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상공부 산하 통신국을 폐지하고 신설한 것이다.
‘통신’은 제국주의 침략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까닭에 통신국 설치에 이르는 과정은 순탄할 수 없었다. 1885년 청국의 한성전보총국이 개국하였고, 1887년 조선정부의 전보총국이 신설되어 전신 사무를 관장하게 되었다. 1893년 8월 17일 기존의 전신 사무에 새로이 우체 사무를 합설하여 전우총국(電郵總局)을 설치했으나 청나라의 강한 반발로 인해 우체제도 실시를 위한 준비만 하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1894년 6월 28일 공무아문 산하에 역체국(驛遞局)과 전신국을 신설하였고, 1895년 3월 25일 농상공부 산하에 통신국이 신설되면서 공무아문 역체국 · 전신국의 기능은 농상공부의 통신국으로 단일화되었다.
통신국은 체신 · 관선(管船)의 2과를 두었다. 체신과에서는 우체 · 전신 · 전화 · 전기 사업을 담당하고, 관선과에서는 선박, 해원(海員), 항로표지(航路標識), 표류물 · 난파선, 항칙(港則), 수운회사 · 수운사업의 감독 등을 맡았다.
그러나 1896년 8월 이후에나 본격적인 통신사업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는 전신의 경우 청일전쟁을 분기점으로 하여 청나라와 일본이 시설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일본세력이 퇴조하면서 전신시설을 인수받았다. 또 우체사업에도 적극성을 보여 전국 주요 도시에 우체사 · 전보사 등이 설치되고 1898년에는 지방 각군에 임시우체제도를 시행해서 일단 전국적인 통신망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1898년에는 만국우편연합(UPU)에 가입했고, 1900년 1월 1일부터는 국제우체를 실시할 수 있었다. 통신사업의 확대와 함께 전화가설, 전기시설의 도입이 이루어지면서 통신원이 발족하게 된 것이다.
1900년 3월 23일 통신국을 폐지하고 통신원을 발족할 당시 산하에 총판관방(總辦官房)과 서무국 등 2국을 두었다. 서무국에는 체신과와 관선과를 두었고 직원은 총판 1인, 국장 1인, 참서관(參書官) 3인, 기사(技師) 1인, 번역관 1인, 주사 10인이었다.
1900년 12월 19일 농상공부 산하 관청의 지위에서 독립관청으로 승격되어 통신사업을 더욱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1902년 10월 30일에는 서무국을 폐지하고, 서무국에 있던 체신과를 총판관방으로 이전하는 등, 6과〔비서(秘書) · 문서(文書) · 번역(繙譯) · 체신(遞信) · 관선(管船) · 회계(會計)〕 체재로 개편하였다. 동시에 직원은 총판, 회판(會辦 : 신설) 1인, 참서관 5인, 기사 1인, 번역관 2인, 주사 15인으로 증원되었으며 총판의 법적 지위가 향상되었다.
발족 이후 소량이지만 우표의 국내 인쇄, 엽서 발행, 통신관원의 양성, 일본우편국의 통신주권 침해저지, 전기 · 전화 시설의 보급 등 대한제국의 통신사업은 점차 본궤도에 올랐다.
그러나 한국통신기관의 침탈을 가장 중점적인 대한정책(對韓政策)의 하나로 추진해 온 일제는 통신원의 재정적자를 이유로 통신원의 계속 존치와 통신기관(우체사 · 전보사 등)의 일본에의 위탁을 내용으로 하는 한일통신기관협정을 1905년 4월 1일 체결하였다.
이는 1904년 2월 한일의정서 체결 이후 계속되어 온 침탈의 결과였다. 일본에 실무기관을 빼앗긴 채 상부기구인 통신원은 계속 남아 있었지만, 1905년 12월 29일 대폭적인 직원 감축, 통감부 통신관리국의 설치와 함께 토지와 건물을 통신관리국에 양도하면서 유명무실해졌다. 결국 1906년 7월 27일에는 통신원 관제마저 폐지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