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례는 왕실의 건립과 유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왕실의 성원임을 인정하고 대내외에 선포하는 중대사를 대규모로, 그리고 2∼3개월 동안 매우 단시간에 수행해야 한다는 특성 때문에 국가의 행정을 담당하던 어느 하나의 상시 관청에서 감당하기에 어려웠으므로 책례가 있을 때마다 여기에 부응하기 위한 비상시적인 기구의 설립이 요청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책례도감이다. 책례도감은 책례의 논의와 함께 설립되었다가 의례가 끝난 뒤에 해체되었으며, 직후 의궤청을 두어 책례도감이 남긴 기록물, 문서, 반차도를 바탕으로 의궤를 제작하였으므로 도감의 구조와 기능은 의궤를 통해 상세히 살필 수 있으며, 책례도감의 구조는 가례도감, 국장도감 등 도감을 설치하여 운용한 다른 의례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상급 기구에서는 주로 책례 의식의 절차를 수행하는 일을 총괄하였으며, 대체로 미리 정한 응행절목(應行節目)을 통해 수행하였고, 절목은 전례를 참조하여 마련하였다. 절목에는 도감의 운영 규칙을 수록하고 있는데, 도감을 설치하는 규정, 공회(公會)의 참여 규칙, 당상과 낭청의 인신(印信) 제작 규정, 필요한 도구의 물자 조달, 행정 요원의 급료, 장인들의 모집 방식 등을 정하고, 각 방의 관료들을 선임하는 일 등을 담당하였다. 무엇보다 이들의 가장 큰 임무는 책례를 무사히 치르는 데 있었고, 세부적인 의례 절차, 필요한 각종 복식, 의장을 모두 왕의 결재를 통해 설정하여 준비하고, 책례가 이루어지는 당일에 실천하는 일들을 총괄하였다. 이들의 주 업무는 책례의 의식 절차의 준비와 실행, 마무리까지를 책임지는 것이었다.
하부 기구에서는 이와 같이 겉으로 드러난 책례 의식의 수행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조하는 임무를 담당하는 것으로 주로 책례에 필요한 의례용 물품을 제작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각 방은 2명의 낭청과 3∼4명의 부사과(副司課), 2명의 감조관(監造官) 그리고 문서 작성에 필요한 행정 요원과 물자의 조달과 보관을 담당하는 고지기, 실제로 공인을 부리는 사령(使令), 수직 군사(守直軍士)로 구성된 상대적으로 독립된 부서였다. 각 방에서 제작을 담당하던 물품을 보면, 일방에서는 교명(敎命)과 금책(金冊)·옥책·죽책 등 책봉자의 신분에 따라 다른 재질로 제작되도록 되어 있는 책문, 복식(服飾)과 그에 딸린 제구(諸具) 등이고, 이방에서는 인(印)과 인통·주통·호갑 등 부속 제구이며, 삼방에서는 여련(輿輦), 교자(轎子)와 의장(儀仗), 배안상(排案床), 독인상(讀印床), 그리고 별공작에서는 향좌아(香座兒)·촉롱(燭籠)이었다.
왕실 봉작제는 태조 때부터 시행되었지만, 책례도감이 설치된 것을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임진왜란 이후이다. 『광해군일기』 1609년(광해군 1) 10월 27일자의 예조 계사(啓辭)에 왕세자의 교명축에 대한 양식을 의논하는 기사에서 처음 보이며, 책례도감의 설치는 대한제국기 황제 체제에 들어와 황실봉작제로 바뀐 이후에도 계속 지속되다가, 대한제국의 멸망과 함께 사라진다.
하급 기구는 상급 기구를 통해 생성되므로 생성 과정에서는 계서화되어 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상 일을 행하는 명령 체계를 보면 모든 기구가 국왕을 중심으로 한 보고와 직접적인 재결을 통해 동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최적화된 조직 형태를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국왕 체제가 갖는 효율성을 두드러지게 잘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