제조(提調)가 설치되는 경우도 있었다. 판사와 제조, 사와 부사는 주로 정규 관부의 관료들이 필요시에 겸임하여 업무를 처리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판관과 녹사는 권무직(權務職: 임시직)으로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품관권무(品官權務), 갑과권무(甲科權務), 을과권무(乙科權務), 병과권무(丙科權務), 잡권무(雜權務)로 구분되었다. 이들 권무직은 도감에 머물며 업무를 처리한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관부로는 격식(格式)과 제도의 문제를 논의했던 식목도감(式目都監), 무신정권(武臣政權)의 권력 기구였던 교정도감(敎定都監), 토지의 지급 업무를 담당했던 급전도감(給田都監), 권세가(權勢家)가 빼앗은 토지나 노비로 삼은 농민을 원래대로 돌리는 일을 했던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 잘못된 정치를 개혁하는 일을 했던 정치도감(整治都監) 등의 도감이 있었다. 또 재추가 모여 국정의 중대사를 논의했던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말에 관한 업무를 담당했던 전목사(典牧司), 광군(光軍)의 조직과 운영을 담당했던 광군사(光軍司), 변경의 군사 문제를 논의했던 도병마사(都兵馬使) 등의 사, 관리의 전주(銓注: 인물을 심사하여 적절한 자리에 배정하는 일)를 담당했던 정방(政房), 승지(承旨)들의 근무 공간인 승지방(承旨房) 등의 방(房)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961년(광종 12) 수영궁궐도감(修營宮闕都監)을 설치한 것을 계기로 임시 관부의 운영이 시작되었다. 임시 관부의 운영은 3성 6부의 관료제가 안정적으로 운영되던 고려 전기와 비교하여 무신정권기에 숫자가 늘어났고, 몽골 복속기 이후에는 무분별하게 설치되어 정규 관부의 기능을 침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 말에 도당(都堂)과 6부를 중심으로 관료제를 다시 정비했던 것도 임시 관부의 숫자가 많아 정규 관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고려 말에 설치되어 있던 도감을 상당 부분 제거했기 때문에 건국 직후 6전(六典) 체제 중심의 관료제를 선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도성(都城)이나 궁궐의 건축, 제도나 법전의 정비 등과 같은 긴요하고 중대한 사안을 처리하기 위해 도감을 운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1392년(태조 1) 공신도감(功臣都監)의 설치를 시작으로 도감을 설치, 운영하였다. 하지만 도감 운영의 폐단이 계속 언급되고 이러한 논의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반영되면서 대부분의 국가 업무는 정규 관부에 편입되고 도감은 제한된 업무에 한정하여 설치, 운영하게 되었다.
양란(兩亂) 이후 비변사(備邊司)를 중심으로 국가가 운영되자 국정의 다양한 사안에서 도감의 역할과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었다. 그러나 다시 국가가 안정되면서 도감은 주로 왕실 업무를 처리하기 위한 기구로서 위상을 정립해 갔고, 이러한 경향은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관료제가 전면적으로 개편되는 상황에도 유지되어 조선 말까지 계속되었다. 1928년 순종(純宗)의 신주를 종묘(宗廟)에 옮기기 위해 설치한 부묘도감(祔廟都監)을 마지막으로 도감은 없어졌다.
조선의 도감은 사안에 따라 다양하게 설치, 운영되었다. 왕실 의례와 관련하여 왕과 왕비의 장례를 담당했던 국장도감(國葬都監), 왕실의 능침(陵寢)을 옮기는 일을 맡았던 천릉도감(遷陵都監), 왕과 왕비의 빈전(殯殿) 설치와 운영을 담당했던 빈전도감(殯殿都監), 국왕이나 세자, 세손의 가례(嘉禮) 업무를 담당했던 가례도감(嘉禮都監), 왕실 인물을 책봉하는 의례를 담당했던 책례도감(冊禮都監) 등이 있었고, 토목 및 건축과 관련하여 궁궐의 조성을 담당했던 궁궐조성도감(宮闕造成都監), 도성의 건축을 담당했던 도성수축도감(都城修築都監), 개천(開川) 공사를 위해 설치했던 개천도감(開川都監) 등이 있었다. 그 외에도 공신(功臣)의 공로를 기록하는 일을 담당했던 녹훈도감(錄勳都監), 중앙 군영의 하나로 운영했던 훈련도감(訓鍊都監) 등 다양한 도감이 설치 운영되었다. 이들 도감은 기본적으로 임시 관부로 운영되는 것이었으나 상설 관부로 운영된 훈련도감과 같은 도감들도 있었다.
도감의 관원은 처음에는 고려의 제도를 준용하다가 점차 제조(提調) · 도청(都廳) · 낭청(郎廳) · 감조관(監造官)의 형태로 정립되었고, 이후 도청 · 낭청 · 별청(別廳)의 구조로 개편, 운영되었다.
고려와 조선의 도감은 정규 관부가 담당하기 어려운 국정의 긴요한 사안을 처리하는 임시 관부였다. 국정 운영의 편의성 때문에 남설되어 정규 관부의 기능과 위상을 침해하는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국가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필요한 기구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