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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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사
제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대동법 성립 이전까지 국가가 부과하는 현물 과세 가운데 상공(常貢) 이외의 물품.
제도/법령·제도
시행 시기
고려시대|조선시대
내용 요약

별공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대동법 성립 이전까지 국가가 부과하는 현물 과세 가운데 상공(常貢) 이외의 물품이다. 본래는 부정기적, 부정량적 수취에서 시작하였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 별공의 명칭을 유지하면서도 상공화(常貢化)되기도 하였다. 현물 과세의 예비비 역할을 하였고, 별진상의 경우에 그것을 주관하는 군현 수령과 감사의 개인적 증여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정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대동법 성립 이전까지 국가가 부과하는 현물 과세 가운데 상공(常貢) 이외의 물품.
내용

고려와 조선이 민에게 수취하는 현물 세금에는 크게 공물(貢物)진상(進上)이 있었다. 공물은 주로 중앙정부 각사(各司)의 경비로 사용되었고, 진상은 국왕 및 왕실의 일상생활과 왕실 제사에 사용되었다.

공물과 진상은 각각의 사용처에 따른 차이 외에, 성격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공물이 세금으로서의 성격이 분명하였다면, 진상은 국왕에 대한 예헌(禮獻)이라는 성격이 강하였다. 공물을 연(年) 단위 세공(歲貢)으로 수취하였다면, 진상은 매월 현물 상납을 원칙으로 하였다. 정기 진상의 핵심은 ‘월령진상(月令進上)’이었다. 이렇듯 공물과 진상은 구분되지만 둘을 통칭하여 공물이라고도 하였다. 이하 서술에서는 공물을 공물과 진상을 통칭하는 의미로 사용한다.

공물은 크게 상공(常貢)과 별공(別貢)으로 나뉜다. 그런데 상공과 별공이 정확히 어떤 기준으로 나뉘는가에는 여러 의견이 있다. 고려시대의 경우 중앙정부가 민에게 부과하는 세목은 크게 보면 조(租) · 포(布) · 역(役)과 군현에 부과하는 현물이었다.

공물과 관련하여 군현의 관부(官府)는 다시 두 영역으로 나뉘는데, 일반 군현과 특수 행정 구역인 소(所)이다. 조 · 포 · 역 중에서 포가 상공이고, 소에서 생산된 물품과 군현의 토산물을 합하여 별공으로 이해하는 입장이 있다. 또, 일반 군현이 납부한 것을 상공, 소가 납부한 것을 별공으로 보는 입장도 있다.

현재 널리 인정되는 공물의 정의는 중앙정부가 지방 군현에 부과하는 현물이다. 역시 가장 널리 인정되는 상공과 별공의 의미는, 매년 내야 할 물품의 종류와 액수가 미리 정해져 있는 공물이 상공, 예기치 않은 필요가 있을 때 수시로 부과하는 추가적 공물이 별공이다. 수취 대상 지역이나 수취 물품에 따른 구분이 아니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상공은 군현 단위로 작성된 공안(貢案)을 기초로 하여 매년 정해진 액수를 중앙의 각 관청에 납부하는 상례(常例)의 공물이고, 별공은 왕실이나 정부 각 기관에서 정기적인 공물 이외에 수요에 따라서 때때로 부과하는 별례(別例)의 공물이다.

근래 이루어진 연구는 이러한 기존의 이해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다음은 1470년(성종 1)에 대사헌 이극돈이 올린 상소의 일부이다. “경기(京畿)는 서울[경성(京城)]과 너무 가까워서 부역이 번거롭고 무거운 데다가 자질구레한 일도 다른 도의 10배나 되니, 그 백성들이 지극히 가련합니다. 지금 횡간(橫看)을 보면 여러 도에서 진상(進上)하는 것으로 망전 망후 진상(望前望後進上)이 있고, 무시별진상(無時別進上)이 있는데, 경기도 또한 그렇습니다.”(『성종실록(成宗實錄)』 권3, 1년 2월 22일)

횡간은 조선시대 국가 재정의 세출 예산표이다. 그런데 ‘무시별진상’이 횡간에 들어 있다. 또, 조선 15~16세기 별진상(別進上)에 대한 한 연구는 지방 고을에서 상공인 월령천신에 별진상 물품들을 상납하는 데 기한이 정해져 있음을 별진상의 납부 기록 장부인 감봉기(監奉記)에서 확인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관행화 된 별진상은 상공과 다름이 없는 셈이다.

이것은 별공을 상공 외 추가적인 부정기적, 부정량적 수취로만 규정하기 어려움을 뜻한다. 물론 조선시대 사료에는 ‘무시별진상’에 대해 아침에 명령을 내리고 저녁에 독촉하여 그 부담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횡간이나 감봉기에 올라 있는 상공화된 별공이 아니라, 말 그대로의 부정기적, 부정량적 별공도 존재하였음을 의미한다.

기능

현물 수취 체제가 유지되는 내내 상공과 더불어 별공이 존재하였다. 별공은 이미 고려시대 사료에서 그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그럼에도 별공 자체는 불법이 아니었다. 문제가 있어도 별공 자체를 없애지 못했던 것은 그것이 일종의 예비비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조선 초에 만들어진 『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공물은 적어도 200여 품목에 달하였다. 그것은 임산물, 해산물 등 곡물 이외의 거의 모든 현물이었다. 물품 특성상 대부분 장기간 보관이 어려웠다. 더구나 국가 재정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수요가 발생하였다.

또 처음 공안이 만들어질 때 책정되었던 상공 이외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필요한 물품은 더 늘어났다. 이 모든 이유들이 별공의 증가를 초래하였다. 별공이었지만 오랜 시간 수취되었던 것은 이름만 별공일 뿐 상공과 다름이 없었고, 말 그대로 부정기적, 부정량적 별공도 존재하였다.

공물의 한 부분인 진상에는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진상은 정부 세금이라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왕에 대한 예헌이라는 의미도 가졌기 때문이다. 이는 진상품 납부 과정에서 잘 드러났다. 공물이 주로 고을 수령에 의해서 행정적 성격을 띠며 납부되었다면, 진상은 어디까지나 관찰사가 주도하였다. 중앙에서 별공에 대한 요구가 있을 때에 관찰사는 그것을 예하 군현별로 배분하고 수취하여 자신의 책임 하에 납부하였다. 이는 진상이 왕에 대한 예헌물이라는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다.

별공의 일부인 별진상은 많은 문제가 있어도 계속 유지되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별진상에 ‘봉여(封餘)’가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봉여는 본래 중앙에 납부하고 남은 물품을 국왕이 관료들에게 되돌려 내려주는 것을 의미하였으나, 그것 이외에도 경외 관료들에게 지급될 물품이 상납 과정에서 ‘봉여’라는 이름으로 포함되었다. 즉 진상물을 마련하는 군현 수령과 감사가 각기 자신과 관계있는 관료, 친인척에게 봉여물을 제공한 것이다.

중앙정부에서도 이를 알았다. 이에 봉여의 관행을 폐지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으나 사실상 실행되지는 못하였다. 봉여의 양은 제한된 자료이기는 하지만 전체 별진상 수량에서 평균 50%를 상회한 것으로 나온다.

의의 및 평가

별공은 상공과 함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현물 수취 체제를 구성하는 범주였다. 상공이 공안에 규정된 수취 시기와 수량을 가졌다면 별공은 그것으로는 충족되지 못하는 현물을 충당하는 범주였다.

별공은 본질적으로 부정기적, 부정량적인 특성을 가졌지만 그보다 더욱 다양한 모습과 역할을 수행하였다. 정기적, 정량적 수취로 정형화된 ‘별공’이 있었고, 또 계속해서 새롭게 등장하는 부정기적, 부정량적 별공들도 존재하였다.

별공은 중앙정부 예산에서 예비비의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관료체계 안팎의 사람들 사이에 수수와 증여의 매개물이 되기도 하였다. 이런 기능들 때문에 별공은 일찍부터 과다하게 수취되고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지만, 중단되지 않았다. 별공은 조선 후기까지 이름을 바꾸어 유지되었다. 하지만, 전라도 대동법이 성립되면서 김육의 역할로 상당 부분 대동법 속에 포함되며 크게 축소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단행본

박도식, 『조선전기 공납제 연구』(혜안, 2011)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역사비평사, 2010)
강진철, 『고려토지제도사연구』(고려대학교 출판부, 1980)
김옥근, 『조선후기경제사연구』(서문당, 1977)
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東京 東洋文庫, 1964)

논문

최주희, 「15~16세기 별진상의 상납과 운영: 강원 · 경상지역 사례를 중심으로」(『한국사학보』 46, 고려사학회, 2012)
이혜옥, 「고려후기 수취체제의 변화」(『14세기 고려의 정치와 사회』, 민음사, 1994)
김재명, 「고려시대의 잡공과 상요: 부세의 기본 분류와 관련하여」(『청계사학』 8, 한국학중앙연구원,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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