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조선 후기 이조정랑, 황주목사, 대사성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및 인적 사항
3남 2녀를 두었다. 큰아들 박호(朴濠)는 남평현감(南平縣監)을 지냈고, 상촌(象村) 신흠(申欽)의 딸과 결혼하였다. 둘째 아들 박황(朴潢)은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고, 영의정 홍서봉(洪瑞鳳)의 딸과 결혼하였다. 셋째 아들 박정(朴渟)은 목사 송일(宋馹)의 딸과 결혼하였다. 혼맥이나 가계로 보아서 정치적으로 서인에 속하였다.
동생 박동량(朴東亮)은 선조의 딸 정안옹주(貞安翁主)의 시아버지이다. 선조가 죽기 전, 영창대군을 부탁한 고명칠신(顧命七臣) 중 한 사람이다. 박동량의 둘째 아들 박의(朴倚)도 신흠의 딸과 결혼하였다. 박의의 아들이 박세채(朴世采)이다.
주요 활동
뒤이어 황주목사로 나갔느데, 부역(賦役)을 고르게 하고 민폐를 없애는 등 선정을 베풀어 지역민의 칭송이 높았다. 지역 노인들이 100년 내 이렇게 좋은 목사가 없었다는 말을 하였다. 어사(御使)의 추천으로 옷감을 하사받았다. 1606년 예조참의 · 동부승지 등을 지내고 우부승지에 올랐다. 1607년 9월 황해도관찰사로 나갔고, 다음해 형조참의가 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충주목사가 되고 이어서 대사성이 되었다.
이듬해 정인홍(鄭仁弘)이 이황(李滉)을 문묘에 배향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소를 올렸다. 이에 분격한 성균관 유생들이 정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 말을 듣고 광해군이 크게 노해 주동자를 죄주려 하였다. 그러자 성균관 유생들은 다투어 서로 죄를 청한 후에 성균관을 비우고 나와 버렸다. 박동량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서 광해군에게 “선비를 예로 부를 수는 있어도 위압하여 다스릴 수는 없다”고 극언하였다. 그는 예조참의에 제수되었지만 조정을 나와 자진해 나주목사로 나갔다.
1613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다 박동량, 신흠과 함께 옥에 갇히게 되었으나, 마침 중풍으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이로부터 10년간 고생하다가 결국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 「관찰사박공신도비명(觀察使朴公神道碑銘)」(신흠, 『상촌고(象村稿)』 권27)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선조실록(宣祖實錄)』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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