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회퇴변척은 1611년(광해군 3) 정인홍이 문묘종사에서 빠진 스승 조식을 변호하기 위해 회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의 행적을 거론하며 비판한 일이다. 이황과 조식은 교유하지는 않았으나 서로 비판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정인홍은 1610년 이황이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과 함께 문묘에 종사되었을 때 조식이 빠진 것이 이황 때문이라고 여겼다. 성균관 유생들은 이언적과 이황을 옹호하며 상소를 올리고 정인홍의 이름을 청금록에서 삭제하였다. 관료들과 지방 유생들까지 양측으로 나뉘어 논쟁을 벌이는 등 한동안 혼돈에 빠졌고, 대북파에 큰 타격을 입혔다.
정의
1611년(광해군 3) 3월 정인홍이 무함(誣陷)을 받은 스승 조식의 변호를 위해 이언적과 이황의 행적을 거론하며 비판한 사건.
개설
이에 광해군이 유생들을 처벌하려 하자, 그들은 성균관을 나가 권당(捲堂)에 들어가는 등 소동이 벌어졌다. 이후 관료들과 지방 유생들까지 양측으로 나뉘어 몇 달이나 시비 논쟁을 벌이게 되어 정국이 큰 혼돈에 빠지게 되었다.
역사적 배경
1610년(광해군 2) 7월에 유생들의 운동으로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祖), 이언적, 이황 등 오현(五賢)이 문묘에 종사되었다. 정인홍은 스승 조식(曹植)이 여기에 포함되지 못한 것은 이황의 비판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다.
경과
그리고 이황이 만년에 벼슬을 사양하고 나오지 않은 것을 또 하나의 오만하고 세상을 경멸한 행실로 비판하였다. 또한 퇴계가 조식과 성운을 노장의 풍으로 비판하였지만, 퇴계 자신도 노장을 본받는다고 힐난하였다.
그는 1543년(중종 38) ‘작서(灼鼠)의 변’에 연루되어 죽은 왕자 복성군(福城君)의 죽음에 회재와 퇴계가 책임이 있는 것처럼 지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이언적과 이황이 이미 문묘에 배향된 후였기 때문에 효과를 보지 못하였고, 오히려 유림으로부터 거센 저항을 받게 되었다.
성균관 유생 이목 등 500여 명이 단체로 소를 올려 정인홍의 ‘회퇴변척’을 공격하고, 그의 이름을 성균관의 유적에서 삭제해 버렸다. 또 승지 김상헌(金尙憲)과 응교 이준(李埈) 등은 정인홍을 비판하였고, 지평 박여량(朴汝樑) 등은 정인홍을 옹호하였다.
이에 광해군이 유적 삭제의 책임자를 색출하게 하자 유생들은 성균관을 나가 권당(捲堂)에 들어갔다. 결국 좌의정 이항복(李恒福) 등이 만류하여 광해군은 유생들을 타일러 용서하였다. 그 후에도 조정의 관료들과 지방 유생들까지 시비 논쟁에 가담하여 몇 달이나 지속하였다가 그해 8월에 그쳤다.
결과
의의와 평가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태학지(太學志)』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내암집(來庵集)』
- 「정인홍의 정주학 이해: 회퇴변척을 중심으로」(윤정, 『남명학연구』24, 남명학연구소, 2007)
- 「내암 정인홍의 학문성향과 정치적 역할」(이상필, 『남명학연구』6,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1997)
- 「내암 정인홍의 정치사회적 위상과 역할」(우인수,『조선사연구』5집 조선사연구회 1996)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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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조선 시대에, 일정한 격식을 갖추지 않고 사실만을 간략히 적어 올리던 상소문.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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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조선 시대에, 성균관의 유생들이 제 주장이 관철되지 아니하였을 때에 시위하느라고 일제히 관을 물러나던 일.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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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
: 공자를 모신 사당. 원래 선사묘(先師廟)라고 하였다가 중국 명나라 성조 때 문묘(文廟) 또는 성묘(聖廟)라고 하였으며, 청나라 이후 공자묘(孔子廟)라 하였다. 중국 산둥성 취푸(曲阜)에 있는 것이 가장 크고 유명하다. 우리나라에는 성균관과 향교에 있는데 곳에 따라 사성(四聖), 공자의 제자, 역대의 거유(巨儒) 및 신라 이후의 우리나라의 큰선비들을 함께 모신 곳도 있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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