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제지 공정 / 한국제지
제지 공정 / 한국제지
산업
개념
주로 섬유류를 재료로 하여 만들어 글을 쓰거나 인쇄를 하는 등 다양한 용도에 이용되는 얇은 물품.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종이는 주로 섬유류를 재료로 하여 만들어 글을 쓰거나 인쇄를 하는 등 다양한 용도에 이용되는 얇은 물품이다. 기원전 중국의 전한시대에 발명되었고 후한시대 채륜에 의해 제조기술이 크게 향상되었다. 제지법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에 전파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을 원료로 하는 마지와 닥나무를 원료로 한 저지가 삼국시대부터 발달하여 고려시대에는 중국에서도 귀하게 여길 정도로 뛰어난 품질을 자랑하였다. 현대의 종이 원료는 식물에서 추출한 식물성 섬유의 집합체인 셀룰로오스 펄프인데 이 펄프를 고해·조합·초조·표면가공 과정을 거쳐 제조한다.

정의
주로 섬유류를 재료로 하여 만들어 글을 쓰거나 인쇄를 하는 등 다양한 용도에 이용되는 얇은 물품.
개설

종이(paper)의 어원은 라틴어의 파피루스(papyrus)이다. 파피루스는 지금부터 약 4,000여 년 전에 이집트의 나일강변에서 자생하던 높이 약 2.5m의 수초로서, 껍질을 물에 담가 불린 것을 가로 세로로 겹쳐 두들겨서 굵은 삼베 모양으로 만들어 사용하였던 고대의 기록재료(記錄材料)이다.

그러나 파피루스는 그 용도나 외관이 종이와 비슷하지만 그 제조방법이 종이와는 다르다. 종이란 일반적으로 식물섬유나 합성섬유 등을 원료로 하여 이것을 엉키게 한 다음 건조에 의하여 탄성(彈性)을 회복시키는 동시에 점착(粘着)에 의하여 형상을 가지게 한 것이다.

종이의 전래과정

기원전 50∼40년대의 전한시대(前漢時代)에 중국에서 발명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05년경 후한(後漢)의 채륜(蔡倫)에 의하여 품질이 좋은 종이가 생산되어 보급이 크게 확대되면서 종이제조기술이 향상되었다. 초기의 종이는 삼베를 원료로 한 마지(麻紙)였다. 그것은 마지의 제조공정이 가장 간단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대(唐代) 이전의 종이의 대부분은 마지이며, 지금까지 출토된 한대(漢代)의 종이는 모두 마지라는 것이 실험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그 종이가 지리적으로 중국과 이어져 있어, 고대로부터 문물의 교류가 활발하였던 우리 나라에 일찍부터 직접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는 어렵지 않다.

종이가 언제 전래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1931년에 발굴, 조사된 낙랑채협총(樂浪彩篋塚)에서 종이 두루마리를 넣어 두었던 통(筒)으로 추측되는 채문칠권통(彩文漆卷筒)이 먹가루가 그대로 붙어 있는 벼루집 등과 함께 발견된 사실로 보아 그 당시 한나라의 문화권이었던 낙랑지방에 이미 중국의 종이가 전하여져 있었고, 그래서 그 무렵에는 우리 나라에서도 종이가 사용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중국에서 제조된 종이가 수입되어 사용된 것인지, 혹은 중국으로부터 종이제조기술을 배워 와서 이미 우리 나라에서도 종이를 만들어 쓰고 있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우리 나라에 종이제조기술이 전하여진 연대에 관해서는 몇 가지 견해들이 있으나, 결정적인 근거가 없는 것이 문제이다. 대체로 불교의 전래에 따라 불경이 들어온 시기를 가지고 4세기 전후로 보는 견해와 고구려의 중 담징(曇徵)이 610년(영양왕 21)에 일본에 종이 제조 기술을 전수한 사실을 가지고 7세기 초로 보는 견해로 압축된다.

이와 같이, 우리 나라에서 종이를 만드는 기술이 시작된 시기는 견해에 따라 상당히 차이가 있다. 다만, 담징이 610년에 종이 제조 기술을 일본에 전수하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므로 그 이전에 이미 고구려에서 종이 제조 기술이 시작된 것이 확실하고, 백제에서는 이미 4세기 후반에 사서(史書)를 편찬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종이 제조 기술은 4∼7세기 초에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도입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금 더 좁혀 본다면 4, 5세기경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삼국과 통일신라시대의 종이

이 시대의 종이는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몇 가지가 남아 있어 그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범한다라니(梵漢陀羅尼) 1매가 신라시대의 종이로 판명되었는데 이것이 현존하는 우리 나라 최고(最古)의 종이이다.

또한, 682년(신문왕 2)에 문무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건립한 감은사(感恩寺)에서 백지에 글을 쓴 것이 1959년에 발견되었다.

근년에 평양의 고구려시대의 한 유적에서 발견된 종이가 분석결과 마(麻)로 만들어진 것임이 밝혀졌다. 이 종이는 지금도 매우 희고 섬유질이 균일하며 면밀하게 짜여져 있어, 표백기술과 섬유를 다듬이질하여 그 질을 균일하게 하는 기술 등이 훌륭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저지(楮紙:닥나무 종이)도 삼국시대에 만들어졌다. 그것은 석가탑에서 나온 『다라니경』과 일본 쇼소원(正倉院)의 ‘신라문서’ 등으로도 알 수 있지만, 보다 확실한 기록이 호암미술관 소장의 『대방광불화엄경 大方廣佛華嚴經』에 나와 있다.

755년(경덕왕 14)의 이 문서에는 닥나무 껍질로 종이를 만든 방법에 관해 “닥나무에 향수를 뿌려가며 길러서 껍질을 벗겨내고 벗겨낸 껍질을 맷돌로 갈아서 종이를 만든다.”고 기록하고 있다.

저지는 신라에서 크게 발달한 것 같다. 그것은 다듬이질이 잘 되어 섬유질이 고르고 희고 질겨서 백추지(白硾紙)라 불려 중국에서도 좋은 종이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의 서지학자 야기(八木)에 의하면, “신라의 백추지는 다른 어떤 종이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종이로서 중국에서까지도 천하제일이라고 하여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그는 지금 그것이 어떠한 종이였는지를 모르고 있다고 하였는데, 이병기(李秉岐)는 “중국에서는 우리 나라 종이를 계림지(鷄林紙) · 견지(繭紙) · 만지(蠻紙)라 하여 일찍부터 일컬었다. 이는 백추지를 이름이다.”라고 하여 백추지를 견지와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 17세기 중국의 유명한 기술서(技術書)인 『천공개물 天工開物』에서도 “조선의 백추지는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겠다.”고 말할 정도로 그것은 중국에서도 유명한 종이로 알려지고 있었다. 이렇게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의 종이는 삼베[麻]를 원료로 한 마지와 닥나무[楮]를 원료로 한 저지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마지의 제조기술은 기본적으로 중국의 방법과 같았을 것이다. 그 시기의 자세한 기록이 중국에도 남아 있지 않지만 단편적인 기록으로 그 원료는 삼베나 모시였고, 기술적인 점에서는 ‘잘게 자르고, 으깨고, 빻고, 뜨고’ 하는 등의 과정을 알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문헌과 실험적 연구 등을 통해 재구성한 마지의 제조방법은 다음과 같다.

삼베나 모시의 천이나 끈조각, 헝겊 같은 원료를 물에 담가두었다가 잘게 잘라서 물로 씻어내고 맷돌에 갈아 회즙(灰汁)을 만든다. 그것을 다시 쪄서 물에 씻고 다시 빻아 지조(紙槽)에 넣는다. 그러고는 종이틀에 떠서 압착하고, 햇빛에 말리면서 표백한다.

이 방법은 중간의 몇 개의 공정을 가감하는 문제일 뿐 별다른 차이 없이 우리 나라에서도 하고 있었던 과정이었을 것이다. 물에 씻는 공정, 섬유질을 곱게 빻는 공정, 종이 원료액을 잘 휘젓는 공정 등이 얼마나 충분히 이루어지는가에 따라서 종이의 질이 달라지기 때문에 그 솜씨와 기술이 종이의 질을 결정하였다.

신라의 경우, 다듬이질과 표백 등의 공정에서 특히 뛰어난 기술과 솜씨가 있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의 저지가 백추지 또는 견지로 불리웠을 것이다. 백추지는 종이 만드는 공정의 특징에서 그렇게 불렸고, 견지는 제품의 질이 누에고치처럼 부드럽고 깨끗한 데서 나온 이름이었다.

우리 나라의 종이는 이렇게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에 고유한 종이로서의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제지기술의 전통이 고려시대에 그대로 계승되어 대량생산의 기술적 바탕이 다져진 것이다.

고려시대의 종이

생산과 활용

이 시대에 이르면서부터 종이는 주로 닥나무 껍질을 원료로 하여 만들어지게 되었다. 중국에서 발명된 종이제조기술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 이후 고려에서 더욱 발전하여 11세기 후반 이후부터는 중국에까지 많은 종이가 수출되기에 이르렀다.

1080년(문종 34)에 고려가 송나라에 보낸 국신물(國信物) 중에는 대지(大紙) 2,000폭과 먹 400정(挺)이 들어 있으며, 송상(宋商)을 통하여 거래된 수출품 중에는 많은 백지와 송연묵(松煙墨)이 들어 있었다. 그 뒤 원나라에서도 고려종이를 불경지(佛經紙)로 쓰려고 구하였고, 어떤 때는 한 번에 10만 장이라는 막대한 양의 종이를 수입해 가기도 하였다.

거기에다가 수차에 걸친 대장경 조판 사업이 이루어졌고, 사서가 간행되고 각종 서적이 인쇄됨에 따라 종이의 수요가 격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려에서는 1145년(인종 23)부터 1188년(명종 18)까지 전국적으로 닥나무의 재배를 장려하고 민간 제지업도 장려하였다.

또한, 지소(紙所)라는 기관이 설치되어 닥나무를 원료로 한 종이제조기술은 더욱 발전하였다. 이리하여 고려는 질기고 두껍게, 그리고 앞뒤가 다 반질반질하여 서사(書寫)와 인쇄에 가장 적합한 종이를 만들어내게 되었다. 조선시대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지(韓紙)라고 부르는 저지는 이 시기에 그 특질이 갖추어진 것이다.

종류

고려시대에 조판한 대규모의 대장경이나 여러 가지 사적(史籍)을 인출하고 불교관계서적을 간행하기 위하여 사용된 고려종이[高麗紙]로는 백추지 · 견지 · 불경지 · 아청지(鴉靑紙) 등이 있다.

① 백추지:신라시대에 만들어져 사용되어 오던 종이로서 고려에 들어와서는 그 질이 더욱 세련되었다. 기록으로 보아 백추지는 순저(純楮)로 만들어진 종이이며 흰빛이 나고 그 질이 또한 매우 훌륭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때에 백추지로 된 서적으로는 『천태사교의 天台四敎儀』가 있다.

② 견지:백색이며 비단같이 질기고 글씨 쓰는 데 사용하면 먹이 잘 퍼져 매우 훌륭한 종이였다는 중국인의 기록이 있으나 그것이 백추지와 어떻게 다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견지가 백추지와 마찬가지로 저지였음을 알려 주는 기록이 있다.

즉, “우리 나라 지품(紙品)은 옛날에 견지가 있어서 천하에 그 이름이 알려져 왔다. 예로부터 다른 원료는 쓰지 않고 다만 저껍질을 가지고 하였는데 ‘견(繭)’이라고 이름한 것은 저지의 견후(堅厚)하고 윤활한 것이 누에고치와 비슷하여 견지라 이름하였다.”는 기록과, 앞서 말한 이병기의 논문 등으로 미루어보아, 견지란 백추지와 동일한 것으로서 단순히 그 별칭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보이나 앞으로 보다 풍부한 사료에 의하여 연구되어야 할 것 같다.

③ 불경지:백추지와 견지 이외에 고려 때에 널리 사용된 종이로 불경지(혹은 藏經紙라고도 함)가 있다. 이 불경지는 특히 고려 때 널리 행하여졌던 장경(藏經)과 불서(佛書)를 찍어내기 위하여 특별히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장경지가 어떠한 원료를 써서 어떤 방법으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고, 다만 원나라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고려의 불경지를 구해갔다는 기록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오늘날 전하여지고 있는 고려지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일본 교토시 난젠사(南禪寺) 소장의 『고려장경 高麗藏經』 1,715권은 고려의 현종 · 문종 연간에 인출된 고판장경(古版藏經)으로 우리 나라에서 어느 때 건너갔는지는 알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1963년 보물로 지정되어 현재 순천의 송광사(松廣寺)에 소장되어 있는 의천(義天)의 『속장경 續藏經』 일부도 장경지에 인출된 것이며, 역시 송광사에 현존하여 있는 1866년(고종 3)의 혜심 고신제서(制書) 1통(국보, 1962년 지정)과 노비문서 1통 및 서장문자문서(西藏文字文書) 1통 등은 고려지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훌륭한 것이다.

④ 청지(靑紙):이병기가 『한국서지의 연구』에서 말한 청지와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는 청지가 화지(畫紙)로도 쓰였고, 중국에서는 책의(冊衣)로도 쓰였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이 청지는 책의 표지 등으로 쓰인 것 같다.

특징

고려종이의 일반적인 품질을 살펴보면, 매우 질기고 두껍고 또 앞뒤가 반질반질하여 양면을 다 서사하는 데 사용할 수 있었다. 중국에서는 계림지라 하여 고려지를 수입하여 역대 제왕의 진적(眞蹟)을 기록하는 데 사용하였다고 한다. 특히, 고려대에 들어와서 그 질이 세련되고 이름이 널리 국외에까지 알려진 견지는 빛깔이 비단같이 희고 또 견인(堅靭)하여 매우 훌륭한 종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박지원(朴趾源)『열하일기』에 보면, 고려지는 두껍고 질겨서 찢어지지 않는 장점이 있으나 그대로는 거칠어서 글씨 쓰기에 적당하지 않고, 다듬이질을 하면 지면이 너무 굳고 미끄러워서 붓이 머무르지 않고 먹을 잘 흡수하지 못하는 단점도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나라에서 고려지를 최상품으로 여겼던 것은 그 당시에 고려에서 송나라에 공폐(貢幣)로 보내던 종이가 국내에서 사용되는 것보다 훨씬 우수한 것으로 특별히 제조된 것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고려시대에는 지소라는 국영의 제지기관을 두어 여기에서 뛰어난 숙련공의 손으로 만들어진 훌륭한 종이를 송나라에 보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고려종이가 사소한 결점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는 역대의 제왕들이 즐겨 고려종이를 사용하였고, 시인묵객들도 고려종이를 애용하였다는 사실은 고려종이가 다른 나라의 것보다 우수하였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조선시대의 종이

생산과 제도

고려시대에 일단 완성의 단계에까지 이른 우리 나라의 제지기술은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활판인쇄술의 재발명으로 종이의 수요가 증가됨에 따라 대량생산의 단계로 발전을 거듭하였다.

1415년(태종 15)에는 국영 제지공장이며 종이제조 사무담당기구이기도 한 조지소(造紙所)가 설치되어 제지기술과 합리적 생산관리에 관한 일이 맡겨지고 지질(紙質)의 개량과 생산원가의 절하를 위한 노력이 경주되었다.

서울의 중앙 제지공장에는 2인의 제조(提調)가 기술적인 책임을 지고 배치되었고, 사지(司紙) 1인과 별제(別提) 4인의 기술관리 및 85인의 지장(紙匠)과 95인의 잡역부가 배치되어 있었다.

지방공장에는 모두 698인의 지장이 각 도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제지기술자들은 법적인 우대를 받도록 규정되어 생활보장을 받는 특전이 부여되었다.

조지소의 설치와 함께 조선시대에는 외국 제지기술의 장점을 도입하는 일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때까지 종이의 주원료는 여전히 저였다. 그래서 1439년(세종 21)에는 일본 저의 품종을 도입하여 재배하게 하는 등 원료인 저의 다량생산과 품질개량에도 힘썼다.

그러나 이러한 조지소의 설립은 그 초기에는 본래의 설립목적에 따라서 제지업을 발달시키고 여러 가지 새로운 종류의 종이를 개발하는 등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점차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지장들은 연구에 태만하게 되고 지방에 있는 경외지장들은 소규모의 민간 제지업을 압박하는 등 많은 폐단을 남겨 제지업은 쇠퇴기를 맞게 되었다.

종류

조선시대에는 고려 때 사용하던 백추지 · 견지 · 아청지 · 불경지 등이 계속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외국으로부터 제지기술을 도입하여 지질의 개량에 힘쓰는 한편, 여러 가지 새로운 종류의 종이를 개발하여 그 종류가 다양하였다.

먼저 조선 초에 조지소에서 만들어진 종이로는 표전지(表箋紙) · 자문지(咨文紙) · 고정지(藁精紙) · 유엽지(柳葉紙) · 유목지(柳木紙) · 의이지(薏苡紙) · 마골지(麻骨紙) · 순왜지(純倭紙) 등이 있다.

① 표전지 · 자문지:표전지는 나라에 길흉의 일이 있을 때 임금에게 아뢰는 글을 쓰는 데 사용하는 종이이고, 자문지는 중국과 왕래하는 문서에 사용되던 종이로, 이들은 매우 중요시되었다.

② 고정지:귀리나 보리짚을 주원료로 하여 만들었는데, 주로 인지(印紙)와 간지(簡紙)로 많이 쓰였으며, 특히 함경도 부령(富寧)의 것이 유명하였다고 한다. 이 고정지는 저를 절약하고 또 종이를 튼튼하게 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 같다.

③ 마골지:저를 절약하기 위하여 쓰였는데, 이것은 껍질 벗긴 삼대(麻骨) 5푼에 저 1푼을 섞어 만든 것이다.

④ 순왜지:우리 나라의 고유한 종이는 아니며, 1428년(세종 10)에 일본에서 배워온 제지술에 의하여 만들어진 종이를 가리키는 것 같다.

⑤ 유목지 · 유엽지 · 의이지:각각 버드나무의 줄기나 잎, 율무를 원료로 하여 만들어진 종이이다.

이상의 조지소에서 만든 종이 이외에 1541년(중종 36)에 김안국(金安國)이 만든 태지(苔紙)가 있다. 이것은 이끼에 저를 섞어 만드는 것으로 어린 태(苔)에는 저를 많이 섞고 늙은 태에는 저를 덜 섞어서 만든다고 하였다.

종이의 크기 등으로 종류를 나누면 백지(白紙) · 장지(壯紙) · 대호지(大好紙) · 소호지(小好紙) · 삼첩지(三疊紙) · 용선지(蘢扇紙) · 죽청지(竹淸紙) · 선익지(蟬翼紙) · 백면지(白綿紙) · 설화지(雪花紙) · 원백지(原白紙) · 배접지(接接紙) 등을 들 수 있다.

또, 염색에 따라서 황염초주지(黃染草注紙) · 아청초주지(鴉靑草注紙) · 옥색저주지(玉色楮注紙) · 홍색저주지(紅色楮注紙) · 초록저주지(草綠楮注紙) · 청저주지(靑楮注紙) · 황저주지(黃楮注紙) · 취지(翠紙) · 납지(蠟紙) · 은면지(銀面紙) · 청색지(靑色紙) · 금분지(金粉紙) 등이 있다.

끝으로 그 용도에 따라 나누면, 간지(簡紙) · 주지(周紙) · 반절지(半折紙) · 봉투지(封套紙) · 도배지(塗褙紙) · 장판지(壯版紙) · 도광지(塗壙紙) · 시전지(詩箋紙) · 봉물지(封物紙) · 시지(試紙) · 초지(草紙) · 자문지 · 혼서지(婚書紙) · 표지(表紙) · 인지(印紙) · 책지(冊紙) · 약폭지(藥幅紙) · 창호지(窓戶紙) · 화본지(畫本紙) · 선자지(扇子紙) 등이 있다.

오늘날에도 제조되고 있는 종이는 백지 · 창호지 · 배접지 · 장판지 · 화선지 · 화지(火紙) 등 특수한 용도에 쓰이는 것이다.

한지의 제조방법

우리 나라 종이의 제조방법도 기본적으로는 중국이나 일본 종이의 그것과 비슷하다. 그것은 거의 1,000년 이상을 이어 내려오던 전통적 방법이었다. 우리 나라 종이의 가장 주된 원료였던 저를 이용하는 종이의 제조 공정은 다음과 같다.

닥나무 껍질을 늦은 가을에 뿌리 위를 조금 남겨 놓고 잘라 채취한다. 이것을 큰 가마솥에 넣고 쪄서 껍질을 벗겨 건조시킨다.

이와 같이 건조시킨 것을 흑피(黑皮)라고 하는데, 이 흑피를 흐르는 물이나 통 속의 물에 1주야를 담가 불리면 연하게 된다. 그러고는 발로 밟아서 껍질을 손으로 떼어내거나 혹은 칼로 긁어내기도 하여 표피를 제거하고 며칠 동안 햇볕에 바래서 표백시킨다. 이것을 백피(白皮)라 한다.

이 백피를 물에 다시 담가서 완전히 부풀게 한다. 다음에 약 10관의 백피에 물 7두(斗), 석회와 목회(木灰) 약 1두의 비례로 넣어 잘 휘저어 섞은 것을 큰 가마솥에서 약 3∼4시간 동안 끓인다. 다음에 그것을 자루에 넣어 흐르는 물에 1주야를 담가 씻으면 여분의 회와 불순물이 제거된다.

이렇게 만든 펄프는 햇볕에 바래서 표백시키는데, 겨울에는 2일, 여름에는 하루가 걸린다. 이때에는 먼지나 섬유소의 절(節)이 섞여 들지 않도록 하여야 하고 그런 것이 있으면 제거한다. 그러고 나서는 이것을 석반(石盤)이나 목반(木盤) 위에 올려놓고 방망이로 두드려 곱게 빻는다.

한지의 제조과정에서 이부분이 특히 색다른 점이다. 중국에서처럼 펄프를 가늘게 갈지 않고 방망이질만 하기 때문에 지면에 길쭉한 섬유 모양이 그대로 남아 있기도 하고 결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 때문에 종이는 오히려 질기다고 한다.

이렇게 방망이질로 빻은 다음 목제의 녹조(漉槽)에 넣고 물을 부어 펄프를 풀고 점착제를 섞어 잘 휘저어준다. 점착제로는 황촉규(黃蜀葵, 닥풀) 뿌리에서 뽑은 끈끈한 액체나 괴목의 껍질을 사용한다. 이제 점착제가 섞인 액상의 펄프를 녹조 위에 놓인 뜸틀발에 부어 그것을 흔들어 액체 펄프가 얇게 골고루 퍼지게 한다. 이 뜸틀발에 의하여 종이를 뜨는 작업은 가장 중요한 과정의 하나이다.

한지의 뜸틀발의 특징에 대하여 헌터(Hunter)는 “조선종이는 언제나 그들 자신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주로 종이를 뜨는 틀에 달려 있다. 중국의 일반적인 녹형(漉型)과 같이 조선의 뜸틀도 4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테두리 · 발틀, 그리고 2개의 뜸틀 막대기들이다. 대나무가 조선종이 뜸틀의 가장 일반적인 재료로 쓰이는 동안에도 뜸틀을 만드는 데 키가 큰 조선풀(miscanthussp)이 잘 쓰였다. 인도에서도 풀이 길게 자라나서 뜸틀발을 만드는 데 유용한 재료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걸러진 작은 종이는 지상(紙床:종이를 얹는 온돌바닥)에 한 장씩 옮겨 포개 놓고 수분을 빼기 위해 1일분을 단위로 하여 쌓아 다음날까지 눌러두면 압착된다. 그리고 나서는 종이를 한 장씩 떠서 건조판에 붙여 햇볕에 말려 완성시킨다.

저 이외의 재료를 가지고 종이를 만드는 방법도 그 순서는 비슷하며, 단지 방망이질을 하여 빻은 뒤 여과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원료의 배합이 있다는 것뿐이다.

고정지는 귀리나 보릿대를 가마 속에 넣고 체로 걸른 재를 같이 가마에 넣은 뒤 잿물을 가득히 붓고 두 밤과 한 낮 동안을 끓인다. 이렇게 하여 짚이 완전히 물러지면 이를 광주리에 담아 물로 재를 씻어내고 물기를 완전히 뺀 다음에 3, 4일 동안 절구질을 하여 가루처럼 만든다.

그리고 미리 고지(古紙)를 물에 담가 뭉크러뜨려서 찧은 것을 짚가루에 섞고 여기에 저류(楮漻)를 부어 종이를 뜬다. 이렇게 만든 고정지는 주로 인지와 간지에 많이 쓰였다.

그리고 생마를 원료로 한 마지는, 생마를 가늘게 잘라서 물에 담그고 여기에 석회를 넣어 충분히 찐 뒤 그것을 자루에 담아 석회를 맑게 씻어낸다. 이것을 맷돌로 가늘게 간 뒤 여과시킨다. 마지는 중국에서 배워온 제지법을 쓰는 것이기 때문에 절구질하거나 두들기지 않고 맷돌로 가는 것이 특색이다.

이와 같은 종이 제조법은 크게 달라지지 않고 거의 그대로 조선시대 말까지,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까지도 전습되고 있으며, 손으로 뜨는 방법으로 시종하여 기계를 이용하는 제지법은 한지를 만드는 경우에 관한 한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에 이르러서는 기계화된 양지에 비하여 한지의 품위 있고 우아한 멋이 존중되기 시작하여, 손으로 뜨는 제지기술의 장점이 새로이 인식되게 되었다.

또, 한지의 가공지 중에서 여러 가지 색깔로 물을 들인 아름다운 색종이는 그 다양한 종류와 색상의 뛰어남 등으로 인하여 훌륭한 종이로 평가되고 있다. 색종이 제조에서도 우리 나라는 앞서 있었다. <全相運>

특징

조선시대의 종이는 종류가 다양하나 지면에 나뭇결이 생기고 식물섬유가 그대로 남아 있기도 하며 대체로 지면이 거칠다. 그것은 종이의 원료를 갈지 않고 두들기기만 하여 직접 체에 걸러서 만들었기 때문이며, 대신 매우 질긴 이점이 있다.

중국의 종이는 원료를 맷돌로 가늘게 갈아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종이는 순저(純楮)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강하고 질겨서 다듬이질하여 매끄럽게 할 수 있었다. 다듬이질할 때는 마른 종이 한 장과 젖은 종이 한 장씩을 차례로 섞어 겹쳐서 100장으로 한 더미를 만들어 편편한 상(床) 위에 얹고, 그 위에 평면으로 된 상을 다시 엎어 놓고 거기에 큰 돌을 얹어 놓는다.

한참이 지나면 위아래로 건습(乾濕)한 것이 고르게 되는데 그러면 평상 위에 놓인 대석(大石)을 200∼300번 내려치고 100장 중 50장을 꺼내어 다시 말리고 습한 종이 50장에 이것을 다시 사이사이에 넣어 200∼300번 치고 하는 과정을 서너 차례 하면 한 장도 서로 붙는 것이 없다고 한다. 그 뒤 다시 석현(石峴)으로 서너 번 덮어 놓고 두드리면 유지(油紙)처럼 광택이 있고 매끄럽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방망이질을 하면 지면이 너무 굳고 미끄러워서 붓이 머무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먹을 잘 받지 않아서 좋지 않았으나, 방망이질을 하지 않으면 지면이 거칠어 글씨 쓰기에 불편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의 종이는 대부분 순저를 원료로 하였기 때문에 매우 강하고 질기며 두꺼웠으나, 원료정선이 조잡하여 먼지가 많고 지면이 거칠다는 결점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종이의 발전에 있어서 또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은 외국으로부터 새로운 제지기술을 도입하였다는 점이다. 조선시대에는 요(遼) · 일본 · 중국으로부터 세 차례에 걸친 기술의 도입이 있어서 제지법의 개량에 힘쓴 흔적을 볼 수 있다.

1414년(태종 14)에는 요나라 사람 신득재(申得財)가 화지(華紙)를 만들어 왕에게 바치자 지장들로 하여금 그 제조방법을 배우게 하였고, 1428년(세종 10)에는 통신사 박서생(朴瑞生)이 일본에서 보고 온 왜지의 기술을 지장에게 습득하게 하였다. 1475년(성종 6)에는 지장 박비승(朴非曾)이 사은사를 따라 북경에 가서 생마(生麻)를 원료로 한 제지법을 배워왔다.

이 생마를 원료로 한 제지법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즉, 생마를 가늘게 잘라서 물에 담갔다가 석회를 섞어 푹 삶은 뒤에 이것을 자루에 담아 맑은 물에 씻어서 석회를 없애고, 그 재료를 맷돌로 가늘게 갈아 유연한 액체로 만든 뒤에 이것을 촘촘한 대광주리에 담아서 다시 깨끗이 헹구어 나무통에 담아 두고 맑은 물에 섞어 만드는데, 부레풀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렇게 조선 초기에는 제지기술을 도입하여 종이의 증산과 품질향상을 위한 적극적인 정책이 시도되었지만 선조대부터 일어나는 국내외의 어지러운 상황으로 제지기술의 도입이 중단되었을 뿐 아니라, 19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일본과의 국교가 성립되고 문물교류가 있게 되자 우리 나라에도 양지(洋紙)가 수입되었을 것이다.

일본에 양지공장이 건립된 것은 1872년이었다. 원래 우리 나라의 종이는 제지과정이 원시적이고 복잡하여 생산량이 많지 않으며, 값도 비쌌다. 그런데 기계에 의한 양지는 대량생산이 가능하며 가격도 싸면서 서사재료(書寫材料)로서의 질도 좋았기 때문에 차츰 조선종이는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고 양지가 보편화하게 되었다.

근대의 종이

우리 나라에 근대적인 제지기술이 도입된 시기는 일본에 수신사로 가 있던 김옥균(金玉均)이 1884년 미국의 라이스버튼(Rice Burton) 회사의 환망식(丸網式) 초지기(抄紙機) 1대를 삼전제지소로부터 구입한 때로 알려져 있다.

1913년에는 조선지료제조소가 설립되어 갈대펄프를 생산하였다. 1917년에는 조선제지주식회사 신의주공장(王子製紙의 전신)이 세워져서 1918년에는 아황산펄프를, 1925년에는 평면광택포장지를 생산하였다.

1935년에는 북선화학공업(北鮮化學工業)의 길주공장이 설립되어 낙엽송을 이용한 펄프를 제조하였고, 1939년에는 종방실업(鍾紡實業)이라는 갈대용해 펄프공장이 신의주에 건설되는 등 1945년 8월까지 모두 21개의 제지공장이 건설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공장들은 모두 일본인의 소유였고 광복과 더불어 우리 나라 정부에 귀속되어 일반인에게 불하되었다.

대규모 종합제지공장의 신설과 증설이 이루어져 종이의 자급도는 1980년에 98%에 달하여 자급을 이루게 되었다. 특히 화학펄프는 1974년에 국내 최초로 설립된 동해펄프주식회사가 1980년에 가동됨에 따라 국내에서 화학펄프를 생산하여 제지업체에 공급하고 있다.

광복 이후의 종이

우리 나라 제지공업은 1960년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는데, 특히 1980년대 중반 이후 3저현상으로 인한 종이 수요산업의 성장으로 연평균 15%를 상회하는 높은 성장을 하였으며, 1990년대 들어서도 연평균 9% 수준의 성장을 지속하여 1996년 현재 768만t의 생산규모를 가진 세계 제10위의 제지공업국으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제지원료의 자급도는 1990년 이후 다소 높아졌으나 1995년 현재 54%로 아직도 낮은 수준을 보이고 있어 제지원료의 자급도 제고는 우리 나라 제지공업의 주요 과제로 남아 있다. 부문별로는 화학펄프의 자급도가 20%를 하회하고 있는 반면 기계펄프의 경우는 70%를 상회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환경운동의 확산 등으로 폐지의 사용증가에 힘입어 폐지의 자급도는 높아지고 있다.

원료

종이의 제조에는 펄프가 사용되는데 펄프란 목재나 그 밖의 식물 등의 세포막 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셀룰로오스를 분리해 낸 식물성 섬유세포의 집합체이다. 섬유세포에는 셀룰로오스 외에도 리그닌을 비롯하여 세미셀룰로오스 · 지방 · 왁스 · 점액질 · 광물질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중에서 세미셀룰로오스의 일부가 포함된 셀룰로오스만 분리해 낸 것이 제지용 화학펄프이고 리그닌이 비교적 많이 함유되어 있는 것이 기계펄프이며, 셀룰로오스 중 알파셀룰로오스만 추출한 것이 레이온펄프이다.

펄프원료는 지구상에 풍부하게 부존되어 있는 산림자원을 활용하는 기술이 개발되어 목재가 주원료로 사용되게 되었다. 처음에는 한대지방의 전나무 · 회나무 등 침엽수가 원료로 이용되어 북부지방에서 펄프산업이 발달하였으나 남부지방의 활엽수를 이용한 펄프제조기술이 개발되어 점차로 발달하고 있다.

제조공정

펄프로 종이를 제조하는 공정은 종이의 종류에 따라서 다소 다르나, 일반적으로 펄프를 고해(叩解)하고 여기에 충전제 · 사이즈제 · 염료 따위를 넣어 잘 조합한 다음 다량의 물로 희석하여 이동하는 철망 위에서 물을 빠지게 함과 동시에 섬유를 얽히게 하여 습지를 형성한 뒤 압착건조하여 광택을 낸 다음 감는다. 제조공정은 다음과 같다.

① 고해:펄프를 두들겨 푸는 일인데, 고해의 목적은 섬유 속을 단섬유로 해리(解離)하고 적당한 길이로 절단하여 섬유를 열쇄(裂碎)함과 동시에 수화작용(水和作用)을 일으켜서 섬유를 유연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② 조합(調合):일정한 상태로 고해된 펄프가 그대로 종이가 될 수는 없다. 초지 · 표면가공 · 마무리손질 등의 공정에서 파생된 손지(損紙)나 파지 등을 이용하여 해리, 재생시킨 섬유와 각종 충전제 · 사이즈제 · 염료 · 안료 등을 혼합한 완전한 지료를 초지기에 보낸다.

충전제로는 백토 · 티탄칼슘 · 활석 · 황산바륨 등이 미세한 분말로서 종이의 인쇄적성의 향상과 증량, 불투명도와 백색도의 향상을 위하여 사용된다.

사이즈제는 종이에 대한 물 · 잉크의 침투를 막기 위한 것이며 이에는 로진사이즈 · 말레인화로진사이즈 · 규산소다사이즈 · 전분사이즈 등이 있다. 또한, 종이의 커다란 결함인 물에 약한 것을 보완하고 섬유소의 결합을 강화하기 위하여 합성수지 계통의 사이즈제로 조합공정중이나 초지공정 직전에 내면가공을 한다.

③ 초조(抄造):지료를 여수성(濾水性) 철망 위에 옮겨서 물이 빠지게 하고 섬유를 얽히게 하여 지층(紙層)을 형성시키고 압착, 건조하여 지층의 균정을 하는 공정이다. 초지방법에는 수초지법(手抄紙法)과 기계초지법(機械抄紙法)이 있으며 기계초지법에는 장망초지법(長網抄紙法)과 환망초지법(丸網抄紙法)이 있다.

④ 표면가공:종이가 완성된 뒤에 하는 가공을 표면가공이라고 하는데 표면가공에는 초지기 건조공정에서 하는 온 머신법(on machine)과 초지 후 별도로 하는 오프 머신법(off machine)이 있다.

종류

종이는 그 용도에 따라서 인쇄용지 · 필기용지 · 도화용지 · 포장용지 · 전기절연용지 · 창호지 등이 있고, 두께에 따라 박엽지(薄葉紙) · 판지 등이 있다. 특수한 의미로서 백상지 · 갱지 · 파트론지 등으로 나누어볼 수 있고, 판지는 골판지 · 백판지 · 마닐라판지 · 황판지 등이 있으며 주로 포장재료 등으로 쓰인다. 몇 가지 주요 종이에 대해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① 신문용지:기계펄프를 주원료로 하고 여기에 화학펄프를 배합하여 만든 것으로 신문용지는 평량이 52g · ㎡인 것을 중량지, 49g · ㎡의 것을 보통지, 46g · ㎡의 것을 경량지라고 부른다.

② 백상지(wood free paper):아황산펄프를 원료로 한 두껍고 약간 긴체(緊締)하며 광택이 많은 종이로서 인쇄용지, 고상한 포장지, 책의 표지 등으로 사용된다.

③ 아트지(art paper):종이의 양면 또는 한 면에 백토 · 황산바륨 같은 광물질을 카제인 같은 점착제와 함께 도공기로 발라서 건조한 뒤 광택을 낸 것이다. 지면은 특히 치밀하고 평활하여 사진판 · 고급미술책 · 달력용지 등에 쓰인다.

④ 크라프트지(kraft paper):주로 미표백크라프트펄프를 사용하여 만든 종이로서 강도가 강하고 내습성 · 유연성 · 인쇄성이 좋아 대형지 및 포장지에 사용된다. 크라프트지의 색은 원래 다갈색이었으나 최근에는 표백크라프트펄프를 사용한 흰 것도 제조되고 있다.

⑤ 골판지:파상구조의 골을 성형한 골심지의 편면 또는 양면에 라이너원지를 접합하여 제조한 포장재로서 형태 및 구조에 따라 파상골판지 · 편면골판지 · 양면골판지 · 2중양면골판지 및 3중골판지 등이 있다.

⑥ 백판지:표백화학펄프와 고지(古紙)를 초합(抄合)하여 초조한 판지로 지기(紙器) · 승차권용지 · 식료품포장용 등으로 사용된다.

⑦ 황판지:볏짚펄프를 원료로 제조한 황색의 판지로 종래는 판지의 주종을 이루었으나 종이의 고급화추세에 따라 그 수요는 감소하고 있다.

수급추이 및 전망

우리 나라 제지공업은 소득수준의 향상과 관련산업의 발달로 수요가 크게 증가함에 따라 비약적인 성장을 하였다. 생산은 1960년 5만t에서 1970년에는 33만t으로 증가하였으며, 1970년대 초부터는 국내수요를 국산품으로 충족시킬 수 있었고, 1977년에는 생산량이 100만t을 돌파하였다.

그 뒤 1984년, 1987년에 각각 생산규모가 200만t, 300만t을 초과할 정도로 빠른 성장을 하는 한편,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수출도 크게 증가하여 1990년에는 450만t의 생산분 중 약 10%에 해당하는 44만t의 수출실적을 기록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도 종이 수요가 꾸준히 증가함에 따라 생산설비도 크게 확대되어 1996년에는 생산규모가 769만t 수준에 이르고 있으며, 국내 수요를 충당하고도 남는 생산능력을 활용하여 수출시장 개척에 주력한 결과 수출은 135만t 수준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지종별 생산추이를 보면 1970년대 초까지 신문용지가 주종 생산품목이었으나 1975년부터는 판지가 제조업의 발달에 따른 수요의 증가로 최대 생산품목으로 부상하여 현재까지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1980년부터는 인쇄용지가 신문용지를 누르고 판지에 이어 제2위의 생산품목이 되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소득증대, 문화에 대한 욕구증대, 정보화에 따른 사무자동화 등으로 신문용지, 인쇄용지의 생산이 크게 증가한 반면 크라프트지, 판지는 비닐백 사용의 증가, 제조업의 경기둔화 등으로 낮은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종이의 생산능력은 1996년 말 현재 888만t이며 이중 판지가 전체의 약 50%에 해당하는 442만t, 인쇄용지 200만t, 신문용지 142만t, 크라프트지 30만t 등의 순으로 되어 있다.

한편 종이의 소비구조를 보면 1958년에는 신문용지 · 인쇄용지 등 문화용지가 전체 소비량의 80% 이상을 차지하였으나 산업이 급성장함에 따라 산업용지인 판지, 크라프트지의 수요가 증가하여 1976년부터는 산업용지가 문화용지를 추월하기 시작하여 1995년에는 산업용지가 총소비의 65%를 차지하여 종이의 수요패턴이 크게 변화되었다.

1995년 우리 나라 종류별 종이의 소비량은 판지 296만t, 인쇄용지 119만t, 신문용지 111만t, 크라프트지 26만t 등이다.

제지공업은 전형적인 내수형 산업으로서 국민소득의 성장률과 밀접한 수요증가율을 보여 왔는데 우리 나라는 그 동안 종이 소비량이 크게 증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995년 현재 1인당 소비량이 미국의 40% 수준인 140㎏에 불과하기 때문에 향후에도 소득증대에 따라 소비량은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산업용지인 판지 · 크라프트지 등은 이들 제품의 수요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제조업 분야의 성장이 둔화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수요가 비교적 낮은 증가율을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신문용지 · 인쇄용지 등 문화용지는 소득증가에 따라 문화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질 것으로 보여 문화용지에 대한 수요는 비교적 높은 성장률을 나타낼 것으로 예상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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