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동이전(東夷傳) 고구려조의 기록에 따르면, 대로(對盧)를 둘 때는 패자(沛者)를 두지 않고, 패자를 둘 때는 대로를 두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대로와 패자는 거의 같은 위상을 갖는 관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대로와 패자를 함께 두지는 않았다는 표현으로 보아, 두 관등은 기원, 혹은 수여 대상의 성격이 달랐을 가능성이 크다.
패자의 사례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고구려 초기 기록에서 다수가 확인되지만, 대로의 사례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또 패자는 4세기 이후에 소멸하였으나, 대로는 중후기 이후로 대대로(大對盧)가 분화하는 등 계속 유지되고 있어 주목되었다.
이에 대로와 패자를 번갈아 두는 것은 과도기적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고구려의 통치 체제가 왕권을 중심으로 정비되는 과정에서 패자의 기능을 대로가 대체하면서 성립하였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패자가 대로로 변화하였다는 견해나, 패자는 나부계(那部系) 관등이고 대로는 방위부계(方位部系)의 관등이라는 견해 등이 그것이다.
대로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계루부 대가의 칭호에서 점차 중앙 귀족의 범칭으로 변화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계루부 왕실이 부여계 집단에서 기원한 사실에 주목하여 대로가 부여계 위호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한편 대로가 대주부(大主簿)의 이칭(異稱)이라는 견해도 있다. 중후기에는 대로를 칭한 인물들이 군대를 지휘한 사실들이 확인되지만, 대로가 관등으로 활용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대로에서 분화한 대대로가 최고위 관등으로 확인될 뿐이다.
이에 후기의 대로는 관직으로 변화되었다고 보거나, 귀족회의에 참가하여 국정을 논의하는 중앙 귀족에 대한 범칭, 또는 고구려 후기 국정 전반을 협의하고 결정하였다고 하는 상위 5관등 회의체의 구성원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제기된 바 있다.
한편 고을덕묘지명(高乙德墓誌銘)이 발견되면서 고구려 후기 대로에 관한 논의가 구체화 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는데, 묘지명에서 대로관(對盧官)을 수여 받고 평대(平臺)의 직(職)을 맡았다는 내용이 확인된 것이다. 평대는 고구려 최고위 귀족회의를 가리키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대로는 평대에 참여하는 최고위 귀족의 범칭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와 달리 대로는 고구려 중앙 5부의 대표자로서 다른 상위 관등의 소지자와 함께 평대에 참여하였고, 5부의 대로들 가운데서 대대로가 선출되었다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