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

사회구조
개념
인간의 공동생활을 위한 구성체인 동시에 공동생활을 통해 생성된 집합적 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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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사회는 인간의 공동생활을 위한 구성체이자 공동생활 과정에서 생겨난 집합적 질서이다. 사회를 보는 관점은 사회의 실재를 둘러싸고 명목론과 실재론으로 나뉘고, 또한 사회 질서의 본질을 둘러싸고 기능론과 갈등론, 관념론과 물질론이 나뉜다. 사회에 대한 사회 과학적 관심은 산업화와 민주주의를 거쳐 근대사회가 성립된 이후 등장했다. 한국의 사회는 유교 중심의 농업에 기반한 전통사회가 조선 멸망과 함께 붕괴되고 일제시대의 과도기를 거치면서 해방 이후 산업 기반의 근대사회로 바뀌고, 세기가 바뀌면서 글로벌 탈근대적 사회로의 변화를 겪고 있다.

정의
인간의 공동생활을 위한 구성체인 동시에 공동생활을 통해 생성된 집합적 질서.
사회의 개념적 이해와 변화

사회는 인간의 공동생활 과정에서 만들어진 구성체이자 집합적 질서이다. 동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만이 유일하게 사회를 이루는 것은 아니며 무리지어 생활하는 동물들이 많이 있지만, 인간이 가장 정교하고 복잡한 사회를 이루어 생활하며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의 사회는 그 자체로 진화하고 변동한다.

사회를 의미하는 영어 society의 어원은 12세기 프랑스어에서 결사체를 의미하는 단어인 société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 단어는 라틴어에서 친밀하거나 적어도 우호적인 사람들 사이의 유대를 의미하는 socius에서 파생된 societas에서 온 것이다. 독일에서는 전통 사회와 구분되는 근대 사회란 의미에서 사회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독일에서 사회란 의미로 대표적으로 사용되는 Gesellschaft는 공동체적 전통 사회를 의미하는 Gemeinschaft와 구별해서 개인의 이익이 중심이 된 근대적 사회를 지칭한다.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사회(社會)’라는 단어는 구한말에 처음 도입되었다. 정치 공동체로서 ‘국가(國家)’란 단어에 이어 사회는 1896년 일본 유학생 중심의 『친목회회보』에 처음 등장한 이후 주로 『독립신문』이나 『대한매일신보』 등의 신문에 자주 사용되었다. 이때 사회의 의미는 개인의 자율성에 기초하여 결성되는 조직과 단체들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전통 사회가 가족에서 출발해서 혈연과 지연 등을 기반으로 성장했고,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종교적, 규범적 이념과 물리적 폭력의 집중에 의해 결속을 유지했다면, 근대 사회는 가족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 조직들이 등장해서 개인의 지위와 역할을 규정하고, 시장 경제 발전과 법의 지배에 따른 기능적 상호 의존이 사회적 통합을 유지한다. 전통 사회로부터 근대 사회로 바뀌는 과정은 서구에서는 18~19세기, 그 외의 지역에서는 20세기에 진행되었다. 근대 사회로 바뀌는 과정에서 경제는 자본주의적 산업화에 의해, 정치는 민주주의적 변화에 의해, 그리고 사회는 탈신비화와 세속화 및 사회 조직의 폭발적 등장에 의해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회 속의 개인은 과거처럼 가족이나 공동체와 같은 집단에 종속된 존재가 아닌 자율성을 지닌 주체로 바뀌지만 동시에 양육과 교육을 통해 사회의 역할 기대를 충족하도록 사회화되고, 주변 사람들과의 네트워크 및 제도적 규칙과 규범에 의해 통제를 받으며, 여론과 유행의 사회적 영향을 받는 대상이 된다.

디지털 기술이 등장해서 사회를 바꾸기 시작한 21세기에는 사회가 또 한 번의 근본적 변화를 겪고 있다. 개인들이 사회의 구조적 통제와 안정적 역할 분담에서 벗어날 수 있는 더 많은 정보와 자원에 대한 접근이 가능해지는 동시에 사회의 여러 조직들과 규칙 및 역할의 구조는 더 유동적이고 유연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 사회가 근대 국가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어 사회의 단위가 민족 국가의 범위와 대체로 일치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19세기와 20세기에 강했다면, 21세기에 들어서는 글로벌 사회를 하나의 단위로 생각하는 경향도 강해지고 있다. 디지털 기술과 세계화가 지배적인 사회는 유동적일 뿐 아니라 인종, 민족, 종교, 이념, 취향 등에서의 다양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유동성, 유연성, 다양성이 특징인 사회에서 질서를 만들거나 유지하는 것은 현대 사회의 큰 과제가 되었다.

사회를 보는 이론적 관점

사회에 대한 사회 과학적 관심은 근대 사회 이후에 사회학을 중심으로 생겨났다. 사회학에 큰 영향을 끼친 칼 마르크스 이후 막스 베버, 에밀 뒤르켐, 게오르크 짐멜 등의 고전 사회학자들은 19세기 후반 사회의 본질과 실재에 대한 다양한 주장들을 펼쳤고 이후 20세기 사회학에서는 이러한 주장들을 기반으로 다양한 관점들이 제시되었다.

실재론과 명목론은 중세 신의 존재를 둘러싸고 신학적 논쟁에서 등장했지만, 사회에 대해서도 그 실체가 있는가를 둘러싸고 의견 대립이 있었다. 프랑스의 에밀 뒤르켐이 사회는 인간의 외부에 존재하며 영향을 행사하는 사회적 사실(social fact)이라는 주장을 함으로써 실재론을 주장한 반면, 가브리엘 타르드는 사회란 사람들 생각 속에 존재하며 사람들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명목론을 주장했다. 다양한 사회 제도와 사회 정책이 등장해서 개인들의 삶에 영향을 미쳤던 근대 사회에서는 에밀 뒤르켐의 사회 실재론이 크게 우세하였다. 시민 사회를 집합적 주체로 사용하는 경우처럼 사회가 하나의 실체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사회 사상사에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뒤르켐의 '사회적인 것'의 발견은 비슷한 시기 프로이드의 '의식'의 발견만큼이나 큰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사회 전체를 대변한다고 하는 대중 매체보다 개인화된 매체들의 영향력이 커지고 사회적 제도들이 유연화되면서 따르드의 명목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사회의 집합적 질서를 낳고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궁극적 결정 요인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둘러싸고도 사회학자들은 상반된 견해를 보였다. 칼 마르크스가 중심이 된 물질론에서는 물질적 삶의 생산 즉 자본주의적 경제 생산이 사회의 토대이며 사회의 다양한 제도 및 신념 체계는 모두 경제적 토대에 의해 결정되고 이를 지지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이들은 근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물질적 차원 즉 생산관계와 소유관계에서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후의 사회학자들은 칼 마르크스의 물질론을 과도한 경제 결정론이라고 보았고 막스 베버는 과학적 합리성이, 또한 에밀 뒤르켐은 사회적 집합 의식이 종교를 대신하며 이러한 관념이 사회적 통합을 낳는다는 관념론의 입장을 강조했다. 20세기의 사회학에서 탈코트 파슨즈처럼 가치와 규범을 중시한 사회학자들은 관념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물질과 관념을 동시에 강조하며 이들 간의 상호 작용에 주목했다.

사회의 집합적 질서의 성격을 둘러싸고도 칼 마르크스는 경제적 생산관계에 기반한 유산자와 무산자의 계급 지배 관계가 적대적이고 이것이 유지되는 한 사회는 끊임없는 갈등을 반복할 뿐이라고 보는 갈등론을 주장했다. 막스 베버와 게오르크 짐멜이 지배와 갈등에 주목하되 그 다원성을 주장한 반면, 에밀 뒤르켐은 사회적 분업을 통한 기능적 상호 의존 즉 사회 속에서 분업을 통해 부여받은 각자의 역할과 지위를 열심히 수행함으로써 얻게 되는 기능적 균형이 사회의 핵심이라는 기능론을 주장했다. 이후 이러한 관점은 탈코트 파슨즈의 구조적 기능주의에 의해 계승되었다. 근대 사회가 전례없는 물질적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사회적 분화와 기능적 전문화를 통해 과학 기술이 발전하고, 생산과 분배 체계가 정교하고 복잡해지며, 정치, 언론, 법, 예술 등 여러 분야들이 자율성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능적 분화와 전문화가 자동적으로 기능적 통합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사회적 갈등은 사회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칼 마르크스의 주장과 달리 양극화된 유산자와 무산자만의 계급 갈등이 아닌 사회가 복잡해지고 세계화되면서 다양한 정체성 간의 갈등이 빈번해지고 있다.

사회 현상이나 변동을 설명하면서 사회의 거시적 구조를 중심으로 보는 관점과 미시적 행위를 중심으로 보는 관점이 나뉜다. 고전 사회학자들은 대부분 근대 사회로의 이행이라는 거시적 변동에 주목했기 때문에 거시적 구조 중심의 시각을 가졌다. 이후 파슨즈 등의 구조 기능주의나 다양한 구조주의적 시각 역시 경제, 정치, 법, 문화 등의 제도와 변동에 주목하였다. 구조를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개인들의 선택과 행위에 대해 구조에 의해 주어진 기회 및 구조가 주입한 규범과 사고방식을 반영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반면 20세기 중반 이후 사회적 행위자로서 개인에 주목해서 의사소통과 상호 작용, 사회적 교환 등에 초점을 맞춰 상황 정의와 인지, 사고와 판단, 행위와 대응 등을 연구하는 미시적 행위 중심의 시각이 부각되었다. 행위를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구조의 영향 속에서도 상호 작용 하는 개인들이 상황 속에서 선택하고 상호 작용 하며 만들어 가는 자생적 질서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구조와 행위에 대한 강조의 대립은 20세기 후반을 지나면서 구조와 행위를 어떻게 연계하여 사회적 현상과 변동을 이해할 것인가라는 새로운 문제의식으로 발전하였다.

근대 사회의 구조와 변동

전통 사회로부터 근대 사회로 바뀌는 과정은 서구에서 산업화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등장, 그리고 정치 혁명을 통해 군주제와 귀족 정치가 공화제와 민주주의로 바뀌는 것과 함께 진행되었다. 따라서 근대 사회로의 이행은 한편에서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발전에 따른 분업의 발달과 부의 엄청난 축적, 경제적 기회를 둘러싼 계급분화와 계급 갈등의 증가, 인구의 급격한 증가 및 도시로의 인구 집중, 과학 지식의 눈부신 발전과 계산적 합리성의 지배 등을 수반했다. 또한 다른 한편에서는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에 따른 다양한 조직들 즉 정당기업의 빠른 증가, 국민 국가의 확립과 관료 제도의 정비, 그리고 사회 정책을 통한 사회적 통합의 시도 등이 이루어졌다.

근대 사회의 특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사회학자들에 따라 서로 다른 의견들이 제시된다. 하지만 그 중에서 중요한 사항들을 요약한다면, 우선 개인주의의 증가를 들 수 있다. 개인주의란 공동체의 집단적 압력 때문에 개인들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추구하거나 가치에 따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자율성을 누리지 못한 채 타율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해관계와 가치, 이념 등에 따라 주체적으로 살 수 있는 조건과 생활 방식을 의미한다. 하지만 동시에 개인주의는 집단이나 공동체가 제공하던 개인의 정체성을 스스로 찾아야 하고, 모든 판단과 결정, 노력의 결과를 혼자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개인주의가 근대 사회에서 확대되는 배경이나 원인에 대해서 사회학자 뒤르켐은 관념의 차원에서 집합 의식의 약화를 든다. 집합 의식이란 집단이나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가치와 의식의 체계로 강제적이고 규범적이다. 근대 사회로 바뀌면서 종교의 사람들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진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을 집단의 기대에 따르도록 하는 집합 의식의 약화는 개인의 주체성을 강화했다. 하지만 동시에 집합 의식의 약화는 일시적으로 이를 대체할 개인의 가치가 정립되지 못해 혼란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이를 뒤르켐은 아노미라고 불렀다. 개인주의가 근대 사회에서 강해지는 이유에 대해 사회학자인 짐멜은 관념을 중시한 뒤르켐과 달리 사회의 구조적 변동을 강조했다. 짐멜이 주목했던 구조적 변동은 사회의 조직들이 한 개인을 둘러싸고 집, 마을, 국가와 같이 양파 모양으로 서로 겹치면서 확대되는 전통 사회가 근대 사회로 바뀌면서 직장, 가족이나 친족, 친구, 정당이나 기타 사회단체처럼 서로 별로 겹치지 않는 조직들이 선풍기 날개처럼 한 개인을 중심으로 교차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개인이 속한 집단이나 조직이 다양해지고 서로 겹치지 않게 되면서 개인은 조직들에 온전히 속하는 것이 아닌 부분적으로만 참여하게 되고 그 결과 자율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개인주의가 강해진 근대 사회에서 개인의 사회적 지위는 집안이나 종족과 같은 집단적으로 주어진 귀속 지위로부터 개인의 노력에 의해 성취한 성취 지위로 바뀐다. 신분적 지위가 계층적 지위로 바뀐 것이다.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지위가 바뀔 수 있는 여지는 있지만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여전히 평등의 기회는 열렸지만 결과에서는 평등이 주어지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때문에 근대 사회에서는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적 요구와 운동이 발생한다. 특히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강력하게 비판한 마르크스와 그의 주장을 따르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념에서는 평등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정치적 세력으로서 입지를 얻었다.

개인주의와 함께 근대 사회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바로 세속적 합리주의의 강화이다. 세속적 합리주의는 종교로부터 벗어난 계몽과 과학적 지식에 입각한 합리성을 중요시하는 근대 사회의 가치와 이상을 강조한 사회학자 베버가 중요시했다. 베버에게 합리성이란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는데 가장 적합한 수단을 선택한다는 도구적 의미를 갖는다.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 즉 부의 축적을 목표로 한 금욕주의를 합리성의 예로 중요하게 제시하였으며, 또 다른 예로 합리적 조직에서 규칙과 과학 지식에 따라 의사 결정을 내리는 관료를 합리성의 또 다른 예로 여겼다.

합리성의 원칙이 근대 사회에서 사람들의 삶과 일상에서 지배적이 되면서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온 전통보다 앞으로 더 나은 상태를 지향해 가는 미래에 대한 예측과 기획이 중요해졌다. 그런 의미에서 합리성을 중시하는 근대 사회는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와 진보에 대한 신념을 강조한 계몽의 정신을 구현했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정신과 관료제가 만들어 가는 근대 사회는 감정과 열정이 배제된 채 차가운 이성이 지배하는 세상이 될 것이라고 베버는 비관적으로 보았다. 그는 이러한 세상에서 인간은 주체성을 제약당한 채 '쇠창살(iron cage)'에 갖힌 신세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베버가 경제적 영역에서 합리성이라고 보았던 것을 마르크스는 물신주의(fetishism)라고 부르며 자본의 이익이 사람들의 가치와 생각을 지배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20세기 중반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경험하면서 근대의 합리성이 과연 긍정적인가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제기되었다. 20세기 중반 이후 등장한 인간주의, 생태주의 등에 대한 관심이 지금까지도 높아지는 것은 이러한 합리성에 대한 재성찰과 관련이 깊다.

근대 사회가 보이는 또 하나의 특징은 그것이 개인들뿐 아니라 조직의 사회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개인을 종속시켰던 전통 사회의 조직과 달리 근대 사회에서 조직들은 자유로운 개인들이 주도적으로 만들고 참여한다. 조직들은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집합적 행위와 물자의 동원을 위해 만들어지며 이들에게는 자연인으로서의 개인과 유사한 법인으로서의 자격이 부여된다. 이처럼 조직에게 행위자로서의 지위와 법적 효력을 부여한 것을 사회학자 콜맨은 일종의 '사회적 발명'이라고 불렀으며, 근대 사회에 들어 사회적 기능의 충족과 문제 해결 수단으로 많은 수의 조직들이 등장하게 되자 경제학자 볼딩은 이러한 현상을 '조직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조직은 집합적 요구에 응해 경제 발전, 민주 정치, 사회 복지, 교육, 문화와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조직에 참여하는 개인들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기도 했다.

한 개인의 일생은 학교, 직장, 사회단체, 요양 시설 등 다양한 일련의 조직들에 참여하면서 진행되는 과정으로 바뀌었다. 사회적 관계 또한 조직을 통해 맺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 관계는 개인들 간에만 맺어지는 것이 아니다. 일상적으로 개인들은 다양한 조직들에 대해 그 조직의 구성원, 고객, 투자자 등 다양한 측면에서 마주치고 상호 작용 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맺어지는 개인과 조직의 관계는 보다 많은 자원과 정보를 지닌 조직들이 더 많은 권력을 갖는 '비대칭성'을 특징으로 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학자 콜맨은 근대 사회가 개인과 조직 간의 '비대칭 사회'라고 보았다. 근대 사회에서 조직의 역할이 강조된 것은 조직이 개인들 각자로는 이루기 힘든 성과를 내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직이 이러한 성과를 내면서 스스로를 유지하고 지속시키는 과정에는 많은 집단적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집단적 노력을 성공적으로 동원하고 조정하는데 근대의 합리성이 큰 역할을 하였다.

한국 사회의 구조와 변동

전통 사회로부터 근대 사회로의 변화는 서구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화는 서구화로 인식되기도 한다. 하지만 근대화는 시간적 선후 즉 앞선 사회를 뒤따라가는 사회들이 모방해서 쫒아가기만 하는 과정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중후반까지 근대 사회로의 변동은 서구 혹은 서구화를 일찍 겪은 사회와 그렇지 못한 사회의 시간적 선후의 문제로 인식되었다. 자유주의적인 근대화 이론에서는 후진적 비서구 사회들이 비합리적 전통과 후진적 제도를 포기하고 서구적 합리성과 선진 제도를 받아들여 근대화를 진행해야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급진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나 종속 이론에서는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와 반식민지의 종속적 관계를 통해 자신들의 이익만을 취하고 비서구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기 때문에 이러한 불평등한 지배적 관계를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서구 사회의 근대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서로 입장이 다르지만 시간적 선후의 문제로 근대 사회로의 변화를 생각한 것은 비슷하다.

이러한 생각은 한국의 근대 사회 형성과 발전에 대한 생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에서 자생적 근대화의 시도가 일어났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강점에 의해 식민지가 된 후 근대화가 지체되다가 해방 이후 자주적 근대화를 비로소 시작하게 되었다는 생각은 서로 다른 이념이나 생각을 가진 학자들이 오랜동안 대체로 공유했던 시각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식민지 시대에 대한 논쟁 과정에서 새로운 사고의 경향이 등장하였다. 한편에서는 식민지였기 때문에 근대화가 지체된 반봉건적 상태였다는 입장과 다른 한편에서는 식민지였기 때문에 근대적 발전이 가능했다는 입장이 맞선 논쟁에서는 근대 사회로의 변화를 바람직하고 긍정적인 것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근대 사회로의 변화를 중립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식민지 시대 일본 제국주의가 토지 소유 관계를 비롯해서 전통적 제도를 해체하고 새로운 식민 통치를 위한 제도를 만들면서 근대 사회로의 변화도 함께 일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그 과정은 식민지 통치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식민지적 근대성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하려는 시도가 역사학과 사회 과학에서 나타나고 있다. 일제시대의 인구는 1911년 1,400만, 1920년 1,729만, 1930년 2,026만, 1940년 2,370만, 1943년 2,666만으로 늘었다. 농림어업 등 1차 산업 종사자의 비중은 1910년 83%에서 1937년 76%가 되었고, 1930년대 교통 체계의 발전과 함께 시작된 도시화에 따라 도시 거주 인구의 비율은 1938년 10%였다. 교육 측면에서 보면 초등학교 학생 수는 1914년 5만 명에서 1922년 20만이 넘었고, 1934년 55만을 넘고, 1939년 100만을 넘어 1943년 193만이 되었다. 식민지 교육은 한편에서는 근대적 지식의 전달이라는 측면과 다른 한편에서는 식민지 국민으로의 훈육이 동시에 존재한다.

1945년 해방, 1948년 남북 분단 정부의 수립, 1950년 한국 전쟁의 발발과 1953년 휴전을 거치면서 한반도에서 분단이 고착화되었으며, 자본주의 체제에 기반한 남한과 공산주의 체제에 기반한 북한이 서로 대립하며 경쟁하게 되었다. 남한과 북한 모두 미군과 소련군의 군정을 거쳐 제헌을 통해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남한에서는 이후 쿠데타와 선거를 통해 정권이 교체된 반면, 북한에서는 세습을 통해 정권이 지속되고 있다. 1950년대 한국의 경제는 전후 복구와 적산의 불하와 미국으로부터의 원조에 기반한 자본 축적이 이루어졌다. 이승만 독재에 대한 국민적 저항인 4·19에 이어 자유주의 정부가 쿠데타로 해체되면서 권위주의적 군사 정권이 등장했다. 군사 정권이 추진한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수출 위주 산업화는 차관을 통한 자본 형성과 전후 부흥기 국제 교역의 증가 속에서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경제 외에도 교육, 보건, 행정 등에서 본격적 근대화가 정부 주도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 일인당 국민 총소득은 133만 원에서 486만 원으로 증가했고, 도시 거주 인구비율은 28%에서 57%가 되었으며, 고등학교 졸업 이상의 비율 또한 10%에 못 미치던 것이 60%가 되었다. 산업별 종사자 구성에서도 농림어업의 비중이 1960년 50%가 넘던 것이 1980년 38%로 낮아졌다. 인구 증가 또한 빠르게 일어나서 1960년 2,500만에 못 미쳤는데 1980년 3,700만을 넘어섰다. 이것은 보건 서비스의 발전으로 1960년 기대 수명이 52.4명에서 1980년 66.1세로 높아진 것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전후 베이비 붐에 의해 1960년부터 1971년까지 매년 100만 명이 넘는 출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의 통계 수치에서 볼 수 있듯이 1960년부터 1980년까지 정부 주도의 근대화는 매우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의식과 문화의 측면에서는 여전히 개인주의보다는 집단주의가 강한 특성을 보이기도 했다. 그것은 한편에서는 가부장적 가족주의가 중요한 사회적 기초로 작동하고 있었다는 점과 함께 다른 한편에서는 정치적 권위주의하에서 학교와 직장, 그리고 남성의 경우에는 군대와 같은 조직들에서 집단적 규율에 대한 복종을 강요당했던 경험이 강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1960년대 이후 정치, 경제, 문화 등에서 강조되기 시작한 민족주의 역시 집단주의적 성향에 기여했다. 가족주의, 민족주의, 권위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개인보다 집단의 이익이 우선되고, 다양한 집단별로 연고주의적 성향이 강해지기도 했다. 집단주의적 문화는 다른 한편에서는 창의적 혁신보다 규범적 순응을, 그리고 다양성보다는 획일성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서구에서 근대 사회로의 변화 과정에서 개인주의가 두드러졌던 것과 다른 한국의 특징을 사회학자 장경섭은 “압축적 근대성”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1980년 군사적 권위주의를 종식할 기회가 무산된 후 지속된 권위주의 정치 체제는 1987년 민주화 항쟁까지 지속되었다. 직선제 개헌 이후 민간 정부가 시작된 1990년대 한국 사회에서는 그 이전까지 경제 발전을 주도했던 국가와 국내 자본, 해외 자본의 연합에서 국가의 역할이 크게 줄었으며, 1988년 이후 대규모로 일어난 노동 운동에 의해 임금 수준이 크게 높아지는 등 변화가 나타났다. 소련의 붕괴와 동구의 민후화로 냉전이 끝난 이후 글로벌화의 분위기가 강해지면서 한국 사회 또한 과거의 민족주의로부터 글로벌 사회의 일원이라는 인식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기업들의 활발한 해외 진출이 이러한 경향을 강화했다. 사회적으로 1990년대에는 한편에서는 민주화 이후 이념적 갈등의 격화와 함께 개인주의 문화의 확산과 자유주의 성향 등장, 그리고 외국 문화의 유입 증가로 대중문화가 활발하게 발전하였고 낙관적인 사회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1996년 한국은 OECD에 가입함으로써 선진 국가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다. 인구적으로는 계속 전체 인구의 증가는 있지만 가임 여성 일인당 합계 출산율이 1980년 2.82명에서 1990년 1.57명, 그리고 2000년에 1.48명으로 낮아졌다. 가족 구조에서도 변화가 나타나서 1980년에서 2000년 사이 평균 가구원 수는 4.5명에서 3.1명으로 줄고, 1인 가구의 비율은 4.8%에서 15.5%로 높아졌다. 권위주의로부터 민주주의로의 변화는 조직 설립도 촉진해서 1967년 1만 개가 겨우 넘던 한국의 법인 수는 1987년 4만 개를 조금 넘었고, 이후 빠르게 증가해서 1992년 10만 개를 넘고 2000년에는 20만 개를 넘게 되었다. 2020년 현재 한국의 법인의 수는 95만 개를 넘을 정도로 늘었다.

OECD 가입 직후인 1997년 후반 시작된 IMF 외환 위기는 한국의 경제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거대한 변화를 촉발하였다. 정부와 기업 모두 IMF 이행 조건 때문에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춰 법과 제도, 경제 정책, 기업의 구조와 의사 결정 방식이 바뀌었다. 1988년 노동 운동의 고양으로 친노동적으로 바뀌었던 노사관계는 다시 1998년 새로운 전환을 맞이했다. 신자유주의적 전환이라고 불리는 경제와 사회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전환의 결과 기업에서의 고용 관계가 보다 유연해지는 동시에 기업 지배 구조는 더 투명해졌고, 정부의 규제와 지원도 줄었다. 금융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해외 자본의 유입도 늘어나고 국민들의 투자 성향도 높아졌다. 기업들은 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을 위한 혁신을 강조하는 동시에 주식 시장에서의 평가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글로벌 경제 환경에 맞춘 변화와 기업들의 혁신 노력에 의해 경제는 성장을 지속해서 2001년 일인당 국민 총소득이 2000만 원을 넘었고, 2014년에는 3000만 원을 넘었다. 비록 외환 위기 자체는 빠른 시일 안에 끝나고 경제가 회복되었지만 사회 및 경제 구조의 변화는 이후로도 지속되었다. 장기 고용 관행이 약해지고 비정규직 고용이 증가하기 시작했고, 연공적 임금 체계가 약해지면서 노동 소득에서의 불평등이 증가했다. 소득 불평등 수준은 1990년대 초반 0.25 수준 아래로 낮아졌다가 1990년대 중반 이후 높아져서 2009년에는 0.34 수준까지 올라갔다.

신자유주의적인 사회 경제적 변화는 사회 전반적으로 개인화를 더욱 촉진하였다. 합계 출산율은 2000년대 이후 1.4명 이하로 낮아졌고 2018년에는 1.0명 아래로 떨어졌다. 1인 가구 비율도 2005년 20%, 2019년 30%를 넘어섰다. 개인의 생애 과정에서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1990년대 초반까지 한국은 연령 규범이 강한 편이어서 학교의 입학과 졸업, 졸업한 뒤의 취업과 결혼 등 중요한 인생 사건들의 시점에 사회의 규범적 압력이 강한 편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유연해지고 다양해지는 동시에 불안정성이 높아지고 개인화된 사회에서 개인의 생애 과정은 규범화된 패턴이나 시점이 약해지고 다양해졌다. 사회적으로 결혼하지 않는 비혼을 선택하는 비율이 여성을 중심으로 높아지고, 이혼도 증가했고, 직장에서의 자발적 퇴직 또한 늘어났다. 서구에서 이러한 다양화와 개인화의 결과로 나타난 의식적 변화라고 할 수 있는 탈물질주의 가치의 증가는 한국에서는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여전히 경제적, 물질적 삶의 불안정성이 높은 편이기 때문일 것이다.

2000년대 들어 사회의 신자유주의화, 개인화와 함께 디지털화도 함께 진행되었다. 한국의 대기업들이 정보 통신 분야에서 집중적으로 투자를 하고 정부에서도 전자 정부로의 전환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 등 지원을 적극적으로 한 결과 2000년대 한국은 디지털화에서 앞선 나라가 되었다. 경제적으로 정보 통신 산업이 한국 경제의 선진화를 이끌었을 뿐 아니라 정보 기기와 인터넷의 보급이 빠르게 이루어져 인터넷을 이용하는 인구가 글로벌 선도 수준에 이르렀다. 2010년대 이후에는 스마트폰을 통해 더욱 디지털 기술 이용이 활발해졌고, 2020년부터 시작된 코로나19는 사회, 경제적 활동의 비대면화를 촉진해서 디지털 기술에 의한 사회적 변화를 가속화했다. 디지털 기술이 가져온 사회적 변화의 대표적인 예는 온라인 구매와 소비의 급격한 증가, 스마트폰을 이용해서 여가와 문화생활을 즐기는 비중의 급증, SNS 등을 이용한 온라인에서의 사회적 관계의 중요성의 급격한 증가이다. 디지털 기술의 활용이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개인들의 삶에서의 편의가 크게 높아졌지만 반대로 부정적인 현상들도 빠르게 늘고 있다. 디지털 기술의 활용 격차, 청소년층 중심의 게임 중, 젊은 층에서의 SNS 중독 등 과몰입, SNS나 온라인에서의 혐오 발언의 증가 등이 대표적이다.

2000년대 이후 한국 사회는 경제적으로 지속적 성장, 정치적으로 민주적인 정권의 교체를 거듭하며 발전을 해 온 반면, 사회적으로는 개인화와 불평등, 불안정의 문제로 힘들어 해 왔다. 여전히 사회의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는 베이비 붐 세대와 불안정한 상황에 놓인 청년 세대의 격차도 존재한다. 그 결과는 국민들의 삶의 질의 정체 혹은 상승 속도 둔화인데 특히 삶의 만족도 중심의 주관적 웰빙 수준의 정체이다. 2022년 UN의 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주관적 웰빙 평균은 10점 척도에서 5.935로 146개국 중에서 59위이다. 2000년대 후반 이후 하락과 정체를 지속하고 있다. 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현재 한국인의 삶의 만족을 낮추는 요인으로는 사회적 유대의 결여를 들 수 있으며, 어려울 때 의지할 사람이 없다고 하는 사람의 비율이 30%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밖에도 과도한 경쟁과 비교나 낮은 사회적 신뢰와 정부에 대한 신뢰 등이 있었다. 한국 사회가 그동안 이룬 변화와 발전의 성과의 연장선에서 볼 때 1960년대 이후의 산업화, 1980년 후반 이후의 민주화, 2000년대 이후의 디지털화와 글로벌화에 이어 이제는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과제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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