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명은 국왕 문서의 하나로, 대비·왕비·세자·세자빈·세제·세제빈·세손·세손빈 등을 책봉(冊封)할 때 국왕이 내리던 비단 두루마리 형태의 명령문이다. 책봉 의례의 핵심 의물 중 하나로 책봉의 위업을 현시하고자 제작하였다. 교명은 교명문이 작성되어 있는 부분과 사방 테두리, 교명문을 보호하는 회장(繪粧) 부분, 두루마리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교명이 제도적으로 정착된 것은 조선 세종 때이며, 대한제국 때까지 유지되었다. 교명은 현재 남아 있는 조선 시대의 문서들 중 가장 화려한 형태를 띤 문서이자, 의궤와 더불어 조선 왕실 문화의 꽃이라 할 수 있다.
교명(敎命)은 원래 국왕의 교시를 가리키는 보통 명사였지만, 책봉할 때의 교시나 그 교시를 일정한 형식과 형태로 제작한 문서를 가리키기도 하며, 실제로 임진왜란 이후에는 책례와 관련된 후자의 의미로 주로 사용되었다. 대비 · 세자 · 세자빈 · 세제 · 세제빈 · 세손 · 세손빈 등의 책봉은 책봉을 명하는 국왕의 전교를 선포함으로써 시행되었는데, 이와 함께 국왕이 당사자에게 책(冊, 옥책이나 죽책), 보(寶, 옥보나 옥인)와 함께 건네주던 세 가지 의물 중 하나가 교명이었다. 책례를 거행할 때, 교명을 교명궤(敎命櫃)에 담아 전(殿)의 뜰로 옮겨 와서 교명주홍배안상(敎命朱紅排案床) 위에 올려 놓고 대기하여 두었다가, 의식이 진행되면 교명을 궤에서 꺼내 상으로 옮긴 후에 의식을 진행하였다.
교명은 옥축을 단 두루마리 형태로,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는 오색 비단으로 교명문이 작성되어 있는 부분과 사방 테두리를 봉황(鳳凰)무늬나 구름무늬로 장식한 부분이고, 두 번째는 교명문을 축으로 말았을 경우, 교명문이 있는 부분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한 회장(繪粧) 부분, 세 번째는 두루마리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횡축(橫軸), 변죽(邊竹), 대자(帶子), 거물정(巨物丁), 고정 핀인 첨자(籤子)가 있는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교명문은 홍색 · 황색 · 남색 · 백색 · 흑색이 직방형으로 5장이 연이어 붙은 비단 위에 정갈한 해서로 쓰여 있다. 교명의 첫 부분인 홍색 비단 위에는 두 마리 용이 서로의 꼬리를 향하여 순환하듯 옥색으로 짜여 있고, 두 마리 용 사이에 전서로 ‘교명(敎命)’ 두 글자를 황진사(黃眞絲)로 직조하였다. 교명의 마지막인 흑색 비단 위에도 마찬가지로 옥색의 두 마리 용을 직조하였는데, 용들 사이에는 연호(年號), 월(月), 일(日)을 적고 그 위에 ‘시명지보(施命之寶)’를 찍었다.
교명문의 서식은 “왕은 이렇게 말씀하셨다[왕약왈(王若曰)]”는 기두사로 시작하여 “그러므로 이렇게 교시하니, 잘 알았으리라 생각한다[고자교시 상의지실(故玆敎示 想宜知悉)].”는 결사로 끝맺는데 이 서식은 교서(敎書)와 같다. 교명문의 핵심은 중간에 있는 “……을 대비, 왕세자, 혹은 왕세자빈으로 책립(冊立)을 명한다.”는 왕의 언명에 있으며, 이 선포를 전후로 내용이 나뉘어 있다. 앞부분에는 책립의 사유와 경위를 썼으며, 뒷부분에는 책립 이후 행해야 할 의무와 당부를 적었다.
교명은 책례를 거행하는 과정에서 교명을 담아서 보관하는 교명궤(敎命樻), 받쳐서 올려 놓는 데 사용되는 교명주홍배안상과 한 벌을 이루는데, 이것들은 모두 의궤에 그림과 그에 대한 설명이 실려 있어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참고가 된다.
실록에 따르면, 책립하는 국왕의 명령은 조선 초기에 종이에 써서 사용하였지만 1437년(세종 19) 2월 28일에 이르러 중국의 제도에 따라 오색실로 짜서 황금축으로 꾸미고, 교명 두 글자를 시면에 쓰고 “ 교지. 권씨를 왕세자빈으로 삼음(敎旨 權氏爲王世子嬪者)”이라고 썼다고 한다. 이를 통해 초기의 교명은 고신의 형식과 큰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일반화된, 권계의 내용을 담고 있는 교명이 실록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 1448년(세종 30) 4월 3일 왕세손을 책립하면서 내린 교명문에서였다. 하지만 여기서는 세손의 고명(誥命)을 죽책을 사용하여 고명하는 세자와 구별하기 위한 편의적인 조처였다. 교명이 제도적으로 정착된 것은 세종조에 착수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서 대비, 왕세자 등의 책례가 제도적으로 규정된 이후였다. 실제로 단종 때에 송씨를 책봉하는 의례에서 이러한 규정이 실제로 실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단종실록』 2년 1월 22일).
성종조에 왕비의 책봉 의례에서는 조선 후기와 같은 형식의 책문과 교명문이 함께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문서는 주제가 거의 유사하지만 형식과 의미는 사뭇 다르다. 책문은 사육변려체로 지어진 것으로 다분히 의례적 용도로 제작된 반면, 교명문은 산문의 형식으로 책봉을 명령하는 문서의 형식을 띠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인 광해군 조에 책례는 책례도감을 두어 주관하면서 교명의 형태에 대한 고찰도 더욱 정치하게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교명을 『대명회전(大明會典)』에서 고명(誥命)과 칙명(勅命)을 만드는 양식을 참조하여 거행하였다. 이후 책봉이 있을 때마다 책례도감이 주관하였고, 행사가 끝난 이후 의궤가 제작되었으므로, 교명의 형식과 형태는 의궤에 수록된 예에 따라 전승될 수 있었고, 대한제국기의 멸망까지 이어갈 수 있었다.
현재 교명의 실물은 국립고궁박물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립중앙박물관에 전하고 있으나 수량은 많지 않다. 교명의 초본이라 할 수 있는 교명문도 장서각과 국립중앙박물관에 일부 남아 있으며, 교명문의 작성을 위한 참고 자료로 교명과 책문 등을 왕대별로 전사한 『교명책문등록(敎命冊文謄錄)』이 남아 있다.
교명은 책봉 의례의 핵심 의물의 하나로서, 책봉의 위엄을 현시하고자 제작된 것이다. 초기에는 교지와 같은 짧막한 내용에서 출발하였으나 이후 격식을 갖추어 왕실의 권위를 드높이는 핵심 의물로 등장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문서들 중 가장 화려한 형태를 띤 문서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 화려함이 왕실의 권위와 연관되어 있는 것은 물론 왕의 권력을 재생산하는 문화적 기제였다는 점에서 조선의 왕실을 상징적으로 장식한다. 그런 점에서 교명은 의궤와 더불어 조선 왕실 문화의 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