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조선 후기 경상남도 함양에서 활약한 의병장이자 문신.
가계 및 인적 사항
주요 활동
39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郭再祐)가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영남 유림들에게 통문을 보내 의거(義擧)를 독려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황석산성(黃石山城)[경남 함양군 소재]에 있던 의병을 도왔다.
1600년(선조 33) 문과에 급제하여 그해 9월에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1601년(선조 34) 예문관 봉교, 1602년 병조좌랑, 경상도 도사(都事), 1604년 북청판관(北靑判官), 경기도 양재찰방(良才察訪), 1607년 형조정랑이 되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기 전 유영경(柳永慶)을 비롯한 소북(小北) 세력의 영창대군 옹립 계획을 사전에 정인홍에게 알려 차단하는 등 광해군 즉위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8월에 사간원 정언이 되고, 그해 10월에 사간원 헌납이 되었으며, 그해 12월에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1609년 세자시강원 문학, 사헌부 지평, 1610년(광해군 2) 사간원 헌납, 1611년 사헌부 지평, 성균관 전적, 세자시강원 문학이 되었다. 같은 해 사망하였다.
정인홍이 스승 조식이 문묘에 제향이 되는 5현에 들지 못한 것을 비판하며 올린 상소 「회퇴변척소(晦退辨斥疏)」로 인해서 많은 사람의 반발을 사고 『청금록(靑衿錄)』에서 제명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 박여량은 정인홍을 비호하는 글을 올리기도 하였다.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사후에 고향인 함양 도천(桃川)에 안장되었다. 현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로 추정된다.
학문과 저술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원전
- 『감수재문집(感樹齋文集)』
논문
- 정대훈, 「감수재 박여량의 학문 성향과 현실 대응 양상」(경상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12)
- 최석기, 「감수재 박여량의 지취(志趣)와 문학」(『경남문화연구』 32, 경상대 경남문화연구소, 2011)
- 허권수, 「감수재 박여량의 『감재일기』에 대한 소고(小考)」(『경남문화연구』 32, 경상대 경남문화연구소, 2011)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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