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연극에서 ‘신극’이라는 용어는 두 가지로 대별하여 사용된다.
그 하나는 넓게 보아 전통적 구극(舊劇), 또는 거기에 준하는 여러 연희형태를 제외한 근대(개화기) 이후의 연극을 총칭하는 경우로, 여기에는 ‘신연극’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것이 상례이다.
이와는 달리 우리 나라 현대연극의 특수한 발전과정에 비추어 보다 한정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경우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성을 들 수 있다.
첫째, 일본연극과의 대비에서 보는 관점이다. 메이지(明治) 이후의 일본 연극에는 가부키(歌舞伎)가 대표하는 전통구극과 거기에 대립되어 발생한 신파극(新派劇)이 있었다. 그러나 1910년경 서구의 새로운 연극의 영향을 받아 ‘근대극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계열의 연극이 ‘신극’이라는 이름으로 통칭되었으며, 그 도화선이 된 것이 1909년에 발족한 분게이쿄카이(文藝協會)와 지유케키조(自由劇場)이다. 따라서, 1880년대 이후에 발생한 서구 근대극의 직접 영향 아래 연극의 근대화와 서구화라는 과제를 표방하고 신파극에 대항하여 나선 것이 일본 신극이었다.
당시 우리 나라는 일본과 연극발전의 유형이 비슷하였기 때문에 1910년대를 대표하는 신연극이 신파극이었다면 1920년대에 비로소 ‘신극’이라는 개념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그 계기가 1910년대의 일본 초기 신극운동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둘째, 신극운동은 일본 연극을 매개하였으되 그 본래의 성격이 연극을 통한 의식의 근대화, 사회개량, 자아의 각성, 새로운 형식, 특히 무대의 리얼리즘 추구 등 혁신을 표방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시기 문화의 전반적 경향이 서구 근대를 바탕으로 근대화를 지향한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더구나 연극을 대중오락 이상의 것으로 보며 발전지향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받아들이고자 하였던 당시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에게 크게 호소하였다.
아울러 일본의 경우와 비슷하게 우리 나라 신극도 서구 근·현대극의 번역 공연에 치중하는 경향이 농후하였으며, 그 주류가 리얼리즘 또는 자연주의의 성향을 농후하게 띠고 연극이 시대의 거울 또는 개혁자의 구실을 강조하는 데 민감하였다.
셋째, 신극은 연극의 상업화와 대중화를 기피함으로써 비영리적·반직업적 성격의 연극운동으로 결집되는 성격을 띠었다. 지적 수준을 강조하는 동인제(同人制) 형태를 띠는 경우가 많았으며 주장과 의도를 명백히 하는 문화 전위적 체질(前衛的體質)의 장단점을 아울러 지녔다.
따라서 연극이 대중 속에 침투되기 힘들어 직업화에 부적합하고 관념적으로 흐르는 폐단도 지적되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 현대극의 주류는 바로 이 신극으로 하여 형성되었고 문화운동적 소명감(召命感)에 충실했던 점은 높이 평가받을만하다.
1910년대 신파극이 주종을 이루었던 신연극의 태동기를 거쳐 우리 나라 신극운동은 1920년대 초에 시작되었다. 그 움직임의 시작으로 현철(玄哲)의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는 1920년에 ‘예술학원’으로 시작하여 1924년에 ‘조선배우학교(朝鮮俳優學校)’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여기서 뚜렷이 나타난 것은 신파극으로 대표되는 기성연극의 거부이고 그 방법론으로 새로운 연극인재의 양성을 강조하였다.
때를 같이하여 김우진(金祐鎭)·조명희(趙明熙)·홍해성(洪海星) 등을 주축으로 한 동경유학생들의 극예술협회(劇藝術協會)가 발족하였다. 그들의 주된 연구대상이 셰익스피어(Shakespeare,W.)·하우프트만(Hauptmann,K.)·체호프(Chekhov,A.P.)·고리키(Gorki,M.) 등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극운동의 지향목표가 서구의 근·현대극임이 이미 뚜렷하다.
그리고 이들이 1921년에 당시 동경에 유학중인 고학생의 모임인 동우회(同友會)의 요청을 받아 하기순회연극단을 조직하여 10개 지방도시를 순연한 사실은 연극을 통한 사회개혁을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우리 나라 신극운동 성격의 일부를 말해준다.
신극운동의 시발점이 대체로 학생, 특히 일본 유학생을 중심으로 일어났다는 점 또한 주요한 특성의 하나이다. 또한 1912년 이래로 개량신파(改良新派)를 표방해온 윤백남(尹白南)·이기세(李基世) 등이 이 시기에 신극으로 방향전환, 각기 민중극단 또는 예술협회 등을 조직한 것도 신극시대의 도래를 예고하는 것이다.
이들의 활동과 직접·간접으로 결부하여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창작극이 출현하게 된 것 또한 주목할만하다. 신파극적 잔재를 완전히 불식한 것은 아니나 3·1운동 이후의 시대적·사회적 변화가 가져온 근대적 자아의 각성과, 그것이 기존의 각종 반봉건적 폐쇄적 가치관에 부닥쳐 일어나는 여러가지 갈등을 이들 극작가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윤백남·이기세·조명희·김영보(金永俌)·김정진(金井鎭)·조춘광(趙春光)·홍노작(洪露雀) 등이 바로 그들이다. 그러나 1920년대를 대표하는 신극운동의 중심은 토월회(土月會)였다.
동경 유학생들이 모여서 1923년에 조직한 이 모임은 박승희(朴勝喜)를 비롯하여 9명의 동인이 결성한 아마추어 연극연구단체로, 여름방학을 이용한 한 번 공연이 목적이었던 것이 끝내 연극공연단체로 변신하여 1926년 1차 해산 때까지 56회의 공연을 가지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우리 나라 신극의 선두주자로서의 역사적 사명을 이룩하게 되었다. 그 성격과 업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극운동의 기본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무대 위의 리얼리즘의 추구를 들 수 있다. 체호프·쇼(Shaw,G.B.)·톨스토이(Tolstoi,L.N.)·스트린드베리(Strindberg,A.) 등 비교적 다양하게 서구 번역극을 도입, 근대극적 문학성을 살리려 하였다. 둘째, 연극제작의 종합적 측면에서 장치·의상·조명 등에 본격적 관심을 보여 예술로서의 연극을 지향하였다.
셋째, 신파극 출신이 아닌 신인연기자를 양성, 신극의 전문화와 직업화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 공적은 주로 극단지도자 박승희에게 돌릴 수 있으나, 그러한 노력이 거꾸로 발족 당시의 극단의 성격을 퇴색하게 하여 결국 상업적 신파극단으로 후퇴시키고 말았다.
1930년대의 신극운동은 <토월회> 중심의 1920년대 신극운동에 대한 반성과 보완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곧 연극의 비속화(卑俗化)에 대항하는 의식의 재무장과 신극을 문화현상의 일환으로 보는 보다 높은 차원의 인식이다.
그러한 운동을 단적으로 표방하고 나선 것이 바로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였다. 1930년대 신극이 이 한 곳에 총집결하였다는 의미에서 토월회와의 대비는 10년 간격의 우리 나라 신극발전을 요약하여 설명하여 준다.
이와 같은 대비는 일본 신극사에서의 분게이쿄카이 또는 쇼게키조(小劇場)의 구실과 1924년에 발족한 스키지지유게키조(築地自由劇場)와의 대비와 아주 비슷하다.
전자가 서구 근대극 도입에 개량주의적(改良主義的) 태도로 임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후자는 본격적 섭취를 지향하였고, 전자가 신극을 비속화시킨 경향이 있었던 데 비하여 후자는 철저하게 실험적 성격을 강조, 연극의 엘리트화를 고집하였다는 사실이 토월회와 극예술연구회 사이의 차이를 설명하여 준다.
1931년 ‘극연동호회’라는 명칭으로 발족한 12명 동인의 극예술연구회는 처음부터 극단활동에 신중을 기하여 ‘새로운’ 신극운동을 위한 정지작업을 펴 ‘실험무대’의 시연(試演)을 시작으로 활동에 나섰다.
대부분 해외문학파출신인 이들이 전문적 경험을 가진 연출자를 앞세워 작품도 <검찰관>(고골리 작)을 채택한 것은 이 단체가 토월회의 전철을 밟지 않고 그 뒤 9년이라는 장기간을 지도적 위치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그 첫 단계로서 매우 신중한 출발이었다.
1939년 일제의 가혹한 문화탄압책의 일환으로 강제해산 당하기까지 우리 나라 신극수립의 초지를 관철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성격과 지향이 비교적 뚜렷하였기 때문이다.
그 성격을 신극운동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면, 첫째, 우리 나라 연극에 리얼리즘을 본격적으로 도입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런데 그 방법으로서 번역극 공연에 치중하게 되어 연극이 대중과 접합할 수 있는 기회에는 등한하였으나, 신극수립의 매개역으로서 근대 리얼리즘의 대표작가들의 작품을 망라하였다는 점은 그런대로 평가받을 수 있다. 나아가 그 바탕 위에서 유치진(柳致眞)을 비롯한 본격적 신극작가를 배출시킨 공적은 높이 사야 할 것이다.
참고로 이 단체가 상연한 희곡을 분류하면 번역극이 24편으로 그 가운데 23편이 러시아를 위시한 서구 근·현대극이고, 창작극은 12편인데 그 가운데 유치진의 작품이 반수를 차지하고 있다. 다시 말하여 극단의 목표지향적 집중도가 매우 높다.
둘째, 연극을 고차원적인 문화현상의 일부로 격상시킨 것은 동인들의 문화 엘리트의식과 결부된 것이기는 하나 식자층으로 하여금 연극을 존경받는 예술로 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연극행위에 사회의식을 부여해 민족운동적 성격을 띠게 하는 데 적지않게 공헌하였다.
비록 사상적으로 중간파이고 사회현실을 무대 위에서 나타내는 데 미온적이었다는 비판은 가능하나 일제의 검열과 감시의 끊임없는 과녁이 되었다는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그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셋째, 우리 나라 신극사의 맥락에서 볼 때 이 단체의 활동이 현대연극 발전의 중추적 위치에 서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여기에서 배출된 유치진·서항석(徐恒錫) 등 연극인이 광복 후 극계의 주류를 형성하였을 뿐 아니라 학생극과 소극장운동을 포함하여 우리 나라 신극체질에 극예술연구회적 성격이 뿌리 깊게 스며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우리 나라 신극사의 맥락에서 크게 보아 8·15광복 후 현재까지의 연극활동을 앞선 시기와 비교해본다면 신극운동의 새로운 움직임은 매우 뚜렷하다.
먼저 광복 전에 ‘신극’과 대립하여 상업연극의 주종을 이루었던 신파극, 특히 고등신파(高等新派:1930년대에 극예술연구회와 첨예하게 대립되었던 동양극장계열의 연극)와 중간극(가극단과 악극단을 포함) 등 대중적 상업연극의 퇴조를 들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종류의 연극이 1950년대 중반까지 명맥을 유지하여왔음은 적지않은 공연기록으로 알 수 있으나, 광복 전과는 그 비중에 있어 현격한 차이를 나타낸다. 그 원인의 하나로서 6·25전쟁으로 신파극계열 연극인의 많은 월북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뿐만 아니라 1950년대 중반 이후에 활성화되기 시작한 국산영화의 양산, 라디오 및 TV 등 방송매체의 연속방송극의 대두 등으로 하여 연극의 신파극 역할은 끝났다. 따라서 연극은 신극계열 일색으로 변모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신극 자체내에서의 시대적·사회적 변천에 따른 변화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먼저 8·15광복 후 6·25전쟁까지의 혼란기는 격심한 좌우대립과 사회혼란으로 인하여 신극운동이 특정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는 기형적 양태를 나타내기까지 하였다.
6·25전쟁으로 인한 연극계의 격심한 타격에도 불구하고 회복기에 들어서면서 1950년대의 대표적 극단인 ‘신협(新協)’의 경우 극예술연구회의 전통적 계승자임을 명백히 하면서 새 시대와의 호흡조절에도 민감한 일면을 보였다.
그러나 1955년 이후 반기성(反旣成)을 표방한 ‘젊은 연극’의 기수들이 출현하기 시작, 다시 소극장운동 쪽으로 전환하였다.
그 공통된 성격으로서 동인제에 의한 특정한 목표추구, 기성연극과의 비타협, 과감한(때로는 독선적인) 자기주장, 실험정신의 강조 등을 들 수 있다. 따라서 현대 우리 나라 연극은 신극운동의 전반적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고 성장해왔다고 할 수 있다.
1950년대 후반에 태동한 제작극회(制作劇會), 1960년대 초의 실험극장·자유극장·동인극장 등은 그 명칭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동인제 집단이며, 그들이 우리 나라 현대 연극을 주도해왔다는 사실은 신극의 이념 및 실천이 얼마나 뿌리 깊게 우리 나라 연극에 박혀 있으며 또한 그만큼 연극발전의 제약조건이 되어왔는가를 잘 말하여 준다.
특히 소극장운동은 신극운동의 연장선 위에서 그 성격을 점점 변모시키면서 1970년대에서 1980년대 연극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연극의 대형화와 직업화에 저항하는 큰 세력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우리 나라 연극의 본질적 구조와 깊이 관련되어 있을 뿐 아니라, 새 세대의 ‘젊은 연극’이 새로운 목소리와 실천방법을 획득하여 나가는 데 여전히 필요한 형태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