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일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중기에, 예조좌랑, 사헌부장령, 사헌부집의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덕보(德甫)
반학(伴鶴)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57년(명종 12)
사망 연도
1640년(인조 18)
본관
여산(礪山: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
주요 관직
예조좌랑|사헌부장령|사헌부집의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중기에, 예조좌랑, 사헌부장령, 사헌부집의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덕보(德甫), 호는 반학(伴鶴).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송호지(宋好智)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송구(宋枸)이고, 아버지는 장령 송승희(宋承禧)이며, 어머니는 황린(黃璘)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95년(선조 28)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가 되었다. 1597년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예조좌랑을 역임하고, 이듬해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차례로 거친 뒤, 홍문관수찬이 되어 지제교(知製敎)·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을 겸하였다.

1599년 부응교(副應敎)를 거쳐 사간이 되었는데, 이 때 홍여순(洪汝諄)의 대사헌 임명을 둘러싸고 당략에 빠져 이를 반대하는 소북파(小北派) 남이공(南以恭)·김신국(金藎國) 등의 관직을 삭탈하고 귀양보낼 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마침내 두 사람을 파직시켰다.

1607년 광주목사(廣州牧使)로 나갔다가 1611년(광해군 3) 다시 세자시강원필선이 되고, 이듬해 해주목사가 되었다. 1614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고, 1616년에는 형조참판이 된 뒤 이어서 병조참판·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국조방목(國朝榜目)』
『청선고(淸選考)』
『호보(號譜)』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