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고구려조에 따르면, 고구려 잠지락(蠶支落)의 대가(大加)인 대승(戴升)이 서기 47년( 민중왕 4) 자신의 무리 1만여 명을 이끌고 낙랑군에 투항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대승을 잠우락부(蠶友落部)의 대가(大家)로 기록하고, 무리 1만여 가(家)와 함께 낙랑군에 투항하였다고 달리 기록하였는데, 이러한 차이는 『후한서』의 기록이 『삼국사기』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로 여겨진다.
대승이 거느린 잠지락이라는 집단은 약 1만 명 규모로 삼한(三韓)의 소국(小國)에 비견되기도 한다. 초기 고구려의 공간적 범위인 혼강(渾江)과 압록강 중상류 일대에서 대외적으로 독자성을 발휘하는 단위 정치체의 규모가 대체로 1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 고구려는 이러한 단위 정치체들이 누층적으로 결합하여 구성되었다고 이해된다. 1만 명 규모의 정치체 3~4개가 하나의 나부(那部)를 구성했다고 이해된다.
대승이 낙랑군에 투항한 계기에 대해서는 계루부(桂婁部) 왕권을 중심으로 고구려 국가의 지배체제가 강화되면서 하위 정치체의 개별적인 대외 교섭을 강력하게 통제하자, 이에 반발한 세력 집단이 후한(後漢)의 유화책을 좇아 이탈한 사례로 파악된다. 전한말(前漢末) 이래로 낙랑군의 군현체제가 동요하자 고구려에 복속을 구해 왔던 토착 집단이 후한 광무제(光武帝)가 낙랑군을 장악하고 군현체제를 안정화하자, 다시 고구려에서 이탈하여 낙랑군에 복속을 구한 사례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