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함양과 산청 일원에서 학문을 익혔다. 노사상(盧士尙)(15591598), 정경운(鄭慶雲)(1556?), 오장(吳長)(15651617), 강린(姜繗)(15681619), 유중룡(柳仲龍)(15581635), 박명부(朴明榑)(15711639) 등과 평생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특히, 정경운과는 인척 관계에 있었다. 박여량의 부인은 정희보의 손녀인 진양정씨인데, 정희보의 셋째 아들의 아들이 정경운이고, 넷째 아들 정기의 딸이 진양정씨이다. 박여량은 정경운의 종매부(從妹夫)가 된다.
어려서는 노상(盧祥)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28세 되던 1581년에 정인홍 문하에 들어갔다. 35세 되던 1588년에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39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郭再祐)가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영남 유림들에게 통문을 보내 의거(義擧)를 독려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황석산성(黃石山城)[경남 함양군 소재]에 있던 의병을 도왔다.
1600년(선조 33) 문과에 급제하여 그해 9월에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1601년(선조 34) 예문관 봉교, 1602년 병조좌랑, 경상도 도사(都事), 1604년 북청판관(北靑判官), 경기도 양재찰방(良才察訪), 1607년 형조정랑이 되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기 전 유영경(柳永慶)을 비롯한 소북(小北) 세력의 영창대군 옹립 계획을 사전에 정인홍에게 알려 차단하는 등 광해군 즉위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8월에 사간원 정언이 되고, 그해 10월에 사간원 헌납이 되었으며, 그해 12월에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1609년 세자시강원 문학, 사헌부 지평, 1610년(광해군 2) 사간원 헌납, 1611년 사헌부 지평, 성균관 전적, 세자시강원 문학이 되었다. 같은 해 사망하였다.
정인홍이 스승 조식이 문묘에 제향이 되는 5현에 들지 못한 것을 비판하며 올린 상소 「 회퇴변척소(晦退辨斥疏)」로 인해서 많은 사람의 반발을 사고 『청금록(靑衿錄)』에서 제명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 박여량은 정인홍을 비호하는 글을 올리기도 하였다.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사후에 고향인 함양 도천(桃川)에 안장되었다. 현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로 추정된다.
1608년부터 1610년까지 3년간 쓴 일기인 『감재일기(感齋日記)』가 있다. 저술로 『감수재문집(感樹齋文集)』이 남아 있다.
사후에 정인홍이 「제문(祭文)」을 썼으며, 광해군의 「사제문(賜祭文)」이 있다. 1613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