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 때 서구와의 직접·간접적인 문화적 접촉을 계기로 양복을 입게되었다. 선교사들이 입고 온 양장과 해외에서 귀국한 여성들의 옷차림은 당시 여성들에게 큰 자극이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여성 단체와 언론에서는 한복의 비활동성을 지적하고 장옷의 폐지와 함께 한복의 개량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한복개량운동에 힘입어 사회활동을 하는 여성들과 여학생을 중심으로 긴 저고리를 입기 시작하였으며, 점차 지방 도시와 일반 여성들 사이에서 이러한 형태가 유행되었다. 그리하여 1920년대 이후에는 짧은 저고리는 사라지게 되었다.
우리 나라 최초의 양장은 1890년대에 등장하였으나 최초의 착용자에 관하여는 윤고라(尹高羅), 경옥당, 엄비(嚴妃) 등 의견이 분분하다.
이 때 양장의 공통된 특성은 깁슨걸(Gibson Girl) 스타일·지고(Gigot) 드레스·버슬(Bustle) 스타일 등 S자형 실루엣으로, 대부분이 긴 플레어 스커트에 트레인(train)이 달렸다. 머리는 위로 올리고 레이스로 장식된 챙이 넓은 모자를 썼으며, 단화를 신고 양산을 들고 다녔다.
양복이 공인되고 고종과 엄비가 구두를 신자 1895년경부터 일부 상류층에서 양장에 구두를 신는 사람이 늘어났다. 1899년에 장옷을 폐지하고 대신 우산을 지니도록 청하는 상소를 시작으로 여성 복제개량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 당시의 양장은 하이 네크라인에 모자를 쓰고, 길이가 긴 드레스나 블라우스에 롱 스커트를 입은 차림이 최첨단의 스타일이었고, 머리모양은 팜프도어(Pompadour, 히사시까미, 챙머리)가 등장하였다.
1918년 스커트 길이는 발등정도로 짧아졌고, 하이 네크라인(high neckline)에 소매는 비숍·종 모양의 7부·퍼프 슬리브 등이었다. 머리모양으로 다리미 자루·챙머리·둘레머리 등이 여학생들에게 유행하였다.
1920년대에는 1910년에 위축되었던 양장 차림이 활발해져, 양장이나 치마저고리 위에 코트를 입는 신여성이 등장하였다. 또한 의복이 간소화되면서 속옷도 속적삼·속속곳·단속곳 대신 셔츠·팬티·속치마로 바뀌었다. 정구복·야구복·기계체조복과 같은 운동복이 선보여졌고 로우웨이스트의 원피스·자켓·스웨터·각종 스커트 등과 함께 코트와 방한용 케이프가 유행하였다.
1926년경에는 단발의 유행으로 단발미인, 모단걸(毛斷榤 : Modern girl)이라는 신용어가 등장하였고, 양말을 신으면서 버선 착용이 줄어들었으며, 고무신 외에 경제화나 운동화·구두를 신었고, 하이힐·중힐·부츠·로우힐의 반부츠·흑백의 콤비구두가 유행하였다.
우리 나라 최초의 미용사였던 오엽주(吳葉舟)가 일본에서 돌아와 화신백화점에서 미장원을 개업한 것은 1933년이다. 퍼머·세팅·매니큐어·신부화장 등을 하였는데 가스난방에 의한 더운물이 항상 나오고 드라이어가 있는 최신시설로 특수층에 속하는 여성층이 이곳을 애용하였다. 1937년부터는 젊은 여성들이 단발에서 파마머리로 머리모양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한복과 양장을 같이 입었고 개량한복에 스웨터를 입는 차림이 많아졌으며 여기에 서양식 머리모양이나 숄·양산·핸드백 등을 착용하기도 하였다. 양장은 여성적인 부드러운 스타일로 원피스나 오버블라우스에 벨트를 하여 허리선을 강조한 스타일이 유행하였다.
일제말기 전시체제하에 들어서면서 파마나 사치스러운 의복의 착용은 모두 금지되었고, 허리에 벨트가 있고 포켓이 있는 원피스인 간단복이나 몸뻬로 대체되었다.
광복이 되자 처음에는 몸뻬와 간단복 대신에 재래 한복이나 통치마 저고리를 입었으나 미군정 실시와 해외동포의 귀국으로 다시 양복화가 촉진되었다.
양장은 광복 전까지는 군복 스타일이 유행하였으나 광복 이후에는 퍼프 슬리브에 허리가 강조된 재킷과 폭넓은 플레어 스커트의 부드럽고 여성적인 스타일이 등장하였다.
광복 직후 물자부족 속에서 일제말기부터 입어 왔던 블라우스·스커트·원피스 등 밀리터리 스타일의 의복을 계속 입었다. 왜색을 탈피하자는 주장 속에서도 일부에서는 여전히 간단복이나 몸뻬를 착용하였다.
한편 광복 후 사회가 안정되어 가고 이와 더불어 여성복식이 서구화의 방향으로 달리고 있던 중 1950년 6월 25일의 한국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어 여성복식은 침체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전쟁 중에는 군복을 재생한 옷이나 구제품 의복이 대부분이었고, 광복 직후에 입던 옷들을 그대로 착용하였다.
그러나 전쟁 중에서도 외국직물인 빌로드가 들어와 대단한 선풍을 일으키며 유행하였고, 나일론은 겉옷은 물론 속옷·양말에까지 사용할 정도였으며, 기계주름을 잡은 아코디언 플리츠 스커트가 대단한 선풍을 일으켰다.
6·25가 끝난 후 얼마 동안은 이전의 의복을 그대로 입었지만 점차 사회가 제자리를 잡아가면서 양장은 활기를 띠어 갔다. 전후 여성의 사회진출이 늘어나고 교육의 기회도 더욱 확대되면서 양장을 착용하는 인구가 늘어났다.
1950년대 초기에는 남성적인 재킷과 타이트 스커트의 밀리터리룩(military look)을 많이 입었으나 점차 여성적인 분위기로 바뀌어 1947년에 도입된 짧은 상의와 넓은 플레어 스커트의 뉴룩(new look)이 1953년 이후 일반 여성들에게 유행하였다.
여기에 H라인, A라인, 색 드레스(sack dress), 엠파이어 라인(empire line) 등이 새로이 소개되었다. 맘보춤과 함께 맘보바지가 선풍을 일으켰으며, 샌들과 가는 굽의 하이힐이 유행하였다. 핸드백도 다양해지고 액세서리의 사용도 늘어났으며, 이 시기에는 또 장갑이 유행하여 여름에는 레이스 장갑, 겨울에는 캐시미어나 양피 장갑이 유행하였다.
또한 1960년을 기점으로 착용 인구면에서도 양장은 한복을 능가하게 되었으며 일상복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초기에는 튜불러형의 오버코트나 색 드레스 등의 단순한 박스 스타일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맘보바지 형태의 오드리 햅번 스타일 슬랙스가 등장하였다.
중반까지는 색 드레스가 유행하다가, 후기에는 몸의 선을 강조하는 A라인 스타일에 화려한 색상이었고, 기하학적 문양의 프린트나 강렬한 색채의 대비, 대담한 절개를 시도함으로써 의복에 장식적인 경향이 나타났다.
1960년대의 또 다른 특징은 미니 스커트와 판탈롱의 등장이라 할 수 있다. 1965년 서구에서 복식의 혁명을 이루었던 미니 스커트가 1967년 가수 윤복희(尹福姬)의 귀국과 함께 상륙하여 1968년에 유행하였고, 1970년대 초에는 무릎 위 20㎝ 이상까지 올라갔다. 1968년에는 판탈롱이라 불리는 테일러드 팬츠슈트가 등장하였다.
1970년대 초기의 유행 경향은 미니 스타일, 미디, 맥시, 판탈롱, 핫팬츠 등 다양한 모드가 공존하였다. 1971년부터는 핫팬츠와 오버코트를 이용한 레이어드 스타일이 소개되기도 하였으며 무릎길이의 큐롯수트도 유행하였다.
중반 이후에 판탈롱은 폭이 넓고 길어졌으며, 이와 함께 롤 드레스나 월남치마로 불리던 롱 스커트가 많이 유행하였다. 또한 새롭게 등장한 농민풍 블라우스와 집시 스타일의 민속풍이 유행하였으며, 패딩으로 어깨를 강조한 재킷과 슬릿 스커트, 통이 좁고 짧아진 바지와 박스형 원피스를 볼 수 있다.
머리모양은 스트레이트와 전체적으로 웨이브가 있는 스타일이 유행하였으며, 젊은층에서는 생머리가 유행하였고, 1979년에는 디스코 머리가 등장하였다.
1980년대 초반에는 어깨를 강조하는 빅 앤 루스(big & loose) 실루엣의 레이어드 룩이 계속 유행하였으나, 후반에는 여성스러운 분위기가 두드러져 바디 컨셔스(body conscious)의 원칙하에 피트 앤 플레어(fit & flare)를 비롯하여 A라인, Y라인 등이 나타났다.
스커트 길이는 미니부터 샤넬라인, 미디, 맥시에 이르기까지 혼재하였으며, 형태에 있어서도 타이트 스커트, 플레어 스커트, 플리츠 스커트 외에 머메이드 혹은 트럼펫 스커트 등 다양하게 나타났다.
바지는 1982년을 전후로 배기형의 디스코 바지와 7부 길이의 바지, 승마바지인 죠드퍼즈와 일명 고리바지라고 하는 타이트 바지가 유행하였다. 1989년경에는 통바지가 유행하는 등 다양한 바지 스타일의 등장이 1980년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스포츠 의류가 일상화, 대중화되어 패션다운 파카가 겨울에 크게 유행하였으며, 스톤 워싱이라는 패션진이 등장하였다. 신발은 캐주얼 붐으로 단화, 운동화 등이 애용되었으며, 화려한 색상의 스타킹과 반짝거리는 원색 에나멜 구두가 유행하였다.
1990년 초에는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의 급증으로 자연으로의 회귀를 꿈꾸는 애콜로지(ecology)가 주요 패션 테마로 나타나 장식을 최대로 절제하고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여성미를 강조한 미니와 미디의 레이어드 룩이 등장하였다.
스커트 길이는 1980년대보다 더욱 짧은 미니 스커트가 유행하였으며, 에콜로지의 영향으로 화려한 원색의 식물 프린트 문양의 롱 스커트가 여름 시즌에 유행하였다.
1993년에는 타이트 롱 스커트와 미니 스커트가 함께 유행하였고, 바지는 긴 길이의 통바지가 유행하였으며, 쇼트 팬츠가 대중화되었다. 머리모양으로는 자연스런 긴 퍼머넌트 머리를 풀어헤치거나 긴 생머리 스타일이 유행하였다. 신발은 민속풍의 인디언 모카신이 캐주얼 슈즈로 유행하였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여성복식은 개화기 이후 양장이 도입되어 초기에는 한복의 개량 또는 한복에 양장을 혼용하는 양상이 나타났으나 활동의 간편성으로 말미암아 점차 양장을 하는 경향이 많아졌다.
이러한 추세는 광복과 6·25를 거치면서 더욱 짙어져 1960년대를 기점으로 여성복식은 양장화하여 일상복으로 양장이 착용되고, 한복은 의례복화하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남성들이 양복을 착용한 것은 관복에서 비롯되었다. 최초의 개혁은 1884년에 있었던 갑신의제개혁이었으나 당시에는 잘 시행되지 않다가 10년 후인 갑오개혁 때 다시 간소화가 시도되었다. 즉 1896년 4월에는 구미식 군복으로 육군복장규칙이 제정되었고, 같은해 8월 1일에는 문관복장이 간소화되어 반포되었다.
1899년에는 외교관의 복식을 양복화하였으며, 1900년에는 문관복장규칙이 발표되어 문관의 예복으로 양복을 입게 하였다. 이 때 반포된 문관예복은 영국의 궁중예복을 모방하여 만든 일본식 예복을 참작하여 만든 것이다.
특히 고종의 단발, 프록코트, 실크햇의 착용과 순종이 양복차림을 한 일행 70명을 거느리고 실시한 지방시찰은 복장개혁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1900년대에서 1910년대에 이르는 시기는 관복이 양복화되면서 상류층에서 양복을 입기 시작하였으나 가정에서는 일반인들과 같이 한복을 입어 한복과 양복의 이중복식생활의 시기이다.
1902년에는 한흥 양복점이 한인에 의해 처음 개설되었다. 1910년대에는 중머리와 하이칼라머리가 등장하였으며, 1919년 고종황제가 승하하던 해부터 파나마모자, 맥고모자, 중절모가 유행하였다. 신발로는 한복에 양말이나 버선에 구두를 신기도 하였다.
1920년대는 양복의 확산기로 양복 착용이 크게 성행하였고, 양복에 두루마기 대신 스프링 코트와 오버 코트를 입었으며 셔츠·넥타이·모자·구두·지팡이·회중시계·넥타이핀 등의 장신구를 갖추었다. 고무신이 일반화되었고, 일부 부유층에서는 서양 단화를 신거나 단화와 고무신을 절충한 끈없는 단화를 신기도 하였다.
1930년대에는 유학생들이 귀국하면서 양복이 급격히 널리 퍼졌고 그 종류 또한 다양해졌다. 중반 이후로는 풍성한 느낌의 볼드룩과 상하가 다른 세퍼레이트가 1920년대 이후 계속 유행하였다. 특히 짙은 색 상의에 흰 바지를 조화시켜 입는 것이 당시의 특징이었다.
후반기에는 각이 지고 딱딱한 군복풍의 양복이 등장하였다. 1940년 전후에는 한복과 양복을 절충하여 바지 저고리 위에 오버 코트나 망토를 입었으며 지방에서는 양복지로 만든 두루마기에 흰 동정 대신 비로드나 털을 달아 입기도 하였다.
한편 일본은 창씨개명, 황국신민화 등의 정책을 수행하면서 관리들과 교원들에게 일본 국민복 입기를 강요하였다. 국민복은 국방색 모자와 스탠드 칼라의 상의, 당꼬바지에 각반을 찬 차림으로 의복 소재는 우모지·면 등이었다.
해방 후에는 해외동포의 귀국으로 양복 유행이 가속화되어 아이비(ivy) 스타일과 유럽 스타일이 도입되었다. 양복지는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서지와 홍콩과 마카오에서 들어오는 제품이 대부분이어서 당시 멋쟁이는 ‘마카오 신사’라 불리웠다.
후반에는 ‘로마에’라 불리웠던 더블브레스트가 유행하여 가슴주머니에 포켓치프를 꽂고 색안경과 파이프를 물고 있는 모습이 멋의 전형으로 인식되었다.
1950년대에는 여성복과 마찬가지로, 초기의 곧고 딱딱한 군복형에 비하여 후반에는 어깨 패드를 작게 하여 한층 자연스러운 어깨와 여유 있는 실루엣에 칼라가 좁으면서 상의의 길이가 긴 아이비 스타일이 유행하였다. 바지통도 헐렁하여 접단이 대부분이었다.
1955년경부터 신사복이 점차 보편화되면서 더블 브레스트가 유행하였다. 넥타이는 줄무늬나 사선 무늬로 칼라보다 폭이 넓지 않았으며 올백형의 머리와 색안경이 멋쟁이의 상징이었다. 특히 1958년부터 1960년에 걸쳐 남자들 사이에서 파나마 모자가 유행하였다.
1960년대는 양복의 전성시대로 양복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농촌 지역에서도 양복의 착용이 보편화되었다. 초반에 재건국민운동본부는 노동자에서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재건복을 착용하도록 하였는데, 이의 영향으로 작업복 차림과 점퍼·콤비 등의 캐주얼웨어가 등장하였다.
이 시기에 새로 도입된 유럽형 콘티넨탈룩은 어깨 넓이가 넓고 어깨 끝이 내려앉는 드롭숄더에, 허리는 약간 조이고 가슴과 어깨 부분을 돋보이게 한 실루엣으로 상의의 길이는 약간 짧은 편이고 뒤쪽의 좌우 아래를 튼 옆트기가 많았다.
1970년대에는 젊은 세대에서 유니섹스모드와 히피 스타일이 등장하였다. 60년대 말에 비하여 칼라가 더 넓어지고 피크 라펠이 주를 이루었으며, 바지는 판탈롱의 영향으로 부리 부분의 폭이 넓어지고 길이도 길어졌다.
중반에는 볼드룩이 퇴조하고 1978년부터 조금씩 칼라 폭과 넥타이 폭이 좁아지고 재킷의 길이도 다시 짧아졌으며, 바지 길이도 역시 짧아졌다. 한편 어린이에서 대학생·중년의 남녀까지도 블루진을 즐겨 입어 1978년은 블루진의 전성시대를 맞이하였고, 머리는 귀를 덮을 정도의 긴 장발이 유행하였다.
1980년대에는 남성들도 토탈패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코디네이션에 의한 다양한 스타일이 연출되었다. 전문직이나 자유직에 종사하는 남성들에게는 이태리풍의 고급 캐주얼 정장이 좋은 반응을 얻었다.
1988년부터는 블루종 스타일의 가죽 점퍼가 유행하였으며, 짧은 단발이 다시 유행하였고, 남성의 여성패션 경향으로 퍼머넌트를 하거나 목걸이나 팔찌를 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넥타이핀·포켓치프·멜빵 등의 액세서리로 코디네이트 하는 경향이 늘어났다.
1990년대에는 신사 기성복 업체들이 브랜드 세분화로 프랑스풍, 이탈리아풍, 영국풍, 미국풍으로 다양해지고 남성복 시장이 급성장하였다. 한편 사회 초년생과 학생층을 표적으로 한 중저가 브랜드가 확대되었으며, 아메리칸 캐주얼풍의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실루엣에 내추럴색상의 캐주얼웨어가 유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무스나 스프레이 등을 사용하여 머리 형태를 세팅하는 경우가 많아졌으며, 신발로는 캐릭터웨어나 캐주얼웨어의 유행에 따라 편안하고 활동적인 캐주얼화나 앵글부츠가 애용되었다.
남성복식은 1894년 갑신 의복 개혁 이후를 기점으로 조복·사복·일반국민들의 복장에 이르기까지 보다 간소화되었고, 단발령과 함께 양복을 제도적으로 허용(1895)하여 궁중과 정부요인, 그리고 상류층 남녀가 양복을 수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점차 그 수가 증가하였다.
1900년을 전후한 양복의 도입기에서 1930년대까지 신사복의 형태는 일본과 더불어 영국풍이 주류를 이루었고 40년대 전반기 제2차대전 중에는 군복풍이 지배하였다. 광복 이후부터 현재까지는 상의의 깃·바지통이 넓어졌다 좁아졌다 하는 유행이 있어 왔다.