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는 봉건사회로부터 근대 자본주의사회로 이행해 가는 역사적인 변화이다. 전통사회에서 얼마만큼 벗어났는가를 측정하는 도구 개념으로도 쓰인다. 한국의 근대화 기점은 봉건체제가 붕괴되고 자본주의가 생성되는 시기를 일컫는 근대사의 기점과 일치하지 않는다. 근대사의 기점은 학자에 따라 빠를 경우 18세기 영·정조 시기부터 늦게는 8·15 광복 이후까지 다양한 주장들이 있다. 일반적으로 근대화란 근대적인 것을 지향해서 발전하려는 주체적인 의식의 작용이 따라야 하며, 대략 19세기 후반에 한국의 근대화가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근대화라는 말은 대체로 두 가지의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 하나는 봉건사회로부터 근대 자본주의사회로 이행해 가는 역사적 전개과정으로서의 개념이요, 다른 하나는 산업화를 토대로 현대사회가 전통사회로부터 어느 만큼 벗어났는가를 측정하는 도구로서의 개념이다. 후자의 근대화론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특히 195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대소(對蘇) 전략과 관련하여 형성된 것으로, 이 시기에 미국식 민주주의를 지상(至上)으로 제시한 로스토(Rostow,W.W.)의 『경제성장의 제단계』가 널리 전파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러한 근대화론이 동아시아지역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60년 8월에 개최된 미 · 일하코네회의(美日箱根會議)에서였다. 이 회의에서 미국측을 대표한 홀(Hall,J.W.)은 「근대화 개념을 통해서 본 일본」이라는 주제발표에서 근대화의 개념을 사회발전의 양적(量的) 측면에서 파악하려 하였다. 이에 반해 일본의 마루야마(丸山眞男)는 ‘근대화는 곧 자기 의식화’라 했으며, 도야마(遠山茂樹)는 ‘근대화는 곧 민주화’라 하여 반론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이때 미국측 학자들은 일본을 구미가 아닌 지역에서 근대화에 성공한 유일한 나라라고 찬양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근대화론이 처음 나타난 것은 1961년 5 · 16 군사정변에 의한 군사정권이 등장하여 ‘조국 근대화’를 표방하면서부터였다. 그들은 4월혁명 이념의 계승과 거부의 양면성을 보인 가운데, 경제면에서는 4월혁명 이후 민주당 정권이 제기한 자립경제와 경제발전의 요구를 조국 근대화의 깃발 밑에서 경제개발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얼버무리려 하였다.
여기서는 이 같은 초역사적인 근대화론은 제외하고, 역사적 범주로서의 근대화에 초점을 맞추어 한국근대사에 있어서의 근대화의 기점과 그 역사적 전개를 더듬고, 일본 및 중국과의 비교 등을 통해서 그 특징과 위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은 곧 근대 한국의 변혁의 주체를 파악하는 작업의 하나가 될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의 기점과 근대사의 기점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먼저 한국근대사의 기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 문제는 이론이 구구하여 아직 정설이 없는 실정이다. 몇 가지 주요한 설을 추려보면 18세기인 영조 · 정조 시기, 1860년 동학의 발생, 1862년 임술민란, 1864년 대원군 집정과 고종시대의 개막, 1866년 병인양요, 1876년 병자개항,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갑오경장 등으로, 심한 경우에는 약 100년의 차이까지 나타나고 있다.
일반적으로 근대사란 봉건사회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본주의에 상응하는 시대의 역사이므로, 한국의 근대사는 우리 나라에서의 봉건체제의 붕괴와 자본주의의 생성과정 속에서 그 기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잠정적으로 1860년 동학의 창시로부터 1876년 개항까지의 기간에 주목하여, 거기서 민족적 · 민중적 차원의 근대지향적 요인과 외세 침공에 대한 저항, 그리고 자본주의 세계시장과 연결된 본질적 사회변동을 묶어서 한국근대사의 기점으로 보고자 한다. 이 기간은 격동의 연속기로서 거시적으로 볼 때 5백년 동안 묶였던 조선조의 쇄국이 단번에 무너진 시기였다.
1876년의 개항이 비록 구미 자본주의 국가와의 직접적인 수교 통상은 아니었지만 일본의 매개로 자본주의 세계에 문호를 개방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우리 나라는 자본주의를 수용할 태세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이미 구미 열강의 자본주의에 종속되어 이미 자본축적의 단계에 있던 일본이 구미 열강의 지원을 받아 개항을 강요해 온 결과였다. 일부 경제사가들은 병자개항을 우리 나라의 근대화 내지는 자본주의 성립의 출발점으로 보기도 한다. 사실 병자개항이 구미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직접적인 수교 통상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자본주의 세계에 문호를 개방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을 곧 한국근대화의 기점으로 간주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이는 한국근대화의 성격을 자본주의 성립이라는 단순한 측면에서만 파악하려는 입장으로서, 개항이 지니는 보편적이며 복합적인 성격을 다 포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견해는 또한 한국의 개항이 이미 구미 자본주의 열강에 종속되어 본원적 자본축적의 단계에 있던 일본이나 전근대적인 종속관계에 있던 청국에 의해 자본주의세계 체제의 가장 밑바닥을 맴도는 한 ‘주변’으로 편입된 데 불과했다는 사실을 도외시한 것이 아닐까 한다. 또한 이 견해는 불평등조약으로 개항 후 대등한 대외정책의 전개와 자율적 근대화를 제약한 외적 저해요인을 등한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근대화라 할 때는 ‘근대적인 자기의식화’ 곧 ‘근대적인 것을 지향해서 발전하려는 주체적인 의식의 작용’이 따라야 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1880년대의 근대화 노력이 주목된다. 그러나 이때의 근대화 의지는 정부 주도의 개량적 형태의 초기 근대화정책과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통해서 변법적으로 시도한 개혁으로서, 어느 것이나 하향적인 성격인데, 이는 1894년 농민층이 주체가 된 변혁의지와 대조된다. 어떻든 한국근대화의 기점은 1880년대 초에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그 사상적 기반으로 하여 전개된 ‘초기 근대화정책’에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개항 후 새로 조성된 국내외의 사정과 관련하여 한국 근대에 있어서 봉건적 위기와 민족적 위기에 대응하여 나타난 정치세력은 대체로 네 유형으로 가를 수 있다.
① 집권파의 ‘동도서기’ 및 ‘구본신참(舊本新參)’을 포괄하는 ‘구주신보(舊主新輔)’의 이론, 곧 재래의 제도를 근본으로 삼고 서양의 근대적 제도를 참작, 원용한다는 이론 밑에 전개된 정부 주도의, 위로부터의 개량적 근대화 노선의 세력, ② 구미의 문화와 제도를 전면적으로 수용하려는 근대주의에 입각한 근대화 노선의 세력, ③ 농민과 소시민 등 사회 기층의, 아래로부터의 근대화 노선의 세력, ④ 근대화와 직접 관계되지 않고, 오히려 ‘반근대’를 지향하면서도 결과적으로 한국근대화의 역사적 전개에 따라 근대화 쪽으로 변용되어간 세력으로서, 척사위정(斥邪衛正)을 표방한 유생과 농민들의 의병운동 등이 그것이다. 이상 네 가지 유형의 구체적인 양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로, 집권세력이 동도서기 또는 구본신참의 논리로 위로부터의 개혁을 실시한 것은 1880년대 초반의 초기 근대화정책과, 1900년 전후인 광무(光武)연간(年間)의 광무개혁이다. 전자는 서양을 배척하기 위해 일본만을 대상으로 개항한다는 척양적 대일개항(斥洋的對日開港)이라는 명분론 속에서 개항으로 인한 후유증과 새로운 국내외의 위기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소장 개명 관료들이 ‘자강(自强)’을 표방하면서 왕조체제를 개편, 강화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위로부터의 개량적 구미문화 수용의 시발이 되었다.
그 정책의 실천방향은 관제면(官制面)에서는 통상을 비롯한 대외관계 전반을 관장하는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설치(1881.1.)로 나타났다. 군사면에서는 종래의 5군영을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의 2영으로 개편하는 한편, 신식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고 일본인 교관을 초빙하여 훈련시키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 밖에 청국과 일본에 유학생과 시찰단을 파견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초기 근대화정책은 그 담당 주체의 개량적 성격 때문에 처음부터 한계가 있어 결국 그 정책으로 생존권의 위협을 받은 구식 군인과 도시 변두리 빈민들의 폭발적 항거인 임오군란으로 중도에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갑신정변을 전후해서 문화 및 교육부문에서는 부분적이나마 근대화정책이 추진되기도 했다. 우선 1883년 8월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출판기관인 박문국(博文局)이 창설되고, 그 해 10월 최초의 근대적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가 창간되었다. 한편 정부에서는 1885년 서양식 의료기관인 광혜원(廣惠院)을 설립했고, 1886년에는 최초의 근대적 학교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을 설립했다.
1900년 전후의 광무개혁은 구본신참 또는 구주신보의 사상적 기반 위에 부분적으로 구미의 근대적 제도를 수용하려고 하였다. 특히 식산흥업정책을 펴면서 경제적 · 기술적 측면에서의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이때 정부가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한 것의 하나가 양전(量田) · 지계사업(地契事業)이었다. 그것은 제도의 개편 및 증설에 따른 재정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상공업진흥정책으로 방직 및 제조공장의 설립과 기술연수를 위한 유학생의 해외파견과 기술학교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특히, 실업교육이 강조되어 1899년에 상공학교, 1901년에 광무학교(鑛務學校) 등 공립실업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무렵에 관리들의 관복이 양복으로 바뀌고, 1901년 금본위제(金本位制)가 채택되었으며, 1903년 중앙은행조례가 반포되었다. 그러나 그 추진 주체는 개명 관료였고, 이들의 계급적 성격은 지주층이었다. 따라서 주관적으로는 갑신정변 및 갑오경장 등에 나타난 졸속과 외세 의존적인 자세에 대한 반성을 바탕으로, 신구사상의 절충을 통해 종래의 개혁방향을 조정해서 근대화를 제도적으로 마무리짓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는 동아시아에 제국주의 체제가 형성되는 시기에 도시와 농촌의 민권운동을 탄압하고 근대적 외형을 갖추는 일련의 조처와 황실권력의 안보 및 자강, 그리고 황실 재정의 충실화를 위한 충군위국(忠君爲國)의 국가주의가 시종 답습되었다.
둘째로, 개화파의 반봉건 근대화 변혁운동의 허상과 실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개화사상의 원류는 실학사상, 특히 18세기 후반의 북학사상(北學思想)의 맥을 이은 박규수(朴珪壽), 역관(譯官) 출신의 오경석(吳慶錫), 한의사 출신의 유대치(劉大致) 등 봉건권력 내부의 개명 관료와 선각적인 중인 출신 지식인들에 의하여 개항 직전인 1874년 무렵에 형성되었고, 개화파는 개항 직후인 1879년 무렵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개화파의 사상과 행동의 최종 지표는 부국강병과 문명개화에 있었다. 그 변혁운동은 갑신정변 · 갑오경장 · 독립협회운동, 그리고 애국적 문화계몽운동 등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1884년 갑신정변은 객관적으로는 당시 조선을 둘러싼 영(英) · 로(露)간의 세계적 규모의 대립을 주축으로 하는 제국주의적 국제환경에 대응해서, 청 · 일간의 대립을 틈타 일본의 무력을 끌어들여서 위로부터의 국정변혁을 통한 자립과 근대화를 추진하고자 획책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역사발전의 주체인 국민 대중과 유리된 채 청국의 무력간섭을 받아서 이른바 3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갑신개화파 정권의 국정개혁안인 갑신정강(甲申政綱)에서는, 대외적인 민족문제로는 친청사대외교(親淸事大外交)를 탈피하고 민족의 자립과 정치적 독립을 주장하였고, 대내적으로는 반봉건 근대화의 과제로서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평등권을 확립하며,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 지조법(地租法)을 개혁하고 관리의 기강을 바로잡아 국민의 생활을 개선하며 국가재정의 충실을 꾀하였다. 특히 호조가 국가재정을 통일적으로 관할하여 국가의 경제적 기반을 개편, 강화하고자 하는 한편, 경찰제 및 군제의 개혁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갑신정강에서도 사회 기층인 농민들의 절박한 과제였던 토지소유 및 신분문제 등 봉건적 체제의 폐지 등은 제기되지 않았다. 그것은 그 개혁의 담당 주체인 개화당이 양반 지주계층이라는 신분적 제약을 뜻하는 것이었다.
한편, 갑오경장은 일본군의 점령하에서 시행된 것이지만, 그 개혁사업은 일본측의 내정개혁안을 따른 것이 아니라 갑신정변 이래의 개화파가 제기한 근대화 구상이 지도이념이 된 것이었다. 그것은 조선사회 안에서 성숙된 반봉건적인 근대화개혁의 필연적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민 대중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 개혁사업은 일본의 침략과 야합하여 추진되었으므로, 반일감정과 함께 심한 반발에 부닥치기도 하였다. 갑오경장의 각종 개혁 중 정치 · 경제 · 사회의 각 측면에서 특히 주목되는 사실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① 청국과의 전근대적인 종속관계를 단절하고 개국기년(開國紀年)을 사용한 점, ② 정치기구를 개혁하고 왕실과 정부를 분리하여 궁내부(宮內府)와 의정부(뒤에 내각으로 개편)를 둔 점(이때 의정부는 총리대신을 수반으로 하여 내무 · 외무 · 탁지 등 8개 아문을 두고, 각 아문에는 대신 밑에 차관에 해당하는 협판과 국장에 해당하는 참의 등의 관직을 두었다), ③ 종래의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능력에 따른 새로운 관리임용법을 시행한 점, ④ 사법권을 행정부에서 독립시켜 종래의 재판제도와 죄인의 연좌법(連坐法)을 철폐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다음 경제면에서는, ① 재정관리체제를 일원화하여 탁지아문(뒤의 탁지부)에서 국가재정의 사무를 일괄 관장하게 한 일, ② 신식화폐발행장정을 제정하고 은본위 화폐제도를 채용한 점, ③ 조세의 전면적 금납화 단행 및 종래 민폐의 근원이었던 환곡제도의 폐지, 그리고 도량형의 통일 등을 들 수 있다. 사회적 측면에서 가장 두드러진 개혁은 노비제도를 철폐한 점이었다. 이에 따라 인신매매 등 봉건적인 신분제도가 최종적으로 폐지된 것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제도 개편은 적어도 형태상으로나마 국가권력의 근대적 개편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개화운동은 1890년대 후반의 독립협회운동에 이르러 그 양상이 달라졌다. 이전의 갑신정변이나 갑오경장 등 위로부터의 개화운동이라는 제약성을 극복하고 민중의 자각에 의한 대중적 정치운동으로 바뀐 것이다.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와 더불어 국민발의의 성격을 띤 「국정변혁에 관한 6개조의 인민헌의안(人民獻議案)」을 채택하고 정부에 그 실시를 건의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각종 이권의 양여(讓與)와 차관(借款) · 차병(借兵) 및 외국과의 조약 체결에 관한 사항은 각 부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 재가한 것이 아니면 시행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밖에 정부의 예산 · 결산 공개, 중대 범죄의 공개재판을 요구하는 것 등으로서, 자주민권사상의 일대 발전을 나타낸 것이었다. 그러나 독립협회는 그 운동방법을 언론과 집회에 한정한 탓으로 수구파 권력의 어용집단인 보부상들의 황국협회(皇國協會)의 폭력을 서울로 집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밖에 이 운동의 사회적 · 경제적인 기반의 미숙, 토지개혁 구상의 결여, 반제국주의의식과 평등권의식의 불철저 등의 한계성을 드러냈다.
셋째로, 농촌과 도시의 사회 기층에서 발생한 아래로부터의 변혁운동을 살펴보기로 한다. 민중의 반외세 · 반봉건적인 구체적인 변혁운동은 1894년과 1895년의 동학농민혁명과 광무 연간의 영학당(英學黨)운동 · 활빈당(活貧黨)운동 등 무장 농민집단의 운동과,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를 무대로 한 만민공동회의 소시민운동 및 황국중앙총상회(皇國中央總商會)의 상권수호운동 등으로 나타났다.
먼저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에서 제기된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에서는 노비문서의 소각, 천인의 대우 개선, 과부의 재혼 자유 등 봉건적 신분체제의 타파를 요구하였고, 토지의 평균분작(平均分作)으로 봉건적 토지소유관계인 지주 · 전호제(地主甸戶制)의 타파와 경제적인 균등을 주장하였다. 전봉준(全琫準)을 비롯한 농민군의 지도자들이 비록 근대화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아래로부터의 내발적인 힘에 의한 근대적 변혁을 기도했다는 점에서 평가할만한 사실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을 계기로 민족 내부의 모순이 전면으로 등장한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 따라 농촌과 도시지역의 자주적 · 상향적 근대화운동은 1890년대 후반부터 집단적인 활동으로 전개되었다. 농촌지역에서는 영학당(일명 서학당)과 활빈당 · 남학당 등이 중부 및 삼남지방을 무대로 활약했고, 특히 활빈당은 독자적인 구국안민책, 즉 국정과 민원(民寃)에 관한 13개 조목의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들은 직접 생산 농민의 처지에서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대한 저항을 전개하면서 농민의 토지소유 발전을 위해 반봉건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1890년대 후반에 서울의 반제변혁운동(反帝變革運動)을 담당한 만민공동회 및 황국중앙총상회의 추진 주체인 도시 소시민의 계급적 성격은 소상인과 소수공업자(小手工業者)들로서, 그들은 봉건적 수탈과 외국 상인들의 국내상권침해에 대한 대항관계에 있었다. 그들은 당시 우리 나라를 둘러싼 제국주의적 국제환경에 주체적으로 대응하는 기본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넷째로, 반근대를 표방하면서도 그 성격을 점차 바꾸어간 척사파(斥邪派)의 반침략적 유형이 있었다. 그것은 객관적으로는 반침략적 성격을 띠는 것이지만 민족적 차원에서보다는 충군애국(忠君愛國)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이 척사파의 흐름은 재야 유생(儒生)들의 극단적 애국사상과 같이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면서 굴종적인 대일(對日) 개항과 수교 그 자체를 반대하는 조약반대 상소를 올리고 1880년초에 정부 주도의 초기 근대화정책을 반대하는 신사척사위정운동(辛巳斥邪衛正運動) 등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1890년대 후반에 이르러 그 제약성을 극복하고 재야 유생들은 농민들과 결합하여 의병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더욱이 1905년부터 1914년에 걸쳐 전개된 후기 의병투쟁은 일제의 국권침탈에 저항해서 점차 그 인적 구성의 변모와 함께 독립전쟁의 양상을 띠기 시작하면서 반근대화 경향이 흐려졌으며, 이 시기 개화파들의 애국적 문화계몽운동과도 부분적으로 연계되면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한국근대사에 있어서 근대국가의 형성과 근대화의 방향은 중국이나 일본의 그것과는 서로 다른 양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먼저 한 · 중 · 일 동양 3국에서 각기 근대화의 계기가 된 개항의 과정을 살펴보면, 중국이 영국과의 아편전쟁 후 1842년에 체결한 남경조약(南京條約)에 의해 개항되고, 일본은 중국보다 12년 늦은 1854년에 미국과의 미일화친조약 및 1858년의 미일수호통상조약[安政條約]에 따라 개항된 데 비하여, 한국은 일본보다도 22년이나 늦은 1876년에, 그나마 일본에 의해서 개항이 강요되었다.
이렇게 우리의 개항이 늦어지고 일본이 주요 역할을 맡게 된 요인은 우리의 사회적 · 경제적 구조보다도 구미 자본주의 열강의 이해판단에 따른 사정 때문이었다. 이미 구미 자본주의 열강에 종속된 일본이 사실상 구미 열강의 지원 아래 불평등조약에 의한 개항을 강요하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또한 구미 열강에 종속된 청국과의 전근대적 종속관계로 인하여 당시 조선은 동아시아 자본주의 세계시장의 가장 밑바닥에 놓인 셈이 되었다.
청국과 일본의 경우, 개항 직후에 직면한 외세압력은 산업자본주의 단계의 구미 자본주의의 외압이었고, 그것이 청국이나 일본의 변혁 주체를 파괴하지는 않았으므로 양무파정권(洋務派政權) 및 메이지정권(明治政權)에 영도되어 일단은 근대화의 전환점을 타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이 당면한 직접적 외압은 구미 열강 자체가 아니라 그들에게 종속되어 본원적 자본축적 단계에 놓여 있는 일본과 청국이었다. 따라서 당시 조선은 중첩된 외압에 의해 저개발의 위성화(衛星化)가 강요된 조건 아래 자율적인 근대화, 즉 후발 자본주의국으로의 발전의 길을 추구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청국이나 일본과 같이 변혁의 내부 조건을 갖고 있던 조선은 개항 후 안팎의 어려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하향적 초기근대화정책과 급진개화파의 주도로 변혁적 근대화를 꾀한 갑신정변, 그리고 상향적 변혁과 근대화를 꾀한 동학농민혁명이 추진되었지만, 그 변혁의 결정적 시점에서 청 · 일 양국의 정치 · 군사적 압력으로 좌절을 겪게 되었다.
이 시기에 청국의 조선에 대한 적극적인 간섭, 특히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에 따른 전근대적인 종속관계가 강요된 이른바 ‘양절체제(兩截體制)’ 아래서 조선과 구미 여러 나라 사이에 수호 · 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따라서 조선이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먼저 청국으로부터의 정치적 · 문화적 독립이 요구되었다.
위로부터의 변혁과 근대화를 꾀한 갑신정변은 객관적으로는 조선에서의 한로밀약설(韓露密約說) 및 거문도사건(巨文島事件) 등 영 · 로의 대립이라는 제국주의적 국제환경에 대응하면서 청 · 일간의 대립과 모순을 이용하여 조 · 청간의 양절체제를 타파하고 명실상부한 독립을 쟁취해야만 했다. 이때 개화파가 임오군란 뒤 종주권의 재편 강화, 그리고 상병정책(商兵政策)을 획책하던 청국의 세력과 이와 결부된 수구파 세력을 일소하고자 무력 정변을 일으켜, 위로부터의 국정변혁을 통해서 민족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추진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변혁 주체는 예상되는 청국군의 무력간섭에 대비하기 위해 서울에 주류하고 있는 150명의 일본군을 차병(借兵)하는 등, 일본 세력과 결탁된 것과 관련하여 반일적인 국내 대중과 유리된 채 청국군의 무력개입으로 마침내 ‘3일천하’로 좌절하고 만 것이다. 한편, 동아시아지역에서 아래로부터의 근대화와 반제(反帝) · 반봉건 투쟁의 원점을 이룬 동학농민혁명도 봉건적 모순의 타파와 상향적 근대화변혁을 꾀하고 광범위한 민중의 힘을 결집시켜 정부군을 압도했으나 결국 일본군에 압도, 좌절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정치변혁 및 근대화가 하향 및 상향으로 엇갈리는 시점에서 청국과 일본의 군사적 외압이 우리의 자주적인 근대화 변혁운동의 방향을 교란하여 마침내 국민적 통합을 저해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외세에 의한 타율적 개혁론과 자주적 개혁론 또는 양면평가론 등이 서로 엇갈린 갑오경장은 그 개혁 주체인 유길준(兪吉濬) 등 이른바 개량적 개화파 관료들이, 1894년 7월 23일의 일본군의 왕궁 점거로 청국과 결합한 수구파가 정권에서 물러남에 따라 정권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김홍집(金弘集) 등이 이같은 비상사태를 역이용해서 정치 · 경제 · 사회 등 각 방면에 걸친 근대화 개혁을 일본군의 점령하에서 실시하였다.
그들의 개혁사업은 대한침략과 대청(對淸)전쟁의 구실로 이용하고자 한 일본측의 내정개혁안을 지표로 삼은 것이 아니라 갑신정변 이래의 개화파의 국정개혁안을 지표로 삼았고, 특히 동학농민혁명 때 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요구를 반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개혁 주체가 개혁의 추진과정에서 농민군을 탄압하고 일본의 침략에 대한 방어장치를 갖지 못하였으므로 민중들의 눈에는 개혁사업이 일본의 한국침략과 표리(表裏)를 이루는 것으로 보였고, 따라서 수구세력은 물론 광범한 민중들의 반발에 직면한 것이다. 갑오경장의 근대적 제도개혁은 적어도 현상적으로는 근대적인 국가권력의 개편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누려야 할 민중들의 것이 되지 못하였고, 봉건적인 제약은 많이 시정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외세의 국내침투에 이용되었다.
한편, 1890년대 후반의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 운동이 전개되던 시기의 우리 나라 개혁운동의 주류를 정부 즉 광무정권으로 보느냐, 아니면 독립협회로 보느냐 하는 이른바 ‘광무개혁 · 독립협회 논쟁’이 제기된 바도 있으나 아직도 정론을 얻지 못하고 있다. 대체로 후자는 자주민권사상에 의한 국정개혁을 통해서 상향적 근대화를 지향한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 운동을 개혁의 주류로 평가하는 데 반해, 전자인 광무개혁은 동도서기론사상을 내재적으로 계승, 답습한 구본신참 내지 구주신보의 사상적 기반 위에 집권세력에 의한 하향적인 개량적 근대화를 추진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 운동은 무엇보다도 갑신정변 및 갑오경장 등의 제약성을 극복하고, 동아시아에 제국주의가 형성되는 시기에 있어서 민중의 힘을 모아 대중적인 정치운동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개화운동의 새로운 단계를 말해주는 획기적 현상으로 평가되며, 그 뒤의 애국계몽운동 등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 운동방법이 언론과 대중집회의 형태로 주로 서울에 한정된 점, 토지개혁 구상의 결여, 반제의식과 평등권의식의 불철저 등 그 역사적 한계성이 지적된다. 또 만민공동회 운동이 대중운동이라는 점에서 독립협회운동보다 더 높이 평가되고 있다.
특히, 1898년 말에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자주민권운동을 무력으로 탄압한 이듬해인 1899년(광무 3)에 대한제국의 헌법인 「대한국제(大韓國制)」를 제정, 반포한 점, 양전 · 지계사업을 추진한 점, 그리고 일련의 상공업진흥정책과 함께 금본위 화폐제도 및 중앙은행조례 등 자주적인 근대화를 시도한 것은 특기할만한 성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담당 주체인 당시 실권파들이 주관적으로는 위로부터의 개량적 근대화와 자본주의화를 통해서 식민지화를 저지하고 독립을 유지하려 했으나 국민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도리어 각종 이권을 열강에 넘겨줌으로써, 열강의 관심을 끌어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정략으로 국권을 지켜보려던 일련의 자주적 근대화시책도 마침내 1905년 을사조약에 의한 사실상의 국권상실로 중단되고 말았다. 일제는 을사조약 이후 통감부를 통해서, 도시와 농촌지역에서의 자주적 근대화를 꾀한 반제변혁 주체 및 그 세력을 강권으로 탄압하면서 식민지 반봉건체제로 우리 사회를 개편해 나갔다.
근대화는 민족국가를 이루는 구성원이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는 표준화된 국어가 있어야 가능하다. 역사의 일정한 단계에서 일단 저절로 형성된 국어를 의도적으로 정리하여 보급하고 교육하여야 근대화가 순조롭게 이루어진다. 우리 민족은 단일민족이고 단일언어를 사용해 왔으므로 국어가 이미 오래 전에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근대화를 촉진하는 아주 유리한 조건이다.
그러나 단일민족의 단일언어가 곧 근대의 국어는 아니다. 근대의 국어를 표준화하고 보급하는 과업은 힘들게 이루어졌고, 아직도 미진한 구석이 있다. 한국은 소수민족 · 소수언어의 문제가 없는 민족국가 중에서 인구로 보아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한국어는 사용자 수가 비슷한 다른 어떤 언어보다 방언 차이가 적은 편이다. 그러면서도 근대적인 언어 통합과 표준화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들은 말을 서로 알아듣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수도 서울이 교류의 구심점 노릇을 하였지만 조선시대 전기까지는 대체로 교류가 관(官)의 차원에 머물렀다. 민(民)의 교류가 대폭 확대된 것은 상업이 발달하고 교통이 빈번해진 조선 후기 이래의 일이다. 그렇게 되면서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각 지방의 방언을 서울말에 얼마만큼씩 근접시켰던 것으로 생각된다. 서울말을 통한 언어표준화는 말보다 글에서 더욱 분명하게 확인된다.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훈민하고 언해하며, 시조나 가사를 짓는 데 쓴 말이 서울말이었다. 시조나 가사는 원래 서울을 내왕한 사대부 관원들의 문학이어서 어휘나 어법이 대체로 표준화되었다.
국문 소설이 출현하고 보급되면서 국민표준화가 대폭 확대되었다. 국문소설은 서울의 시정에서 자라나 전국 어느 곳에서나 널리 읽히게 되었다. 목판본으로 찍어 어느 고장에서든지 팔기 위하여서는 표준화된 국어를 사용해야 하였다. 전주에서 낸 완판본(完板本)소설(小說)은 표준화된 국어에 전라도 방언을 다소 보태기만 하였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고장에 사는 사람들, 지체가 낮은 사람들까지 소설을 즐겨 읽거나 읽는 것을 듣게 되면서, 국어의 통합과 표준화가 크게 진척되었다.
1894년 갑오경장에서 한문이 아닌 국문을 공용하기로 한 것은 획기적인 조처였다. 그때까지는 국문 사용이 아무리 확대되어도 국가의 공식문서와 기록, 학술이나 사상에 관한 저술은 한문의 소관으로 남아 있었다. 문학에서는 한문학과 국문문학이 이중으로 존재하였다. 한문을 아는가에 따라서 지체를 나누고, 인재를 선발하였다. 국문을 공용하기로 한 개혁은 민족 구성원이 신분의 구별 없이 한 가지 글을 사용하면서 동질성을 확인하고, 구태여 어려운 글을 배우는 데 들이는 노력을 줄여 글 아는 사람을 대폭 확대하자는 것이었다. 갑오경장의 여러 개혁 중에서도 이 점은 특히 높이 평가해야 할 의의를 지닌다.
국문 공용의 과업은 한문의 소관이던 공식문서와 학술저술을 국문화할 때 비로소 성취될 수 있었다. 앞의 것은 정부에서, 뒤의 것은 민간의 언론이 맡아서 시도하였다. 그런데 갑오경장에서 선포하였듯이 순국문을 쓸 것인가, 아니면 신문이나 잡지에서 흔히 시도한 바와 같이 한자를 섞은 국한혼용문을 쓸 것인가 판가름하기 어려웠다.
표기법이 정비되지 않아 생기는 혼란을 시정해야 했고, 문법을 정리하고 사전을 편찬하는 작업도 서둘러야 했다. 결국 교육이 시급한 문제였다.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1907년에 국문연구소를 두어 필요한 연구를 하게 하였는데, 망국을 앞둔 시기라 얻은 결과가 있어도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 작업에 참여하였던 인사를 포함하여 여러 학자들이 어문생활의 방향과 규범에 대하여 각기 주장을 폈는데, 그 중에서도 주시경(周時經)이 가장 주목할만하다.
주시경은 나라가 독립을 이루는 데 필요한 세 가지 기본요건이 영토 · 국민 · 언어라고 하였다. 그 중에서도 독립의 정신에 해당하는 언어가 특히 소중하다고 보아, 언어의 성쇠가 민족의 성쇠와 직결된다고 하였다. 그는 당시의 국어가 혼란되어 있고, 일제의 침략으로 위축된 것을 시정하기 위하여 표기법을 정비하고 문법을 체계화하려고 애썼다.
그 뒤를 이어서 일제강점기 동안 국어연구가 줄기차게 이어졌으며, 조선어학회가 담당한 몇 가지 사업의 진척을 보았다. 1933년에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발표한 것을 비롯하여 표준말을 사정하고 「외래어표기법」을 정하였으며, 국어사전 편찬에 진력하다가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그때 정한 표기법 통일은 대체로 오늘날까지 그대로 지켜져 오고 있다. 어렵게 편찬한 국어사전도 광복 후에 출간되어 여러 후속 국어사전의 모체가 되었다.
그러나 이로써 어문생활의 근대화가 완수된 것은 아니다. 표기법 · 표준어 · 문법 등에 문제점이 적지 않으며, 국문 전용과 국한문 혼용 사이의 논란이 되풀이되고 있다. 그래서 국어교육이 혼란을 겪는다. 어문생활의 영역을 몇 가지로 갈라 본다면, 문학 창작은 이미 오래 전에 다져졌던 기반을 물려받아 풍부하고 다채롭게 개발되었다 하겠고, 언론에서의 국어도 민족항일기 동안의 노력을 이어 대체로 정확하고 효과적인 표현을 쓴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전문기술과 학문에서의 언어는 아직도 국어화되지 못하고 일본어의 잔재나 더욱 늘어나는 영어 어휘에 대폭 의존하고 있다. 특히 과학기술용어의 국어화는 낙관할 수 없는 과제이다.
조선 후기에 이루어진 사상과 학술의 업적 중에서 실학과 기학(氣學)은 근대사상의 선행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홍대용(洪大容)과 정약용(丁若鏞)의 실학은 신분제의 폐해를 지적하고 생산활동의 의의를 발견하며, 합리적 사고의 가치를 인식하여 근대화를 촉진하였다. 그러면서 사상혁신의 방법을 유학을 다시 해석하는 데서 찾았으며, 중세를 부정하기 위하여 중국의 고대를 긍정하였다.
임성주(任聖周)가 기틀을 다지고 최한기(崔漢綺)가 더욱 발전시킨 기학은, 이(理)는 오직 기(氣) 자체의 원리라고 하였다. 이러한 철학을 심성론(心性論)이나 인식론의 영역에서까지 확립하여 근대사상이 수립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그 어느 쪽도 널리 알려지거나 깊은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였다. 실학의 사회관과 기학의 방법론을 결합시켜 근대사상을 확립하는 역사적인 과업을 수행하지 못하고 격동과 시련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조선왕조의 지배질서가 위기에 몰리고 외세의 침략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하자, 사상의 전환을 이룩하여 이에 대처하고자 동학(東學)을 비롯한 여러 신흥종교 또는 민중종교가 일어났다. 이들 종교는 잘못된 역사가 근본적으로 쇄신되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이 곧 일어난다 하고, 그렇게 되면 한국이 세계사의 중심이 되고 미천하고 빈한한 사람일수록 복을 받는다 하면서, 믿고 따르는 민중에게 희망을 주고자 하였다. 이들 종교의 경전은 흔히 노래나 이야기를 중요시하면서 국문으로 표기되어 한문을 모르는 독자를 끌어들이고, 국문의 품격을 높였다. 그러나 종교적 상징을 적절하게 활용하였을 따름이고, 체계적인 논리를 갖춘 철학사상이나 사회사상을 제시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운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는 유학의 정통을 지키고자 하여 사상의 혁신에는 기여하지 못하였다. 국권을 상실한 뒤에 망명지 만주에서 투쟁을 계속할 때에는 민족의 각성을 깨우치고 투지를 고취하는 데 대종교(大倧敎)가 두드러진 구실을 하였다. 3 · 1운동 전후에 국내에서 전개된 민족운동은 천도교 · 불교 · 기독교 등과 다양하게 얽혀 있었으나 특별히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사상은 보이지 않았다.
그 뒤에는 민족운동이 온건노선과 과격노선의 두 가지 방향으로 나뉘었다. 온건노선은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연결시키고자 하면서 서부 유럽과 미국의 전례를 중요시하였다. 과격노선은 무정부주의 또는 공산주의에 기울어졌으며 러시아의 영향을 받았다. 이렇게 되면서 사상 논쟁이 치열하게 일어나는 한편, 자체의 전통에 입각한 자생적 근대사상의 발전은 적지 않게 위축되었다.
근대사상 형성의 평가할만한 국면은 애국계몽운동의 전개과정에서 발견된다. 박은식(朴殷植)은 정통 유학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양명학(陽明學)을 가져와 민족적 자아인식의 방법으로 삼고, 거기다 대종교의 발상을 덧보태어 위대하였던 과거의 역사를 되찾고자 하였다. 신채호(申采浩)는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특정 사상에 의존하지 않고, 역사연구의 원리와 방법을 스스로 수립하여 민족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려고 하였다. 그는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의 서두에서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 하고, 우리 민족의 ‘아’가 주변 민족으로 이루어진 ‘비아’를 누르고 크게 떨쳤던 고대의 기상을 되살려 중간의 위축과 당대의 위기를 극복하자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는 중세 극복을 위한 고대 재인식을 실학자들과는 다르게 민족사 내부에서 이룩할 수 있었다.
2단계 근대사상은 ‘민족’과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면서 이루어졌다. 국권 침탈의 위기가 심각해지면서 ‘오백년 종사(宗社)’를 근심하는 선비로서의 자각이 ‘반만년 역사’를 지켜야 하는 ‘이천만 동포’의 공동사명으로 확대되었다. 이렇게 하여 민족의식이 부각되고, 조선왕조를 위하여 충성을 하며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여야 한다는 생각은 무너지게 되었다. 보수주의와 외세 의존의 자세를 타파하고 민족사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권력 · 재산 · 지식이 모자라는 사람들이 주체로서의 자각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다. 한용운(韓龍雲)과 신채호는 이 점을 강조하면서 민중주체론(民衆主體論)을 제시하였다.
한용운은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에서 불교의 새로운 각성을 말하면서, 모든 ‘ 중생’이 평등을 찾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 뒤에 ‘중생’이라는 말을 ‘민중’으로 바꾸어 적고, 불교가 본래의 생명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민중의 불교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신채호는 항일투쟁 노선을 천명한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에서 구시대에 ‘국가의 노예’ 노릇을 하던 ‘인민’이 아닌, 스스로 각성한 주체인 ‘민중’이 일체의 불평등 · 부자연 · 불합리를 타파하는 혁명을 성취하는 것이 항일투쟁의 올바른 노선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근대적 자각을 구현하는 사상은 체계적으로 정립되거나 학문으로 연구되지는 않았다. 이치의 근본을 치밀하게 따지는 작업이 앞시대의 방식대로 이어지지 않았으며, 당대에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를 받아들여 철저한 논란을 차분하게 펼 수 있는 기풍이 조성되지 않았다.
‘철학’이라고 새롭게 이름지어진 학문은 일본을 거쳐 서양에서 가져온 개념과 논리로 이루어졌다. 일본어를 번역한 술어를 괄호 안에 원어를 넣고 사용한 문장이 이어지게 되었고, 그런 틀을 이용하여 자각적인 사고를 전개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세상이 요구하는 학문과 고등교육기관에서 하는 제도화된 학문 사이에 상당한 거리가 생겼다.
전통시대의 자료를 중요시하면서 역사적 고찰을 일삼는 학문은 흔히 국학이라고 일컬어졌다. 국학은 일제가 설립하거나 통제하는 고등교육기관에 소속되지 않은 학자들도 할 수 있었으며, 서양 전래의 이론이나 방법에 그리 크게 의존하지도 않았다. 애국계몽운동의 논조를 구체적인 자료에 의한 연구로 입증하여 널리 펴내고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것이 국학의 사명이었다.
그런데 국학은 현대의 문제까지 아울러 다루는 데 무력하고, 역사나 문화의 일반 이론을 구축하지도 못하였다. 그러한 영역은 서양 전래의 학문이 맡아서 다루도록 하는 관례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국학’과 ‘양학’을 통합하여 문화의 보편논리에 입각해서 민족문화를 연구해야 학문에 있어서의 자주적 근대화가 온전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조선 후기의 문학은 전근대문학 또는 중세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성향과 근대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성향을 아울러 지녔다. 그러면서 근대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성향이 확대되는 추세를 보였다. 이러한 사실을 한꺼번에 지적하면, 조선 후기의 문학은 중세문학에서 근대문학으로의 이행기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한문학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나, 당대의 현실을 자세하고 실감나게 표현한 작품이 한문소설이나 한시 가운데에도 있었다.
국문문학의 영역이 확장되면서 상품화되어 팔리는 소설이 나타났다. 사설시조 · 판소리 · 탈춤에서는 현실인식이 생동하는 표현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면서 국문소설에는 중국을 무대로 한 것이 적지 않았다. 사설시조 · 판소리 · 탈춤은 물론 국문소설마저 전문작가의 창작물로 인정되지 않았다.
중세문학에서 근대문학으로의 이행기가 완결되기 위해서는 몇 단계의 변화를 겪어야 하였다. 1860년부터 몇 해 사이에 동학 가사가 이루어져 사회개혁과 외세배격을 주장하는 문학으로 나아가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애국계몽 운동에서 주장하고 제시한 문학이 민족의 현실을 발견하고 민족정신의 각성을 촉구하면서 근대적인 주제의식을 더욱 뚜렷하게 나타내게 되었다. 1894년의 갑오경장 이후 국문을 공용하게 되면서 한문학 청산의 결정적 계기가 마련되었다. 1906년에 신소설이, 1908년에 신체시가 발표되면서 작품을 꾸미는 방식이 달라진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중세문학의 잔재를 청산하고 근대문학을 완성하게 된 것은 3 · 1운동 이후 1920년대 동안의 신문학운동에 의해 이룩된 변화이다. 당시에는 한문학을 제외한 국문문학만 문학이라 규정하고, 한문에서 유래한 격식이나 국한혼용문의 문투를 버리고 일상생활에서 실제로 사용하는 말을 활용하려고 애썼다. 또한 직접 드러내놓고 사실을 설명하고 주장을 전달하는 문학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규정하였다.
그래서 서정시 · 소설 · 희곡을 문학의 기본 영역으로 삼았다. 서정시는 일정한 율격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시라야 시인의 내면의식을 제대로 나타낼 수 있다 하였다. 소설은 당대의 현실을 자세하고 실감나게 그려 많은 독자의 관심을 끌어야 한다고 하였다. 희곡 또한 작품으로 창작되며, 등장인물의 대사를 적절하게 마련하여 긴박한 구성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와 함께 전문적인 작가가 뚜렷한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 점이 앞시기까지와 크게 달라 근대문학의 한 가지 기본 특징이 된다. 조선 후기까지에는 한문학 작가는 이름이 밝혀졌으나 문학 창작에 전념하는 것으로 생업을 삼지는 않았고, 국문문학의 작가는 보수를 바라고 작품을 썼더라도 이름을 내지 않은 무명씨였다. 애국계몽기에도 이런 관습이 이어지는 한편, 가명 · 필명 · 익명 등을 이것저것 쓰면서 신문이나 잡지에 글을 발표하는 방식이 유행하였는데, 계몽의식이 작가의식보다 앞섰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1920년대부터는 작가의 이름이 본명이든 필명이든 반드시 밝혀지고 한 가지로 고정되어 등록상표와 같은 구실을 하기 시작하였다. 작가는 자기 작품에 대해 저작권을 가지므로 이름이 밝혀져야 하고, 독자와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갖기 위해 이름을 고정시켜야 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출현한 근대의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작가는 문학 창작에 전념하면서 생업을 마련하고 평가를 받는 데서 사는 보람을 느끼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오랫동안 신문 · 잡지 · 출판의 영업이 제대로 되지 않아 원고료가 적거나 없고 인세수입 또한 기대하기 어려웠다. 1930년대 당시 신문 연재소설을 쓰는 작가라야 중등학교 교원 월급의 절반쯤 되는 원고료를 받아 가까스로 살아갈 수 있었다. 그렇지 못한 작가는 다른 수입이 있어야 문학을 할 수 있었다. 최근에는 원고료와 인세로 살아가는 작가가 더 많아지고 수입이 대폭 늘었지만, 소설가라야 그럴 수 있다는 조건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문학 창작을 생계 도모의 보조수단이 아니라 모든 정열과 노력을 바쳐 수행해야 하는 성스러운 과업으로 여기는 작가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널리 읽히고 높이 평가되지 않는 이유가 세상의 잘못이나 독자의 무지에 있다고 여기기 일쑤이다. 문학하는 노선이 다양하고 그 때문에 많은 논란이 일어난 것이 근대문학의 또 한 가지 특징이다. 논란을 전문적인 소임으로 삼는 문학비평이 줄곧 부추겨 와서 노선의 차이가 더욱 확대되었다.
지난 시기 문학의 전통을 찾아서 되살려야 한다는 노선이 있고, 서양문학의 이식에 힘써야 새로운 문학을 이룩한다는 노선이 있어 서로 대립되었다. 문학은 세상의 잘못된 것을 집어내 바로잡는 투쟁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문학은 문학 그 자체의 순수성을 추구하는 데 그쳐야 한다는 주장과 대립되었다. 상업적인 통속문학을 무시할 것인가, 이용할 것인가, 추종할 것인가 하는 것도 문제이고, 이에 따라서 작품의 경향이 다양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논란과 분열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한용운의 『님의 침묵』, 김소월(金素月)의 『진달래꽃』 같은 시집이 나와 전통계승과 진지한 문제의식을 갖춘 근대시의 좋은 본보기를 이루었다.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을 잃고 희망을 빼앗긴 상황에 대하여 두 시인은 각기 자기 나름대로 대처해 희망을 고취하고, 비탄에 잠겼다. 이상화(李相和) · 이육사(李陸史) · 윤동주(尹東柱)는 더욱 적극적이고 비장한 자세로 민족의 수난을 노래하고 투지를 되찾으려 하였다. 이런 시인의 시는 오늘날까지도 널리 애송되며 깊은 공감을 주고 있다.
염상섭의 「삼대(三代」, 현진건(玄鎭健)의 「적도(赤道)」, 채만식의 「탁류(濁流)」 등의 장편소설은 단편소설에서 이미 이룩된 성과를 확장하여, 당대 사회의 모습을 충실하게 보여주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밝히려고 하였다. 하지만 희곡에서는 몇 사람의 시도가 있었으나 이에 상응하는 성과를 이룩하지 못하였다.
미술 · 음악 · 무용 · 연극 · 영화 등 예술의 여러 영역에서는 근대화를 위한 진통이 문학의 경우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서양예술의 이식이 이루어지면서, 서양화되지 않은 예술과 서양화된 예술이 명칭에서부터 구별되기에 이르렀다. 미술에서는 동양화(또는 한국화)와 서양화가 구별되었다. 음악에서는 작곡의 원리나 사용하는 악기가 서로 전혀 다른 국악과 양악이 공존하고 있다.
무용에서도 고전무용과 현대무용이 서로 다르다. 연극에서는 전통극은 거의 무시되고 서양 전래의 신극만 연극으로 인식되었다. 단지 영화는 서양에서 생성 · 전래된 것이어서 그런 방식의 대립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 예술에서는 해당 영역마다의 서양예술이 언제 소개되고, 언제부터 한국인이 익혀서 재현하게 되었는가를 살펴 근대화를 추적하는 것이 관례이다.
1910년 국권상실 얼마 전에 국내에 들어온 서양인이 서양의 미술 · 음악 · 영화 따위를 소개했으며, 그 후 일본에 유학하여 서양 전래의 예술을 공부한 선각자들이 귀국하여 국내에서 활동하는 가운데 예술의 근대화가 이루어졌다는 주장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서양화가 곧 근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므로, 그렇게 하여 이룩된 작품이 한국예술로서 어떤 의의를 지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한편, 동양화 · 국악 · 전통무용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에게서는 지난 시기의 전통 예술이 잊혀지고 없어지지 않도록 잇고 다듬는 작업이 소중하다 하겠다. 하지만 그대로 있는 것은 있을 수 없고 반드시 변화가 일어나게 마련이므로 변화가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 물어야 한다.
서양예술을 익히고 서양에 가 본바닥의 평가를 받는 것을 미술과 음악 양쪽에서는 최고의 목표인 듯이 내세웠다. 그래서 프랑스나 미국에 가서 활약하는 화가도 있고, 서양 여러 나라에서 연주생활을 하는 음악가도 있다. 그러나 창조적인 의의가 평가되기 위해서는 서양예술가들이 지니지 못한 정신세계를 우리 전통에서 찾아내어 현대화하고 보편화하여야 하는데, 서양에서의 노력보다는 떠나기 전의 수련이 모자라 그렇게 하기 어려웠다.
서양예술의 경우에는 도입한 기법의 우수성보다 나타낸 사연이 얼마나 절실한가에 따라서 지속적인 평가가 결정되었다. 홍난파(洪蘭坡)의 가곡, 나운규(羅雲奎)의 영화, 이중섭(李仲燮)의 그림 같은 것은 그런 면에서 소중한 의의를 지녔다. 전통예술을 잇는 경우에는 전례를 추종하지 않고 독창적인 재창조를 이루어 자기 세계를 개척하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 이상범(李象範)이나 변관식(卞寬植)의 그림은 산수화의 전통을 이었지만 실제로 본 눈앞의 대상을 개성이 뚜렷한 필치로 그렸으므로, 널리 주목하여야 할 선례를 이룩하였다.
국악에서도 새로운 곡을 작곡하려는 시도는 흔한데, 그림에서처럼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려는 의지가 부족하고 현대의 양악과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려 하는 탓에 두드러진 성과가 축적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신극이 이식예술로서 지니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전통극에 관심을 가지고 탈춤을 재창조하자는 운동이 최근에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전달하려는 내용을 지나치게 앞세우는 탓에 예술운동으로서 정착되기 어려운 한계를 지닌다.
동양화와 서양화, 국악과 양악, 전통무용과 현대무용, 전통극과 신극이 현재와 같이 나누어져 있지 않고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은 무리한 주장이다. 매체나 기법 또는 예술적 원리에서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으므로 무리하게 통합하면 각기 지닌 장점을 상실할 수 있다. 그렇지만 서로 근접할 수 있는 대로 근접하면서 한국 근대예술로서의 공통된 사명을 깊이 인식하여야 바람직하지 않은 대립으로 인한 폐해가 줄어든다. 공통된 사명은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사상을 새롭게 갖추고 민족 공동체에 널리 공감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근대와 몰주체를 청산한 근대 민족예술로서의 의의가 그렇게 할 때 최대한 발휘되리라고 본다.
우리 나라에서 근대화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1960년대의 일이다. 그 이전에도 개화 · 근대화 또는 현대화라는 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사회의 실천적 개념으로 사용되고 또 학계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들어 정부가 ‘조국근대화’를 추진하면서였다. 조국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작업을 수행하였지만, 무엇보다도 공업화를 중심으로 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그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로 인해 우리 나라에서 사용된 근대화의 개념이 주로 공업화와 경제발전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그 이전에 시작된 문화적 변동, 도시화, 서구식 교육, 사회적 분화 등이 모두 근대화의 개념으로 파악될 수 있고, 이러한 것이 1960년대 이후 의도적으로 추진된 근대화작업과 직결되어 발달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근대화 개념이나 이론이 반드시 구미의 개념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공업화에 의한 근대화의 추진은 특히 미국에서 발달한 기능주의적 근대화이론에 입각한 것이었다. 이러한 구미식 근대화이론에 의하여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경제 · 사회발전을 추진하였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서구적 근대화의 현상을 보여주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많은 사회문제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70년대 말부터 구미적 근대화이론에 대한 비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갈등이론과 종속이론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서구적 근대화이론이라고는 하지만 이에 대한 공통된 개념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일반적으로 18세기 중엽에 일어났던 영국의 산업혁명이나 프랑스의 시민혁명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업화 자본주의와 시민사회, 민주주의의 사회적 실체와 가치에서 근대성을 찾아보고 있다. 이러한 변혁으로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의 제반 영역에서 많은 새로운 변화가 초래되었지만 서구적 근대화의 본질은 또한 공업화에 의한 자본주의와 시민적 민주주의의 가치에 기초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구미의 학자들은 근대화의 개념을 탈이데올로기적 시각에서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근대화의 개념을 경제학에서는 공업화 · 국민총생산 · 1인당 국민소득 등의 측면에서 파악하려 하고, 정치학에서는 구조분화 · 체계능력 등의 측면에서, 또 사회학에서는 평등화 · 합리성 · 세속화 · 역할분화 · 교육 · 미디어 참여 등의 면에서 파악하려는 것은 그 예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근대화의 개념은 서구적 가치에서 벗어나 사회분석의 보편적 개념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근대화의 개념을 서구화의 개념으로 파악하거나 아니면 앞서 지적한 가치와 현상을 제고시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참된 근대화의 개념은 기능론자들이 주장하는 분화 · 성장의 개념 이외에도 진보 · 평등 · 연대의 개념이 함유된 자주적 발전의 개념으로 파악하여야 될 것이다.
사회구조의 측면에서 근대화 과정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복잡하다. 기능론적 관점에서 보면 역할구조, 즉 직업이나 조직 등의 변화를 통하여 파악할 수 있을 것이고, 갈등론적 관점에서 보면 불평등구조, 즉 계급이나 계층 등의 변화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사회적 관점의 차이에 따라 근대화에 대한 이해와 평가가 다를 수 있지만, 이것이 중첩적으로 일어났던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역할구조의 측면에서 본다면, 지난 1세기 동안에 엄청난 근대화가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지난 70년간의 경험을 보아도 직업 및 고용구조의 전도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농업이 지배적인 산업 또는 직업이었는데, 오늘날에는 오히려 상공업이 지배적인 것이 되었다. 즉, 1910년에 농업종사자가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84.1%이던 것이 1942년에는 66.6%, 그리고 1985년에는 24.9%로 급속히 감소되고, 반면에 상공업 인구가 1910년에 7.0%이던 것이 1942년에 16.0%, 그리고 1985년에는 47.9%로 급속히 증가되었다.
이에 따라 가족 전체의 역할구조와 가치관도 변화되었다. 우선 상공업은 직장과 거주를 분리시키고 노동의 개별화를 촉진시켰으며, 따라서 가족노동, 마을사람들의 협동노동보다도 개별노동과 분업노동을 촉진시켰다. 특히, 1960년대 이후의 공업화와 수출에 의한 경제개발계획과 1970년대 이후의 중공업화는 노동과 기술의 분화를 더욱 촉진시켰으며, 따라서 역할의 전문화가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역할의 전문화는 고용관계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1942년에 자영업자가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77.8%이었는데 1955년에 40.1%로 감소되었고 1980년에는 31.4%로 급속히 감소되었으며, 반면에 피용자는 1955년의 12.1%가 1980년에는 43.8%로 급속히 증가되었다. 사실 1942년의 자영업자는 농업부분에 있어서 소작농의 지위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경우가 절반이 넘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자영업자와는 그 성격이 매우 다른 것이다.
이와 같이 자영업자가 감소하고 피용자가 증가된다는 것은 경영과 소유의 분리, 그리고 관리와 노동의 분리가 동시에 일어났음을 뜻한다. 또 가사종사자가 1955년의 47.8%에서 1980년의 21.1%로 감소되었다는 것은 여성이 가사로부터 자유로워졌음을 뜻하고, 따라서 여성의 노동 및 사회의 참여가 활발히 전개되었음을 나타내 준다. 이러한 역할분화는 그간의 급속한 인구증가, 교육기회의 확대 그리고 정부의 경제개발정책 등의 영향에 의하여 이루어져 왔다. 물론 도시화가 공업화에 의하여 모두 수용된 것은 아니다.
지난 20여년간 해마다 도시인구의 약 1%가 증가되고 근로자의 약 1%가 증가되었으며 자영업자가 약 1%씩 감소되어 그 비율상 균형을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초기에 농촌 자영업자의 절대수가 다른 직업인구에 비하여 훨씬 많았기 때문에 이촌농민이 모두 도시근로자화된 것은 아니며, 그 중의 약 3할이 도시의 영세민촌을 형성하였다. 이와 같이 형성된 영세민촌은 저렴한 노동력의 공급원이 되어왔으며 도시의 빈곤층을 형성하였고, 농촌에서도 저곡가정책에 의하여 대부분의 농민이 사회적 하층으로 전락되었다.
이와 같이, 우리 나라 근대화과정은 역할분화의 측면에서는 매우 긍정적 기능을 수행하였으나, 분화된 역할의 차이에 따른 보상의 차이가 심화되고 따라서 심한 불평등구조가 존재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적 계급분화가 심하게 나타났다. 이러한 불평등구조는 직업과 지역간에도 그 심한 차이가 드러났다. 즉, 생산과정에 있어서 소유와 비소유, 경영(관리직)과 노동(생산직)의 차이에 따라 보상의 차이가 심했다. 이러한 차이는 농업이 지배적인 시대에 있어서 지주와 소작인, 주인과 머슴과의 관계에서도 존재하였지만 그것은 다분히 덜 적대적이고 온정적인 주종관계의 성격이 강하였다.
역할분화가 심화되고 소유와 경영, 경영과 노동이 분화된 상태에서 수입원과 수입액의 차이가 심하였기 때문에 산업화된 사회의 노사간 계급관계는 더욱 분명해진다. 즉, 소유권자인 자본가와 경영권자인 관리자 및 생산자인 노동자간에는 소득 · 권력 · 위세의 차이가 심화될수록 적대적인 대립관계, 즉 계급관계가 나타난다. 이와 같이 대립적인 불평등구조는 심화되었지만 그것에 비하여 계급갈등현상이 심하게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 경제성장과 고용주의 이익을 위하여 노동삼권이 유보되고 노동행정이 치안행정의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특히 피용자의 계급조직, 즉 노동조합이 발달하지 못하였으며, 반면 사용자의 계급조직은 활발하였다. 근로자의 계급조직은 사업장 단위별 조직이 가능하지만 산업별 조직이 불가능하였으며, 한국노동조합총연맹도 회비에 의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자본가 · 기업가의 계급조직으로는 전국경제인연합회 · 한국경영자총연합회 · 한국무역협회 · 중소기업중앙회 등의 단체들이 나타나 노동자의 계급조직과는 대조적으로 뚜렷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대신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종교단체가 무수히 나타나 자본주의사회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하여 기능하고 있다.
지난 1세기 동안 유교문화권에서 일본문화와 서구(미국)문화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한국인의 가치관을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분명한 것은 유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전통적인 가치관이 특히 서구 문화의 유입에 따른 충격으로 인해 많이 변화되었고, 따라서 세대간에 가치관의 차이가 심하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전통적 가치관이 무엇이냐에 대한 공통된 견해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가족주의 · 공동체 의식 · 권위주의 등을 지적하고 있다. 가족주의가 사회의 기본원리로 오래도록 존재하게 된 것은 가족이 가족성원의 모든 생활책임을 담당하였고, 조상숭배와 가족적 연대를 위한 제사, 족보 간행, 공동재산의 확보 등에 의한 가족 및 친족문화가 고도로 발달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혈연적 사회구조는 지연성에 기초하여 발달하였다. 그리하여 1940년대까지 전국 자연촌락의 약 절반 이상이 동성촌락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도시화 · 공업화의 결과로 이러한 동성집단의 기능은 약화 또는 해체되었다. 다시 말하면 혈연성에 기초한 사회원리가 점차 지연성과 계약성에 기초한 것으로 변화되고 있다.
오늘날 지연성에 기초한 사회원리도 많이 변화되어 가고 있으나, 농업 · 농민이 지배적이었던 1960년대 초까지만 하여도 우리 나라의 자연촌락은 공동체적 성격이 매우 강하였다. 영농을 위한 계 · 두레 · 품앗이 등의 협동조직과 공동노동뿐만 아니라 부락제와 같은 공동문화가 발달하였고, 이러한 협동조직과 공동문화가 오랫동안 강력히 존재하였기 때문에, 농촌 · 농민출신의 가치관은 근대적 가치관이라고 말하는 개인주의적 성향과는 거리가 대단히 먼 것이다.
오늘날 대도시 인구의 대부분이 1960년대 이전에 농촌에서 사회화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직도 가족주의적 · 공동체적 의식을 많이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이 혈연과 지연에 의하여 사회화가 되었기 때문에 1950년대 이전 농촌 출신은 인정 · 의리 · 보은과 같은 가치관을 많이 지니고 있다. 그러나 구미문화(歐美文化)의 유입으로 인해 이러한 가치관은 급속히 감소되고 있다.
권위주의적 가치관은 가부장적 가족문화의 영향도 있지만 6백여년 이상 지속되어 온 관료 양반사회의 뿌리깊은 영향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조선시대의 양반은 관료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관료의 지속적 충원이 양반의 문벌을 유지하는 길이었다. 따라서 양반 · 관료가 지배하는 사회의 문화를 형성하기 위하여 유교문화가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전통사회의 지배계급이었던 양반관료는 그들의 특권을 누리기 위하여 반상제도(班常制度)를 형성하였고 동시에 관료세계에서도 문무 · 품계에 따라 예 · 의복 · 언어 · 형벌 등 생활양식의 차이를 두었다. 이러한 신분사회에서 양반 · 관료는 상전의식을 지니고 상민에 대한 천대의식을 지녔던 것이다. 이러한 권위주의가 조선 말기에 있었던 민란 · 동학란, 그리고 개화 · 갑오개혁 등에 의하여 많이 해체되었으나, 일제가 강점하면서부터 그들의 관료주의와 군국주의 문화에 기초한 권위주의가 다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한 권의주의 문화는 광복 후 미군정에 의하여 일시적 충격을 받았으나, 1960년 이후 군정에 의하여 전통적인 권위주의 및 관료주의는 더욱 강력히 존재하게 되었다. 이는 관료를 견제할 수 있는 민주주의가 발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을 그들이 주도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 국민의 전통적 가치관은 많이 해체되었지만 아직도 기성세대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광복 이후 전개된 서구식 교육 및 도시화 · 공업화의 영향에 의하여 가치관은 더욱 해체되어 가리라고 판단된다.
사회구조와 가치관의 변화에 따라 생활양식에도 많은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전통적인 생활양식이 더 우세한 경우가 많이 있으며, 1970년대에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현대화시키려는 작업도 있었다. 사실 생활양식 가운데 어떠한 것이 근대적이고 선진화된 것인지를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양식이 어느 정도 서구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는가를 지적하는 데 그치고자 한다.
의생활에 있어서 우리의 전통적인 의상은 한옷인데, 이것이 오늘날 양복으로 많이 변용되었다. 특히 도시인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양복과 양장을 많이 입으며, 나이가 든 부인일수록 한옷을 입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농촌인들은 도시인에 비하여 한옷을 더욱 많이 입고 있다. 특히 노인이나 주부들은 거의 한옷을 입고 이따금 작업시에 개량된 옷을 입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이 양복 · 양장을 많이 입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의 영향도 있지만, 특히 광복 이후 미군정 및 6 · 25전쟁 이후 서구의 문화와 상품이 유입된 결과이다.
6 · 25전쟁 전만 하여도 읍 · 면 소재지에 있는 초등학교 학생의 대부분이 한옷을 입었으며, 비록 양복을 입었다 할지라도 자기 집에서 손수 만든 옷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 이후 나일론 제품이 보급되고 농촌경제가 본격적으로 상품시장권에 편입되면서, 한옷과 자가제품의 양복은 점차 사라졌다. 1960년대 이후에는 산골에서나 겨우 한옷을 입은 학생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신발류도 일제강점기 초기까지는 짚신을 주로 신었으나, 그 뒤에는 고무신, 그리고 1960년대 이후는 운동화를 많이 신게 되었다.
식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채식 위주였으나 오늘날에는 육식으로 바뀌고 있다. 특히 주식은 밥과 국이었으나 오늘날 젊은이들은 빵과 우유를 많이 애용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6 · 25전쟁 이후 미국의 잉여농산물인 밀가루 원조가 많아서 특히 어린이의 입맛을 바꾸어놓았기 때문이다.
주생활에서도 가옥의 형태와 구조가 크게 변화되었다.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도 초가삼간이 전형적인 우리의 주거형태였으나, 1970년대 새마을운동으로 지붕개량사업이 전국적으로 실시되어 초가가 거의 없어지고 기와와 슬레이트지붕으로 전환되었다. 또한 농가주택 개량사업으로 토담과 흙집이 블록담과 기와 또는 슬라브 등의 양옥으로 많이 변모되었다. 한편 도시에는 1960년대 말부터 보급되기 시작한 아파트가 급속히 건설되어, 오늘날 서울의 경우 전체 가구의 3할 이상이 아파트 주민이다. 그리하여 대도시에는 새로운 아파트문화가 형성될 정도로 주생활의 커다란 변혁이 일어나고 있다.
교육수준에도 학력이 대단히 높아지고 있다. 광복 당시만 하여도 초등학교의 취학률이 취학연령아동의 절반 미만이었으나 1970년 이후에는 취학률이 100%가 되었으며, 중학교의 경우도 1980년에 94.6%, 고등학교의 경우는 68.5%, 대학의 경우는 1975년에 12.2%였다. 이로써 국민의 취학률이 급속히 증가되었고 교육열이 대단히 높음을 알 수 있다. 비록 학력이 길어도 평균수명이 길어져서 그만큼 직력(職歷)이 또한 길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남녀간 학력의 차별은 아직 존재하고 있으나 예전에 비해 많이 감소되었고, 또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대단히 활발해졌다.
그 밖에도 교통 · 통신은 전자산업의 혁명적인 기술발전으로 전국이 자동통화권이 되었고 교통도 전국이 1일생활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 밖에 전화 · 텔레비전 · 라디오 · 자동차 등의 보유율도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또한, 음악과 의학 분야에서도 서양음악과 서양의학이 보편화되었지만, 최근에 와서 국악과 한의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종래의 5일장이 점차 없어지고 슈퍼마켓 등 상설시장화되어 가고 있으며, 국민의 기본욕구 또한 가족과 마을 주민에 의한 자조사업에 의존하였으나 현재는 이러한 기능이 사회보장 등에 의하여 대체되고 있다.
근대화라는 개념은 기능론적 관점에서 말하는 분화 또는 성장의 개념 이외에도 그것이 사회구성원들에게 행복과 만족을 제공할 때 가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화라는 개념은 진보와 평등 및 연대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갈등론적 관점의 뜻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나아가 시간과 공간의 비교평가에서 그 참된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의 사회발전이 과연 참된 자주적 근대화의 의미를 지녔는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최근, 광복 이후 한국사회를 종속이론 또는 신식민지론으로 규정하는 것을 이따금 볼 수 있는데, 이는 우리의 근대화에 자주성이 결여되어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근대화의 개념을 경제학에서는 주로 공업화를 강조하고 정치학에서는 민주화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도 궁극적으로는 경제적 풍요와 민족국가의 형성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므로 근래 우리 나라의 근대화작업이 과연 국민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25년 동안 공업화에 의한 근대화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근대화작업에서 1차적 가치는 서구적 모델이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러한 근대화가 심화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외국자본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력과 기술개발에 의한 후기산업사회와 복지국가를 건설해야 될 것이다. 사실, 지난 1960년대 이후의 공업화에 의한 경제개발계획은 재벌과 국민총생산을 성장시키는 데 기여하였지만, 지역간 · 계층간 불평등을 조성하였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즉 빈곤과 범죄 및 가족해체 등과 같은 사회문제가 심화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되는데, 그간의 민주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이러한 문제와 갈등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였다. 지난날 선(先)성장 후(後)분배의 근대화 작업과정에서 가장 많이 희생된 농민과 노동자의 이익이 보호되지 못했고 또 그들의 사회의식이 대단히 낮기 때문에, 그 간 대학생 · 지식인들이 중심이 된 민주화투쟁에 의해 1980년대의 노동운동이 광범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사회적 갈등을 수용할 수 있는 갈등의 제도화, 즉 입법과 정책이 강구되지 못해서 비합법적 폭력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미 사회구조적 근대화과정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 나라의 가족과 지역사회는 급속히 해체되었고, 공업화에 의한 근대화정책은 대량의 노동자를 창출하였다. 이들의 계급적 · 사회적 이익과 갈등이 수용되지 못할 때 많은 폭력이 잠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민주주의의 사회세력으로서 노동자의 중산층화를 위한 정책이 필요하다.
한편, 한국인의 가치관은 서구문화의 이식으로 말미암아 많은 가치갈등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치관 등은 단순히 문화적 차이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고, 사회구조가 서구적으로 변화를 겪게 되었기 때문에 더욱 심각하였다. 광복 이후 한국인에게 미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미국문화라 할 수 있다. 미국문화의 가치특성인 보편성 · 실용성 · 개인성 · 전문성 · 비정의성 등이 만약 근대적 특성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미국문화는 우리 나라의 근대화에 큰 기여를 했다고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는 한국인이 잘못 수용했거나 또는 우리의 풍토에 들어맞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사회적 역기능을 초래하였다. 예컨대 자유주의가 자유방임주의로, 개인주의가 이기주의로, 실용주의가 배금주의로, 서부활극이 폭력예찬으로 잘못 인식되어 많은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사회적 배경이 다른 곳에서 형성된 문화와 가치를 근대적인 것으로 착각하여 맹목적으로 수용할 것이 아니라 이것을 비판적으로 수용할 필요성이 있고, 만약 잘못 수용하는 경우 문화적 종속을 심화시킬 가능성이 크다는 인식이 자리잡게 되었다.
사실, 문화와 가치에는 우열이 없고 선 · 후진이 없다. 문화적인 생활양식에서 서구적인 것을 근대적인 것으로 착각하여 양식을 좋아하다가 성인병에 걸리거나, 온돌에 맞지 않은 양장의 불편을 느끼는 것은 이른바 갓쓰고 자전거 타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물론 양장 · 양의 · 양식 등의 양풍(洋風)을 오랫동안 모방하게 되면 그것이 체질화되는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고유한 한옷 · 한의 · 한식과 같은 문화도 애용할 수 있도록 현대화시킬 필요가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