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도감 ()

고려시대사
제도
고려 후기, 무신 집권 하의 최고 권력 기관.
이칭
이칭
교정소(敎定所)
제도/관청
설치 시기
1209년(희종 5) 4월
폐지 시기
1270년(원종 11) 5월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교정도감은 고려 후기의 무신 집권기 최고의 권력 기관이다. '교정소(敎定所)'라고도 하며, 최씨 정권기 국가의 비위와 규찰, 세정 업무 및 인사 행정 등 국정을 총괄하였다. 교정도감은 비상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기구였지만 이후 권신들의 중추적 구실을 하는 정청(政廳)이 되어 강력한 기능을 발휘했다. 교정도감의 장관인 교정별감은 원칙적으로 직위가 장군인 사람만 임명될 수 있었다. 형식적으로 왕명에 의해 임명되지만 실제는 최고 무신 집권자가 자동적으로 승계했다. 1270년(원종 11)에 무신정권의 붕괴와 함께 소멸됐다.

정의
고려 후기, 무신 집권 하의 최고 권력 기관.
설치 목적

일명 '교정소(敎定所)'라고도 한다. 1209년(희종 5) 4월, 최충헌(崔忠獻) 부자의 살해를 모의한 청교역(靑郊驛)의 역리(驛吏)와 승도(僧徒) 등을 수색 · 처벌하기 위해 영은관(迎恩館)에 설치했던 임시 기구였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존속하면서 최충헌의 반대 세력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서무(庶務)를 관장하고 모든 지시와 명령을 내리는 등 국정을 총괄하는 중심 기관이 되었다.

기능과 역할 및 변천 사항

국가의 비위(非違)에 대한 규찰과 전국의 공물(貢物)과 특별세 등 세정(稅政) 사무 및 인사 행정을 담당하였다. 교정도감의 구성은 장관인 교정별감(敎定別監), 수취 담당인 교정수획원(敎定收獲員), 강화수획사(江華收獲使)가 있었고, 문서 행정 담당도 있었을 것이다.

규찰 기능은 교정도감의 설치 배경이 비상시국에 대처하기 위함이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으며, 실제로 1257년(고종 44)에 몽골로 도망가려던 별장(別將) 이성의(李成義) · 유거(劉巨) 등이 이양(李陽)의 고발에 의해 교정소에 잡혀 죽음을 당하였던 실례를 찾아볼 수 있다.

1250년(고종 37)에 최항(崔沆)이 교정별감의 공첩을 통해 청주(淸州) · 안동(安東) · 경산(京山) · 해양(海陽) 등지의 각종 별공(別貢)과 금주(金州) · 홍주(洪州) 등지의 어량(魚梁) 및 선박세(船舶稅)를 면제하게 하고, 또 각 도(道)에 파견한 교정도감의 수획원(收獲員)을 소환하게 하는 한편, 그 일을 각 도의 안찰사(按察使)에게 위임해 인심을 수습하도록 하였다는 점에서 볼 수 있듯이, 교정도감은 전국의 공물, 특별세 등과 관련된 세정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1227년(고종 14)에 최우(崔瑀)가 교정도감을 시켜 금내육관(禁內六官)에 통첩해 과거 급제자로 아직 관직에 오르지 않은 자 가운데 재주가 있는 자를 천거하도록 한 사실로 보아, 인사 행정에도 관련이 있었던 것 같다. 물론, 1227년은 최우가 인사 행정 담당 기구인 정방(政房)을 설치한 2년 뒤이기 때문에, 이때는 천거권뿐이었는지 모르지만 정방 설치 이전에는 인사 행정권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밖의 기능은 다음의 이야기로 알 수 있다. 1228년(고종 15)에 자혜원(慈惠院)을 짓기 위해 강음현(江陰縣)에서 목재를 벌채하였는데, 그 감독관이 이를 금하고 벌채한 목재를 몰수하였다. 이때 이 절을 짓던 승려가 최우에게 청해 교정도감의 공첩을 얻어 내고, 또 최우에게 호소해 그 관리를 멀리 귀양 보냈다는 이야기를 통해 교정도감이 지방 행정과 관련된 기능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교정도감은 비상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기구였지만 그 뒤로도 권신들의 중추적 구실을 하는 정청(政廳)이 되어 강력한 기능을 발휘하였다. 그리고 그 장(長)인 교정별감은 원칙적으로 직위가 장군인 사람만이 임명될 수 있었다. 형식상으로는 왕으로부터 임명되었으나 실제로는 최고 무신 집권자가 자동적으로 계승하였다. 즉, 교정도감을 세운 최충헌이 스스로 교정별감이 된 뒤, 그의 아들 최우가 그 직을 계승하였고, 최항 및 최씨 정권을 무너뜨린 김준(金俊)임연(林衍) · 임유무(林惟茂) 부자도 교정별감에 임명되고, 그 직권으로써 일국의 정치를 좌우하였다.

그런데 교정별감이 비록 형식적이나마 다른 관직과 마찬가지로 국왕에 의해 임명되었다는 것은 국왕이 이들 권신(權臣)의 집권을 합법화해 주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는 데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무신 집권 시대에 국왕의 권력보다 상위에서 국정을 천단(擅斷)하던 교정도감도 1270년(원종 11) 당시의 집권 무신 임유무가 피살됨과 동시에 소멸되었다.

의의 및 평가

교정도감은 무신 집권기에 존립했던 다른 지배 기구보다도 더 큰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 즉 무신 집권 초기에는 무신의 회의 기관인 중방(重房)에 의해 정치가 행해졌는데, 이는 집단적 정권 장악에 의한 지도 체제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경대승(慶大升)도방(都房)이나 최씨 집권기의 교정도감은 지도 체제가 1인 체제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도방이 1인 체제로 전환되는 과도기에 등장한 기구라고 한다면, 교정도감은 1인 독재에 영합된 체제로 무신 집권기의 정치 지배 기구의 성격을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내 준 기구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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