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고구려를 구성한 5부 가운데 하나이다. 계루부(桂婁部)가 왕위를 차지하기 전에 왕을 배출하였다. 소노부의 적통대인(嫡統大人)은 왕가(王家)의 대인들과 같이 고추가(古鄒加)로 불렸으며, 계루부 왕권이 확립된 3세기 중반까지도 별도로 종묘와 사직을 둘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소노부의 독자성과 특권은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점차 약화되었고, 4세기 이후에는 소멸되었다.
소노부는 『삼국지(三國志)』 동이전에 연노부(㳙奴部)로 표기되어 있는데, 연(㳙)은 소(消)를 옮겨 적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사서에서 계루부와 함께 고구려를 구성한 4개의 ‘노부(奴部)’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의 ‘나부(那部)’에 대응하는 것으로 파악되는데, 소노부는 비류나부에 대응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비류나부는 비류부(沸流部), 또는 비류국(沸流國)으로도 표현된다.
소노부를 비류나부로 파악하는 이유는 노(奴)와 같은 의미인 나(那)가 계곡이나 주변의 평야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천(川), 양(壤,讓, 襄), 내(內) 등과 상통한다는 점에서, 송양(松壤)이 소노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고구려 건국 설화에서 주몽이 비류국 송양을 복속시키는 과정도 중국 사서에서 언급한 소노부에서 계루부로의 왕실 교체를 나타내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한편, 중국 사서의 기록에서 계루부가 고구려를 건국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왕위가 소노부에서 계루부로 넘어가게 되었다고 서술한 사실이 주목되었다. 실제로 고구려로 불리는 정치체는 고조선이 멸망하기 전부터 존재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한(漢) 무제(武帝)가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 서기전 107년에 현도군(玄菟郡)을 설치하여 고구려를 관리하고자 할 때, 소노부의 수장이 고구려의 왕으로서 고구려와 중국 군현의 관계를 주도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와 달리 서기전 75년 무렵 이맥(夷貊)에 의해 현도군이 퇴축된 일이 있었는데, 이 즈음에 소노부 중심의 고구려가 형성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초기 고구려를 독자성을 갖는 정치체들의 연맹체, 또는 연합체로 파악하는 가운데, 왕실 교체는 연맹체의 장이 변화된 것을 의미한다. 건국 설화에서 서기전 37년에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였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에 소노부에서 계루부로 왕실 교체가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이와 달리 태조왕 대에 비로소 계루부가 고구려의 왕위를 차지하였다고 보거나, 유리왕 대에 왕실 교체가 이루어졌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