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 하나하나를 어휘라고 일컫는 일이 있으나 단어는 어휘를 구성하는 자료일 뿐이다. 어휘가 풍부하다는 말은 표현성의 풍부함을 위해서 어휘가 많은 자료를 보유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좋다.
여기서 말하는 ‘특정한 언어체계’는 다음과 같은 것을 포함한다. ① 한국어·영어 등 특정한 개별언어, ② 충청도방언·경기도방언 등 특정지역의 언어(지역방언), ③ 여러 사회계층의 언어, 각 전문분야의 언어 등도 포함된 이른바 사회방언, ④ 개인의 언어, 개인이 실지로 사용하는 언어는 한 종족이 가지는 언어체계 속에서 선택된다.
이와 같은 여러 종류의 특정한 언어체계가 가지고 있는 어휘소의 총체가 그 언어체계의 어휘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어휘소라고 하는 것은 직접으로 의미와 대응되는 기본적인 단위이며, 구체적으로는 보통 말하는 단어가 중심이 되고 단어보다 하위단위인 형태소가 포함된다. 또, 단어보다 상위단위인 구(句)도 그것이 전체로서 하나의 사물과 대응되어 있거나 한 사물의 존재·상태·움직임 등을 대표한다면 문(文)의 기본단위가 된다는 점에서 역시 어휘소라고 할 수 있다. 어휘소란 한 언어체계에서 어휘를 형성하는 자료가 된다.
어떠한 계층의 언어체계에서나 어휘를 형성하는 자료들은 그것을 모어(母語)로 사용하는 사람들의 의미의 체계와 대응관계를 가진다. 생활양식, 감정, 사고의 방식과 그 영역, 그리고 그들의 생활환경에 따라 각각 의미의 체계를 달리하는 각 언어의 사용자들에게 필요 적절한 자료(어휘소)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 각 언어체계가 가지는 어휘의 체계다.
흔히 지구상의 언어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좋은 언어, 더 발달된 언어인가를 말하는 일이 있다. 그 중에는 보다 분석적인 것도 있고 보다 종합적인 것도 있다. 따라서, 한때는 분석적인 언어일수록 보다 발달된 언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언어의 우열을 가리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또, 언어사용자를 중심으로 보면 높은 수준의 문화를 가진 사람들의 언어와 낮은 수준의 문화를 가진 사람들의 언어, 그리고 아주 미개한 사람들의 언어가 있다. 그러나 문화수준의 고저를 가지고 그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옳지 않다. 브라질의 바카이리족(Bakaili族)의 언어는 앵무새의 종명(種名)은 있으면서도 그 강명(綱名)이 없다. 또한,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에게는 새·나무·물고기와 같은 강명이 없고 특정한 종류를 의미하는 종명만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이들 원시민족에게 일반화 내지 추상화의 능력이 그만큼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미개하다거나 발달이 되지 않은 것은 그 언어의 사용자들이며, 언어가 아니다. 그들 원주민에게는 그러한 의미분야에 결손(缺損)이 있는 것이다. 소쉬르(Saussure,F.d.)의 말을 빌리면 ‘소기(所記, signifie)’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 대응되는 ‘능기(能記, signifiant)’, 다시 말하면 단어가 있을 리 없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단 한 번도 인간의 심리가 지향해 보지 못한 사물에는 명사가 없다. 이것은 어휘의 자료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의미의 체계에 따라서 마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어사용자의 의미의 체계와 어휘의 체계는 상호관계를 가진다. 그러므로 어휘의 우열, 나아가서 언어의 우열은 의미체계에 대한 어휘체계의 적합성의 정도를 가지고서만 측정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측정은 아직 단 하나의 언어에 대해서도 행해진 일이 없고 그 가능성조차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그러나 의미의 분야, 언어와 인간의 심리, 언어와 사고(思考), 사물과 인식, 사물과 언어 등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질 때까지 이러한 문제에 대한 분명한 논의는 유보되어야 할 것이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기호의 체계라고 한다. 언어를 ‘언어행동·언어활동’으로 볼 때는 그것이 인간의 행동이지만 거기 사용되는 자료를 중심으로 생각할 때는 언어는 기호의 체계이다. 인간의 언어활동은 두 가지의 측면을 가진다. 표현 전달하는 행동과 그것을 청취 이해하는 행동이다. 전자는 이른바 ‘말하기’와 ‘쓰기’의 문제이고, 후자는 ‘듣기’와 ‘읽기’에 관련된다.
언어활동을 이렇게 구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면 어휘도 이 두 가지 측면에서 구별할 필요가 있다. 표현 전달에 동원되는 자료의 총체를 발표용 어휘 또는 적극적 어휘라고 하고, 청취 이해와 관련된 것을 인지용 어휘(認知用語彙) 또는 소극적 어휘라 한다. 이 두 가지 측면을 구별할 필요가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나’ 이외의 모든 한국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를 ‘나’는 이해하지만 실제로 ‘내’가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는 한국어의 모든 어휘소를 다 사용하지는 않는다. 수십만의 어휘소 중에서 어떤 개인이 실제로 사용하는 것은 수만에 불과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본어휘니 기초어휘니 하는 개념이 필요하다.
하나의 개별 언어체계는 수십만에 달하는 방대한 어휘자료를 가지기도 한다.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교육정도·직업·성별, 기타의 생활환경이나 조건에 따라서 사용어휘에 편차를 보인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어 사용빈도가 높은 것이 있으며, 그 중에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것이 상당수 있다. 이 공통어휘 중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정상적인 기본생활을 하는 데 필요하다고 간주되는 것을 기본어휘라고 한다.
기본어휘는 언어의 학습이나 언어의 교육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기본어휘의 수는 특별히 몇 개라고 고정되어 있지 않으나 보통 1,500∼3,000개 정도로 보고 있다. 기본어휘를 조사, 선정하는 방법에는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이 있다. 주관적인 방법은 각 생활영역에서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것을 다만 주관적인 판단에 의해서만 선정하는 것이다.
객관적인 방법은 각종 서적·문서·서간, 그리고 각종 음성언어활동에서 사용되는 말의 수(이것을 ‘異語數’라고 한다.)와 그들이 사용되는 총빈도수로부터 각 요소들의 사용빈도와 그들의 각 영역에서의 분포상태를 통계적으로 처리하여 가치순위(價値順位)를 정하는 것이다. 보다 바람직한 것은 주관적인 방법과 객관적인 방법의 종합이다.
기초어휘는 기본어휘와 달리 사용빈도보다는 한정된 소수의 어휘자료(어휘소)에 의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일상생활 각 영역에서의 필요가 충족될 수 있도록 계획적으로 선정된 것이다. 이것만으로 하나의 체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선정한다는 점에서 기본어휘의 선정과는 다르다. 기본어휘와 기초어휘 사이에는 공통자료가 많다. 기초어휘는 대체로 사회적인 격변에 따라서 영향을 받는 일이 적고 일반어휘에 비해서 차용어의 침투가 적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잔존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같은 조어에서 분기된 동계언어의 연구에 이용된다.
다른 언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국어의 어휘도 고유의 요소와 외래의 요소에 의해서 형성되어 있다. 그런데 아직도 국어의 기원과 계통에 대한 연구가 충분하지 못한 형편이어서 어떤 것이 고유의 요소이고 어떤 것이 외래의 요소인가 그 면모를 확연하게 구분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다만, 분명히 외래요소인 것은 밝혀지기가 쉽고 많은 자료가 외래요소임이 이미 밝혀지고 있다.
언어의 계층적 구조에서 가장 외래요소의 침입이 용이한 것이 바로 어휘다. 한국어의 어휘형성에 관여하고 있는 외래요소는 고유요소를 능가한다. 오래된 통계숫자이지만 한글학회 ≪큰사전≫의 분석을 보면 순수국어가 7만4612항목, 한자어가 8만5527항목, 외래어가 3,986항목이다. 한자어만 52.1%에 달하고 다른 외래요소가 2.4%로 도합 54.5%가 외래자료와 관련이 되어 있다. 광복 이후의 구미 각국을 비롯한 세계 각 지역과의 외교적인 관계나 문화교류의 결과 현대어에는 수십을 헤아리는 종족들의 언어가 차용되고 있다.
① 한자어, 기타 외래어의 유입 때문에 유의어(類義語)가 많아졌다. 특히, 한자어가 미치는 영향이 크다. 유의어의 발달은 표현 전달의 명확성을 해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표현성의 풍부’라는 견지에서는 오히려 바람직한 현상이다. 문체론적인 가치를 위하여 적절히 이용될 수 있다.
② 한자어의 영향으로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가 많아졌다. 이것은 언어활동에서 동음의 규칙적인 배열에 의한 리듬을 구성하는 데 이용되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동음이 주는 혼란이 더 문제가 되기 때문에 좋은 점보다는 좋지 않은 점이 더 크다. 한자어의 결점을 들추는 이들이 흔히 거론하는 것이 이 동음이의어다.
③ 한국어에서는 경어법(敬語法)이 복잡하게 발달되어 있다. 그 한 예로 2인칭대명사를 들면 ‘너, 자네, 그대, 당신, 어르신네’ 등이 있어 여러가지 차등을 두고 사용된다. 또, 명사에 ‘님’을 붙여 ‘아버님, 어머님, 선생님, 형님, 누님’이라고 하고, 심지어는 ‘아우님’이라고도 한다. 한자어는 경어법의 발달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대체로 하나의 유의어군이 있을 때 고유어보다는 한자어가 경의를 표하는 말로 쓰이는 일이 많다. 예를 들면 ‘이 : 치아, 술 : 약주’ 등이다.
④ 고유어와 한자어가 유의구조를 형성하고 있어 경어법, 품위 있는 언어사용과 관련하여 그것의 적절한 선택사용으로 여러 가지 의미와 표현효과를 나타내는데, 대체로 한자어가 품위 있고 경의를 표하는 말로 인식되고 있다. 아비·아버지·아버님·가친(家親)·엄친(嚴親)·노친(老親)·춘부장(椿府丈)·망부(亡父)·선친(先親)·선고(先考) 등이 있다. 한자어보다는 고유어가 비속한 말, 욕설 등에 잘 쓰이는 경향이 있다.
⑤ 의성어·의태어 등 음성상징(音聲象徵)의 발달이 눈에 띈다. 이 상징어(象徵語 : 의성어·의태어를 통틀어 상징어라 함.)의 발달은 거의 고유요소에 의존하고 있다. 모음과 자음의 대립을 이용한 변화 있는 표현이 풍부한데, 여기에서도 유의성(類義性)이 나타난다. 즉 어휘의 풍부한 표현성에 기여하고 있다.
⑥ 고유어는 개념어(槪念語)로서의 적성이 한자어에 비하여 약하다. 더구나 한자는 조어력(造語力)이 강하여 학술용어나 기타 전문용어, 그리고 일반용어에까지도 계속 한자어가 증가되는 추세에 있다. 문화어는 한자어라고 하는 말이 이에 기인한다.
⑦ 기초어휘에서는 고유어의 체계가 발달되어 있다. 한자어가 있는 경우에도 한자어보다는 고유어가 일반적으로 쓰인다. ‘숨쉬다 : 호흡하다’, ‘쉬다 : 휴식하다’, ‘해 : 태양’ 등은 고유어에 대응하는 한자어가 있는 예들이고, ‘말하다’, ‘달’, ‘별’ 등은 같은 의미 기능을 가진 한자어가 없는 예들이다. ‘달’에 해당하는 ‘月’이나 ‘별’에 해당하는 ‘星’ 등은 다른 한자와 결합하여 한자어를 형성하는 형태소일 뿐 국어에서 단어가 되지 못한다.
⑧ 친족명칭에서 위로 할아버지대와 아래로 아들의 대까지는 고유어가 있으나 그 밖에는 한자어에 의존하고 있다. 먼 세대, 복잡한 관계일수록 한자어뿐이다. ⑨ 체언이 격에 따라 형식이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외국어로부터 외래요소를 차용하기가 용이하다. 외국어에서 동사나 형용사를 들여다가 명사 내지는 동사나 형용사의 어근으로 이용하기도 하고 특정한 격을 가지는 체언을 들여다가 격을 무시하고 사용할 수 있다. 이것이 어떤 언어로부터도 쉽게 언어자료를 차용할 수 있게 하는 요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