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정개혁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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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6월 동학농민군이 초토사 홍계훈에게 화약의 조건으로 제시한 폐정개혁에 관한 문서. 개혁안.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폐정개혁안」은 1894년 6월 동학농민군이 초토사 홍계훈에게 화약의 조건으로 제시한 폐정개혁에 관한 문서이다. 넓은 의미에서는 동학농민운동 전 기간에 걸쳐 제시된 개혁안을 모두 일컫는다. 봉기 초부터 전주화약 때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폐정개혁안이 제시되면서 농민의 요구가 구체화되어 갔다. 봉기의 원인이 되었던 탐관오리의 숙청·매관매직 등 정치기강 문란의 시정에서부터 농민에 대한 탄압과 가렴주구 철폐, 신분상 모든 차별대우 철폐, 일본 침략에 내통하는 자 징계, 토지의 균등한 분배를 통한 농민의 생계 보장 등 반봉건적·반침략적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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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894년 6월 동학농민군이 초토사 홍계훈에게 화약의 조건으로 제시한 폐정개혁에 관한 문서. 개혁안.
내용

넓은 의미에서의 폐정개혁안은 동학농민운동 전 기간에 걸쳐 제시된 개혁안을 모두 일컫는다. 이 개혁안은 동학농민군의 고부봉기로부터 운동의 진전 과정에 따라 내용이 첨가되고 수정된 것으로 처음부터 일정한 안이 마련된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 자료상으로 보아 여러 가지의 폐정개혁 요구조목이 전해지고 있으며, 내용상으로도 서로 중복되어 있는 것은 운동의 진전에 따른 그때그때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1. 4개조 폐정개혁안(최초 봉기 시점)

처음 동학농민군이 고부에서 봉기했을 때에는 구호가 간단하였다.

① 사람을 죽이지 말고 재물을 손상하지 말 것, ② 충효를 다해 제세안민할 것, ③ 일본오랑캐를 몰아내고 성도를 밝힐 것, ④ 군사를 거느리고 입경해 권귀(權貴)를 모두 죽일 것 등이었다.

사발통문(沙鉢通文) 때의 4개 조항이 탐관오리의 제거와 봉기에 대한 전술 등 주로 봉건사회의 지역적 모순에 관한 동학교도의 시정요구로 되어 있는 데 반해, 여기서는 일본세력의 구축을 주로 주장한 반침략의 내용이 담겨 있다.

  1. 6개조 폐정개혁안(세력 확대 시점)

동학농민군이 봉기해 고부 · 부안 · 흥덕 · 태인 · 정읍 · 장성 · 함평 일대를 휩쓸 때 발표했다는 격문에는 6개 조항이 주장되어 있다.

여기에는 전운사(轉運使)의 이민(吏民)에 미치는 폐해, 균전관의 폐해, 각 시전에서의 분민수렴(分民收斂), 각 포구에서의 선주의 강제적 약탈, 외국 잠상(潛商)의 높은 가격의 쌀무역, 염분에 대한 징세 등이 주장되었다.

  1. 9개조 폐정개혁안(고부 점거 시점)

또한, 동학농민군이 고부 일대를 점거한 당시 법성포 이향(吏鄕)에게 보낸 통문에는 9개 조항의 폐정개혁의 주장이 나타나 있다. 여기서는 이는 위의 6개 조항에다 각종 물건의 도고취리(都賈取利), 백지징세의 폐, 와환(臥還)의 발본 등이 추가되고 있다.

  1. 13개조 폐정개혁안(장성 점거 시점)

1894년 5월에 장성을 점거했을 때 동학농민군이 전라감사 김학진(金鶴鎭)에게 제시한 13개 조항의 폐정개혁 요구에는 위의 9개 조항 외에 탐관오리의 징계, 호역전(戶役錢)을 1년에 2냥(兩)씩으로 배정, 포구에 있어서의 미곡의 사무(私貿) 엄금, 수령이 그 지방에서 산을 사용하거나 농장을 사는 것의 엄금, 보부상의 작폐 금지, 간신(奸臣)의 권리 남용으로 인한 매관의 징계, 국태공(대원군)의 국정 간여를 통한 민심의 회복, 각국 상인 상행위의 포구에의 제한 등이 주장되어 있다.

특히, 여기서 제시되고 있는 폐정개혁의 요구조항은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에 대한 철저한 숙청과 개항 후 나타난 교역의 모순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개항 후 침투해 온 외국 상인과 국내 특전상인의 활동은 미곡의 국외 유출과 함께 물가폭등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봉건사회의 기본적 모순과 함께 외세의 침투는 농민의 생활을 곤경에 몰아넣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개혁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다만, 국태공의 국정 간여가 과연 민심을 돌이킬 수 있었을 지에 대해서는 의문으로 남는다.

  1. 24개조 폐정개혁안(전주화약 체결시점)

한편, 전주화약 때 동학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의 내용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이 무렵 동학농민군과 양호순변사 이원회(李元會) 사이에 교섭이 이루어져 원정서(原情書)라는 형식으로 제시된 폐정개혁에 대한 요구조항은 처음에는 14개 조항이었다. 그러나 다시 이를 보충, 24개 조항으로 작성해 두 차례에 걸쳐 이원회에게 전달하였다.

이 14개 조항 및 24개 조항의 원정서는 그 내용의 일부가 서로 중복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앞서 여러 차례에 걸쳐 제시된 폐정개혁안이 보다 세부화된 것으로, 모두 농민들의 반봉건적 요구와 더불어 농민봉기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봉기 초부터 전주화약에 이르는 동안에 여러 차례에 걸쳐 제시된 폐정개혁을 위한 농민적 요구가 간단한 표방에서 점차 구체화되고 광범한 내용을 담은 수십 개의 조항으로 늘어났던 것이다. 동학농민군의 봉기 원인으로서의 개혁 요구는 정치적으로는 탐관오리의 숙청, 매관매직 등 정치 기강의 문란에 대한 시정에 있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전통적인 수취체제, 즉 삼정(三政)의 문란에 대한 시정과 개항 후 일어난 새로운 사태로서 독점상인이나 외국 상인의 횡포를 금단할 것에 있었다. 전봉준(全琫準)이 뒤에 재판판결 문안에서 초토사에게 제시했다는 27개 조항도 앞의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1. 12개조 폐정개혁안(집강소 설치 시점)

한편, 전주화약 때 전봉준 등이 강화의 조건으로 초토사에게 제시해 새로 설치된 집강소에서 폐정개혁으로 추진되었다는 12개 조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도인(道人)과 정부와의 사이에는 숙혐(宿嫌)을 탕척(蕩滌)하고 서정(庶政)을 협력할 것, ②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사득(査得)해 일일이 엄징할 것, ③ 횡포한 부호배(富豪輩)를 엄징할 것, ④ 불량한 유림(儒林)과 양반배(兩班輩)는 못된 버릇을 징계할 것, ⑤ 노비 문서는 불태워버릴 것, ⑥ 칠반천인(七班賤人)의 대우는 개선하고 백정(白丁) 머리에 쓰는 평양립(平壤笠)은 벗어 버릴 것, ⑦ 청춘과부(靑春寡婦)의 개가를 허락할 것, ⑧ 무명잡세(無名雜稅)는 일체 거두어들이지 말 것, ⑨ 관리 채용은 지벌(地閥)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⑩ 왜(倭)와 간통(奸通)하는 자는 엄징할 것, ⑪ 공사채(公私債)를 막론하고 기왕의 것은 모두 무효로 할 것, ⑫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分作)하게 할 것 등이다.

의의와 평가

이 12개 조목의 폐정개혁안에 대해서는 가공적으로 만들어 낸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일부 주장도 있으나, 대체로 전주화약과 폐정개혁안 자체는 긍정적으로 인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러나 이 12개 조목도 그 내용으로 보아 여러 차례에 걸쳐 주장된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 요구가 집약된 것으로 보인다.

이 조목은 탐관오리 · 양반유림 · 토호들의 농민에 대한 탄압과 가렴주구를 없애고, 신분상의 모든 차별대우 철폐, 그리고 일본의 침략에 내통하는 자에 대해 엄격히 징계하고, 토지의 균등한 분배를 통한 농민의 생계 보장이라는 반봉건적 · 반침략적 요구의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제1조목은 동학교도의 행정에의 협력뿐만 아니라 나아가 참정권의 요구에까지 이르고 있다고 보여진다. 동학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안 12개 조목에는 위기의식이 팽배되어 있던 조선왕조 말기의 봉건적 모순을 타개하기 위한 농민들의 개혁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정치기강의 문란이 가져온 수취체계의 모순, 개항 후 침투해 온 일본 상인의 도량, 봉건적 신분질서의 모순 등 폐정의 내적 · 외적 요인을 지적해 이를 제거해줄 것을 정부에 요구한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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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日省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오하기문초고본(梧下記聞草藁本)』
『매천야록(梅泉野錄)』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속음청사(續陰晴史)』
『동비토록(東匪討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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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군폐정개혁안검토(東學軍弊政改革案檢討)」(한우근, 『역사학보(歷史學報)』23, 1964)
「전봉준판결선언서(全琫準判決宣言書)」
「형사재판원본(刑事裁判原本)」
「고종·홍계훈(高宗·洪啓薰)의 문답사초(問答史草)」
『日本公使館記錄』
『日淸戰爭實記』
「甲午農民戰爭における全州和約と弊政改革案」(朴宗植, 『歷史評論』140, 1962)
「甲申政變と東學亂」(山邊健太郎, 『世界の歷史』11,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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